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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으로 취급받던 한 남자의 애달픈 사랑 - <길>

길 위의 고독 -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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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La Strada, 1954년)
음악: 니노 로타(Nino Rota)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제작: 디노 데 라우렌티스(Dino De Laurentiis), 카를로 폰티(Carlo Ponti)
주연: 줄리에타 마시나, 안소니 퀸, 리처드 베이스하트

<길>

<길>의 오리지널 포스터
제목만 들어도 오래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옛 세대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설화 같다. 순수한 영혼과 사랑, 그리고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오래된 이 흑백영화의 내용을 지금껏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막연하면서도 깊은 인상은 누구나 가슴에 담고 있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길>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연스럽게 잠재해 있는 영화들이 몇 있다. <길>은 그 가운데서 첫째로 꼽을 만하다. 야수 같은 인간 잠파노, 어수룩하고 순진무구한 영혼 젤소미나, 공기 중에 애절하게 퍼지는 니노 로타의 테마 음악, 아련한 트럼펫 소리…… 이런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서 일종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허공에 흩어지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길>을 다시 본다. 이탈리아 동쪽의 어느 바닷가, 펠리니의 잠재의식의 근원이랄 수 있는 고향 리미니 근처의 바다이다. 과연 잠파노(안소니 퀸)는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표현대로 아무 생각도 없는 짐승 같은 존재였을까. 오히려 가장 고독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대화를 나눌 상대도, 대화로 삼을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잠파노는 슬픔도,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저 우둔하고 육욕이 넘치는 정력적인 남자였을 뿐. 차력사 노릇을 하며 이름 모를 낯선 도시를 떠돌던 잠파노가 다른 인간이 될 기회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삶은 끝없이 펼쳐진 길을 떠도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를 길 위에서 보내는 고된 여정 속에서 사랑이나 여유는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잠파노는 펠리니의 소년시절에 각인된 캐릭터이다

‘잠파노’라는 캐릭터는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처음으로 여자라는 존재를 알게 해 준 고향 동네의 가축도살자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동네에서 처녀란 처녀는 전부 침대로 끌고 갔다는 소문이 돌던 사내였다. 그러다 결국 백치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면서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펠리니의 어린 시절에 이렇게 존재했던 한 남자는 <길>에서 ‘잠파노’라는 캐릭터로 되살아난다. 펠리니의 고향 리미니는 이탈리아 동해안에 위치한 소도시다. 그곳은 <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잠파노가 쓰러진 바닷가이기도 하며, <아마르코르드>에서 거대한 여객선 불빛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달콤한 인생>의 바다에서 괴기한 생명체가 발견되듯, 펠리니에게 고향과 바다는 영원한 이야기의 근원이다.

니노 로타의 음악은 ?리니의 영상을 완성해준다. <길>을 본 사람이라면 누가 테마 음악을 잊을 수 있을까. 「젤소미나의 노래」로도 알려진 우수에 젖은 트럼펫 소리와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노래」라는 부제처럼 <길>의 테마 음악은 젤소미나와 동일한 존재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음악도 약간씩 변화한다. 때로는 밝고, 때로는 애절하다. 무언가를 동경하고 갈구하는 분위기로 바뀌기도 한다. 길 위에서 그녀는 무엇을 찾고 있던 것일까. 정신이 온전치 않은 백치였지만 길을 나선 후 막연하나마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가게 되는 젤소미나의 꿈이 이 테마 음악에 담겨 있다. 음악은 젤소미나의 트럼펫을 통해, 혹은 마토(Il Matto: ‘바보’라는 뜻으로, 리처드 베이스하트가 연기)의 미니 바이올린 선율로 반복되며 흐른다.

젤소미나와 마토는 음악을 통해 공감한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들은 각자 상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잠파노에게 젤소미나는 광대일 뿐이다. 감정이나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들을 웃기고 돈만 받을 수 있으면 된다. 잠파노는 젤소미나가 다른 사람들처럼 고민하고 갈등을 하는 게 화가 날 뿐이다. 젤소미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라도 잠파노와 마토는 늘 반목한다. 마토는 끊임없이 그를 곯려대고, 잠파노는 짐승처럼 그를 쫓아다닌다. 결국, 마토는 난폭한 잠파노와의 다툼 끝에 죽임을 당하고, 젤소미나는 외딴 마을에 버려진다. 잠파노는 두 사람의 존재를 외면하고 혼자만의 ‘다른 길’로 도망쳐버린다.

젤소미나, 잠파노, 마토의 캐릭터만으로 펠리니는
고독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들을 훌륭히 그려냈다.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잠파노는 곡예단과 함께 낯선 마을로 간다. 어쩌면 자신이 지나쳤던 곳일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물면서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멜로디가 들려온다. 빨래를 널던 동네 여인이 귀에 익은 곡조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젤소미나가 즐겨 부르고 연주하던 바로 그 멜로디다. 잠파노는 여인의 회상을 통해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절망하고, 파도가 밀려오는 밤바다에 힘없이 쓰러진다. 관객들은 짐승 같은 자로만 여기던 잠파노의 양심과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젤소미나에 대한 감정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길>은 인간의 고독에 관한 영화다. 선한 심성을 지닌 젤소미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 잠파노든 마토든, 혹은 길거리에서 만난 수녀든 어느 누구라도 좋다. 젤소미나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는 고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만남이나 축제, 혹은 정치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서 본원적인 고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는 고독감에서 벗어나고 치유될 수 있다. 잠파노가 언제나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끊지 못한 사슬의 존재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니노 로타의 음악과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상은 서로를 보완해준다. 로타의 음악 덕분에 펠리니의 영상은 훨씬 더 강렬한 서정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커트 하나하나는 강렬하지 않다 해도, 커트들이 연결된 신 전체에 음악이 일관된 인상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이 음악가와 감독은 <백인 추장>에서 처음 작업을 같이 한 후, <길>을 거쳐 <달콤한 인생> <8과 1/2> 등 거의 모든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니노 로타가 <태양은 가득히><대부> 같은 다른 감독들의 영화 음악을 여럿 작?했다고 해도 펠리니와는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길>은 두 거장의 존재와 그들의 영화 및 음악을 동시에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이탈리아 영화와 음악이 살아있음을.

니노 로타의 OST 편집앨범

<길>의 주인공은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나이지만, 「젤소미나의 테마」를 들으면 음악의 존재감도 주인공들만큼이나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 로타가 작곡한 음악을 피아노로 들려주면 펠리니는 음악을 들으면서 방향을 제시하고 의견을 내놓는 식으로 공동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펠리니는 다시 그 음악들을 틀어놓고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하곤 했다. 로타는 음악이 영화를 위해 순수하게 기능적인 역할을 하도록 작곡을 했다. 음악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거나 자기 과시를 위해 작곡을 하는 따위의 주제넘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음악이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 요소이자 환경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로타의 철학에 따르면, 음악은 배경이 되어 영상과 정서를 받쳐주고 주인공이 두드러지도록 돕는 장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로타의 음악은 아주 드물게나마 주인공처럼 앞으로 나설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니노 로타가 <길>에서 들려준 「젤소미나의 테마」 같은 경우이다.

[Tip 1] <길>은 195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 외에도 베니스 영화제, 뉴욕비평가협회 상 등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상들은 그저 눈에 띄는 훈장일 뿐이다. 수상 여부를 떠나서 영화를 보고난 후의 슬픔 어린 감정은 기록들보다 더 오래 뇌리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Tip 2] <길>과 마찬가지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하고 줄리에타 마시나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영혼의 줄리엣>이 있다. 음악을 맡은 사람 역시 니노 로타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영상과 음악은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과는 약간 다른 모습, 꿈결 같은 느낌을 준다. 이야기 또한 논리적이기보다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펠리니의 부인이기도 한 줄리에타 마시나의 연기는 어떤 배우의 연기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독특한 연기다. 천진난만한 눈빛, 약간 모자라고 순진한 표정, 처음 보는 남의 말이라도 무조건 철석같이 믿어버릴 것만 같은 여자, 남자들에게 당하기만 해도 영원히 순정을 가진 여인. 영화를 보고 있으면 줄리에타는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언젠가는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묘한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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