[이택광의 나의 철학수업] 어려운 책은 돌아온다

철학책은 한 번 읽고 던져버리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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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조차도 과학주의의 영향 아래 의식을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후설의 판단이었다. 결국 후설의 생각은 자연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의식의 문제를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더 논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 후설과 사르트르의 관계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철학책은 한 번 읽고 던져버리는 책이 아니다. 사유의 고비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 철학책이다. 어려운 책일수록 다시 돌아온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도 마찬가지이다. 묘하게도 나는 20대에 읽은 책을 30대에 박사학위를 위해 되풀이해서 읽어야했다. 그리고 지금도 수시로 나는 사르트르의 책을 들춰보는데, 그 중 가장 애독하는 것이 바로 『존재와 무』다.

특히 요즘 자주 펼쳐보는 대목은 ‘무’에 대한 장이다. 최근 내가 관심 있는 주체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패기만만하게 후설과 하이데거의 논쟁에 개입하는 사르트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박진감 있는 장면이 이 장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스승 후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추상성과 구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후설은 빨강을 하나의 추상으로 본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추상적이라는 것은 형상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런 형상적인 추상성의 반대에 놓이는 것이 ‘사물’이라는 구체성이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그 자체 속에 즉자(卽自)를 향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상도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은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은 다만 종합적인 전체로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의식은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 종합적 전체의 계기를 이루는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것은 세계 속의 인간이다. 더욱이 그것은 하이데거가 ‘세계-속(內)-존재’라고 부른, 인간과 세계의 그 특수한 결합을 지닌 ‘세계 속의 인간’이다. 칸트처럼 ‘경험’을 그 가능성의 조건에 관해 문제 삼거나, 후설처럼 현상학적으로 환원함으로써 세계를 의식의 노에마적 상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특히 추상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일이다.(장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성 역. 동서문화사: 1994. pp. 47-48.)

이 구절에서 미묘한 사르트르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1905년 6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1924년부터 4년간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학위를 취득한 뒤에 그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파리와 르아브르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1933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연구조교 자리를 얻어서 가게 된다. 거기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두 대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후설과 하이데거였다. 일 년 동안 사르트르는 이들과 사제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인용문에 보면, 하이데거 편에 서서 후설을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보다도 후설에게 훨씬 더 깊은 사상적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친근감이 이론적인 결별을 보상해주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이론적인 측면에서 후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는 후설을 떠나서 실존주의를 정립하는 제자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자타가 공인하는 사르트르의 걸작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인 분석이라는 이 책에 대한 정의는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수없이 난무하는 난해한 개념과 표현에 부딪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철학서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책이다. 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실존이라는 테마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후설의 문제의식이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식의 문제이다.

후설의 문제의식은 헤겔 이후 침체에 빠진 독일 관념론을 극복하고, 인식의 영역에서 철학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후설은 ‘마음에 대한 로고스’라는 관점에서 심리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이해에 대항해 현상학을 주창한다. 독일 관념론의 쇠퇴는 곧 실증주의의 융성으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은 과학주의에 대한 철학의 투항을 조장했다. 갈릴레이에서 시작해서 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주의적 전통은 생활세계를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이론화하고 이념화하는 한편,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물현상을 양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는 편향을 보였다.

데카르트조차도 과학주의의 영향 아래 의식을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후설의 판단이었다. 결국 후설의 생각은 자연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의식의 문제를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더 논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 후설과 사르트르의 관계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사르트르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는 후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 물론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보편성을 후설의 보편성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개념이 다르다기보다 위상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후설에게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무엇’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니까 후설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이 존재한다’는 문제라기보다,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래서 그에게 현상하는 개별 사물에 대한 기술은 보편적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괄호 치기’ 과정이었던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면, 보편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존재의 개별성을 괄호 안에 넣어서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좀 더 복잡하게 설명하면, 이런 후설의 방법은 '판단중지'(epoche)인데, 상식이나 믿음을 모두 배제한 순수의식을 인식의 토대로 설정하기 위한 방법론적 유아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이런 후설의 생각은 난센스였다. 왜냐하면 후설이 개별성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보편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개별성이 보편성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개별성이 있고 보편성이 있는 것이지, 보편성이 개별성으로 현시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보면 참으로 싱거운 반전이지만,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르트르는 후설에 대해 각을 세운다. 사르트르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일정부분 니체에게 빚지고 있다. 개별성을 보편성보다 앞선 것으로 파악하는 태도에서 니체의 영향을 읽을 수가 있는 셈이다. 이런 경향이 솔직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존재와 무』에 있는 ‘실존적 정신분석’이라는 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의 ‘심리’를 해명하고자 하는 비평가라면 다음과 같이 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야심과 억누르기 힘든 힘이라는 이중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북돋움을, 소년 시절부터 이미 자신의 정상적인 상태로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 그의 끓어오르는 젊은 피는 여기서 문학적인 정열로 바뀌었다. 이런 일은 조숙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경우, 18세 전후에 흔히 일어나곤 한다. 그들은 크게 행동하고 세차게 받아들이고픈 욕구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것을 가라앉힐 수단을 문장의 힘 또는 허구의 강렬함 속에서 발견한다.(샤르트르. 같은 책. pp. 906-907.)

이런 비평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플로베르의 문학 자체를 소년 시절부터 확립되어온 심리로 곧바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심리적 환원에 대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 한 구절에서는 한 청년의 복잡한 인격을 약간의 원초적인 욕망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마치 화학자가 복합적인 물체를 단순한 물체를 이루는 하나의 조합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할 때와 같은 방식이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런 심리학적 ‘분석’은, 어떤 개별적인 사실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법칙들의 교차에 의해서 생긴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설명되어야하는 사실 - 여기서는 젊은 플로베르의 문학적 소질 - 은 ‘청년 일반’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이고 추상적인 욕망들의 한 조합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경우에 구체적인 것은 단지 그 욕망들의 조합뿐이다. 그런 욕망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단순한 도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설에 의해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에 앞서고 있으며,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인 성질들을 이루는 하나의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샤르트르. 같은 책. p. 906.)

이런 경험적 심리학에 대한 비판에서 사르트르의 생각은 확연하게 후설과 갈린다. 후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의문을 내포한다. 이런 환원이 궁극적으로 구체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구체성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바로 인간이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사르트르를 휴머니스트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엄연히 이 인간은 ‘무를 항상 붙이고 다니는 존재’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경험적 심리학에 대항해서 실존적 정신분석을 정초하고자 한다.


이 실존적 정신분석의 '원리'는 인간은 하나의 전체이지 하나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가장 무의미하고 가장 피상적인 행위 속에도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나타낸다. 달리 말하면, 아무 것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하나의 취향, 하나의 버릇, 하 나의 인간적 행위란 없는 것이다.(사르트르. 같은 책. p. 922.)

이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나열해서 목록으로 만드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독'하는 방법이 바로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이처럼 개별성에 선행하는 보편성에 대한 거부는 곧바로 앎의 선행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개별성이 있기 전까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가 있기 전까지 앎은 없다. 그래서 사르트르에게 앎과 보편성은 선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취해야하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것이다. 이 성취는 그냥 개별성에 대해 ‘사유’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을 만들어 갈 때 비로소 도래하는 것이다. 현실에 개입하는 행동을 자유의 조건으로 결정짓는 파격적인 주장이다. 나의 20대가 왜 사르트르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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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존재와 무

<사르트르> 저/<정소성> 역25,200원(10% + 0%)

인문학적,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사상과 저서들을 남긴 사르트르의 저작이다. 존재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그의 고민과 주장들을 책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그렇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을 풀어가는데 있어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념을 이어받는 한편,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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