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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파트라고?

아파트라는 거주기계(居住機械) 그리고 사이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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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라는 거주기계(居住機械) 그리고 사이보그

그런데 전통시대엔 집만이 우주의 축소판으로서의 코스모스였던 건 아니다. 그 집 안에 깃들어 사는 인간 역시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코스모스였다. 두개골이 태양과 달, 뭇별들, 천신들이 깃들어 사는 하늘에 해당하고 하체가 온갖 생명을 키워내는 땅에 해당한다. 등골은 천신들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세계인 땅을 잇는 하늘 사다리이다.

나는 몹시 심란할 때 가끔 국립박물관에 있는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보러 간다.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우주의 축소판으로서의 인간, 성화된 인간, 코스모스로서의 인간을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낸 예술작품이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모습. 한 다리를 다른 다리에 얹었다. 그 얹은 다리가 팔꿈치를 받치고, 그 팔의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자세가 참 편안해 보인다. 그렇게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아래를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다 알겠다는 건지, 인간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그렇게 웃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지, 그렇게 내려다보이는 게 인간의 누추한 삶이 아니고 우주 삼라만상 전체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소이다.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성화된 인간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런 자태와 미소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전율과 아릿한 그리움을 느낀다.

전율은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 세속적 현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게다. 스스로를 상품으로 팔며 살아가는 현대인이 스스로를 우주의 신성이 깃든 하나의 소우주로 생각하는 백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세계를 어떻게 짐작인들 할 수 있으랴. 오직 그 까마득한 낙차에 전율할 뿐이다.

그런데 그 까마득한 낙차를 느끼고 전율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된 현대인의 내면에 성화된 세계의 흔적이 파편으로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 까마득한 낙차에 전율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파편으로 남아 있는 흔적이 이미 사라진 세계에 대해 아릿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

종교사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현대인은 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세속적 인간이지만 동시에 전통시대 인간의 후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이 아무리 성스러운 것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의 내면에는 성스러운 것들의 파편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첫사랑의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에 대한 특별한 느낌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또 사막이나 대초원, 웅장한 산악이 주는 숭엄한 느낌 같은 것도 그런 것이다.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엘리아데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집과 관련해서도 엘리아데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적어도 한국 도시의 주거형태를 보면 엘리아데의 말은 틀린 것 같다.

서울 시내의 남산이나 강남의 우면산에 올라가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라. 고층아파트가 시가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시각적인 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통계상으로도 50퍼센트 이상의 한국인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 농어촌을 빼고 도시만 본다면 그 비율은 더 높을 것이고, 이 비율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주거 면에서만 보았을 때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과연 전통시대 인간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파트는 일종의 거주기계(居住機械)이다. 거주기계란 말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공사장의 인부들이 공사기간 동안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가져다놓는 컨테이너 상자를 생각하면 된다. 아파트는 훨씬 크고 내부가 잘 꾸며진 컨테이너 상자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신전(神殿)으로서의 집의 개념이 파편화된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거주기계이다. 아파트는 애초에 신들의 파편화된 흔적조차 있을 수 없는 공간이다. 아파트는 본질적으로 신성과는 무관한 순수한 기계인 것이다.

흔히 도시인을 유목민에 비유하고 아파트를 유목민들의 이동식 집인 게르(ger)에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신화적으로 보면 매우 잘못된 비유이다. 유목민들의 집이 이동식이라고 해서 신전의 개념과 무관할 거라고 보는 건 대단한 착각이다.

유목민들의 이동식 집은 농경민들의 집보다 훨씬 더 신전의 개념에 가깝다. 유목민들의 신화에서 우주는 거대한 천막이다. 하늘은 거대한 천막의 지붕이며 거기에 해와 달, 별 등의 천신들이 산다. 유목민들의 게르는 이 거대한 우주 천막을 축소해놓은 소우주이다. 유목민의 게르에서 천막의 지붕은 하늘이며 천막의 가운데 세워진 기둥은 하늘과 땅을 잇는 하늘 사다리이고, 그 기둥의 끝에 뚫려 있는 연기 구멍은 하늘신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이다.

그 기둥의 아래 바닥에는 난로를 놓는데 그 자리가 바로 천신의 딸이자 불의 신인 골룸토의 영역이다. 그리고 게르의 내부공간 배치는 하늘신 텡그리들의 하늘에서의 위치와 똑같이 배치한다. 게르는 항시 북쪽을 등지고 남쪽으로 출입문을 낸다. 게르 내부공간에서 북쪽은 가장 어른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북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왼편(현대의 방위로 동쪽)이 남자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오른편(현대의 방위로 서쪽)이 여자가 거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문이 있는 남쪽이 아이들의 자리이다.

게르 내부공간의 이러한 배치는 하늘에서의 텡그리들의 공간배치와 일치한다. 하늘세계에서 왼편 하늘은 선한 텡그리들의 영역이다. 그리고 오른편은 선한 텡그리들과 대립하는 악한 텡그리들의 영역이다. 북쪽 텡그리와 남쪽 텡그리들은 중립적인데 선한 텡그리들에게 다소 우호적이다. 모든 텡그리들의 아버지가 되는 텡그리는 사방의 텡그리들로부터 초월해 있어 텡그리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아버지 텡그리의 자리는 굳이 따진다면 북쪽이다. 그러니까 선한 텡그리들의 자리에 남자들이 기거하고, 악한 텡그리의 자리에 여자들이 기거하는 셈이다. 그리고 아버지 텡그리의 자리인 북쪽에 가장 높은 어른이, 남쪽 텡그리들의 자리에 아이들이 기거한다.

이렇게 살피고 보면 순수한 거주기계인 아파트와 대우주의 모습을 엄격하게 축소해놓은 신전으로서의 게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상호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도시인과 유목민도 마찬가지다. 유목민의 몸이 우주를 축소해놓은 소우주로서 신성이 깃드는 장소라면 도시인은 소화기계, 생식기계, 호흡기계, 신경기계 등을 조립해놓은 사이보그에 가깝다.

마지막 인디언들이 이렇게나 많이 우글우글 모여살고 있었네?


아파트와 아파트 문화가 압도하고 있는 서울에서 단독주택을 고집하며 살다보면 종종 외롭게 살아남은 마지막 인디언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니면 아직 몸의 어딘가가 기계로 교체되지 않은 불완전한 사이보그라고나 할까? 아침에 일어나 시야를 가리는 아파트 숲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어디엔가 나처럼 외롭게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인디언을 향해 불을 피우고 북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아니면 몸의 어딘가가 아직 기계로 교체되지 않은 불완전한 사이보그를 찾아 텔레파시를 날리든지.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인디언이나 아직 몸의 일부가 기계로 교체되지 못한 불완전한 사이보그로 외롭게 헤매다가 우연히 마지막 인디언들이나 불완전한 사이보그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이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반가움에 앞서 엄청난 문화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지 않을까? 프랑스에 갔을 때 받은 문화적 충격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2006년 봄, 나는 내 동화 『고양이 학교』의 사인회를 위해 파리 도서전에 갔다. 파리 도서전에서 사인회를 마치고 라발이라는 중소도시에 사인회를 하러 갔을 때이다. 사인회가 끝나고 시간이 좀 남자 거기 서점 주인이 옛날 성 구경을 시켜주었다. 성은 대개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라발의 성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성에 올라가자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시내의 집들은 대개가 1, 2층짜리 단독주택이고 큰길가의 건물들도 높아봐야 4, 5층이었다. 강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도시는 무척 안정되어 보이고 아름다웠다. 나의 눈길은 나도 모르게 시내의 여기저기를 헤매었다. 고층아파트가 가득 들어차 있는 서울의 풍경에 하도 익숙해서 무의식적으로 삐쭉 솟은 고층아파트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평선 끝쯤에 다른 시가지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게 높이 솟은, 우리나라로 하면 주상복합건물 같은 게 보였다. 시가지에서 높이 솟은 건물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한국식의 통념으로 거기가 이 도시의 중산층들이 사는 곳인가보다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건물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왔다. 서점 주인이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매우 동정 어린 표정으로 그곳은 빈민들이 사는 아파트라고 했다. 집이 없는 빈민들을 위해 정부가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말뜻대로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내 외국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 잘못 들은 걸까? 나는 같이 간 내 동화번역자 임영희 씨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임영희 씨도 똑같은 대답을 하며 한국과는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아파트가 빈민들이 사는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이 잘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럼 이 도시의 부자들이 사는 곳은 어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서점 주인은 성으로 올라오는 길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이층집들을 가리켰다. 그 집들은 중세 때 지은 것들이어서 어떤 집은 전체적으로 옆으로 조금 기울어 있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뭐야? 나 같은 마지막 인디언은 희귀종인 줄 알았더니 여기는 맨 마지막 인디언들만 우글우글 모여살고 있네?

라발 사인회가 끝난 뒤 며칠 시간이 있어서 나는 임영희 씨와 함께 시골의 브로캉트라는 시장을 두 군데 정도 다녀보았다. 브로캉트는 시골 지역별로 일 년에 한두 번 여는 시장인데 그날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집 안의 낡은 잡동사니들을 들고 나와 팔았다. 농부들이 길거리에 전을 벌이고 우리로 하면 벌써 쓰레기통에 버렸음직한 잡동사니들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래된 마룻바닥 판자까지 팔았다. 나는 좀 이해가 안 되어서 저런 마룻바닥 판자 같은 걸 누가 사 가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임영희 씨는 라발의 그 중세 때 지은 집의 주인 같은 사람들이 사 간다고 했다. 그런 데 사는 사람들은 마룻바닥이 빠지면 새 판자를 사다가 고치지 않는다고 했다. 비슷한 나무 재질에 비슷하게 오래된 판자를 구하러 브로캉트를 뒤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현대인은 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세속적 인간이지만 동시에 전통시대 인간의 후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이 아무리 성스러운 것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의 내면엔 성스러운 것들의 파편이 존재한다”는 엘리아데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유럽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라면 주거문화에서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문득 강한 의구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동양은 전통적이고 서양은 현대적이라는데 왜 한국사람들은 전통적인 집과는 완전히 단절된 아파트라는 거주기계에 살고, 서양사람들은 중세에 지어진 집을 그렇게 고집하며 살고 있는가? 또 한국인으로서 개인의 내면적 경험을 성찰해보면 세속적 인간인 현대인에게도 성스러운 것들이 파편의 형태로나마 존재한다는 엘리아데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왜 한국사람들은 유독 주거형태에서만은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한 아파트를 선호하는가? 이게 매우 예외적이고 특수한 주거문화라면 그 특수한 주거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특수한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집에는 수많은 신들이 인간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신들은 어떻게 그 짧은 세월 동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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