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초입에 섰던 방랑 기사, 『돈키호테』

흘러간 옛 노래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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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돈키호테』는 정말 숭고한 문학적 열정에 의해 쓰인 소설이라기보다는, 출간 당시 스페인에 널리 퍼져 있던 대중 소설의 흐름 속에 등장한 무척 재미난 이야기책입니다.

중세는 끝났고, 봉건 계급은 무너진 시대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기사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기사라는 철 지난 시절의 계급이 갖추어야 했던 덕목들은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는 ‘신사도’라는 이름으로 약간 변형되긴 했지만, 그 표방하는 가치는 크게 달라진 바 없이 지금까지도 사회의 한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기사도의 시대에 유행했던 문학이 기사도 문학이었는데, 실제 기사도 문학 중에 지금까지 오래도록 남아 전해지는 유명한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쇄 매체가 딱히 없었고, 단순하게 음유 시인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가 대부분인 데다가 완벽한 지방 분권 시대였던지라 과도한 지역색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런 와중에 기사도의 존재, 아니 기사의 존재 자체를 매우 뚜렷하게 21세기까지 각인시켜오는 캐릭터가 하나 있습니다. 비루먹은 말에 뭔가 엉성한 갑옷, 꼬챙이같이 말라빠진 기사와 그 뒤를 따르는 약간 어리바리한 시종까지. 사실 이 책은 내용을 아는 것으로 치자면 전 국민 중에도 모를 사람이 드물 책, 『돈키호테』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사실 『돈키호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품 있고 엄숙한 기사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소설의 원제가 ‘라 만차의 기발한 시골 양반’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애초부터 희화화와 풍자를 통해 기사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요소입니다.

실제로 『돈키호테』는 정말 숭고한 문학적 열정에 의해 쓰인 소설이라기보다는, 출간 당시 스페인에 널리 퍼져 있던 대중 소설의 흐름 속에 등장한 무척 재미난 이야기책입니다. 당대를 휩쓸던 기사도 시리즈물의 열풍 속에 일종의 조소이자 풍자로서 등장한 이 소설은, 라 만차라는 시골 동네에서 왕년에 귀족이자 기사였던 한 몰락한 양반 집안의 뼈다귀 어르신 한 분이 벌이는 허무맹랑한 모험이 중심 줄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모든 동시대의 대중 소설이 이제는 역사 논문 귀퉁이나 차지하고 있을 시절에 아직까지 『돈키호테』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이유는 돈키호테와 산초로 구성된 주인공 일행의 성격과 행동이 이루는 절묘한 호흡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쩍 마른 키다리 기사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힌 미친 기사이지만, 기사도라는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을 숭앙하며 모든 세속적인 것들과 맞서 싸우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시종으로 따라다니는 산초는 딱 그 반대의 인물로, 작달막한 키에 뚱뚱한 몸매부터 시작하여 돈을 밝히고 순간순간 이익을 따지며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두 인물은 그러나 교묘한 접점을 통해 완벽한 콤비를 이루게 됩니다. 우선 돈키호테는 망상증 환자라는 점에서 산초의 모든 행동에 대해 기사의 거드름을 통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산초는 어이없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는데, 첫째로 그다지 영민한 머리가 아니어서였고, 둘째로 그게 어떤 면에선 자신의 보신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이유로 뭉친 두 사람이 뒤얽히면서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인간이 가지는 양면성을 극대화시켜 한 사건 앞에 배치함으로써 인간의 양면성이 서로 대화하는 듯한 새로운 광경을 연출합니다.

단순히 두 주인공만의 역할은 아닙니다. 주인공과 함께 사는 시골 마을 라 만차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기괴한 모험에 다채롭게 등장합니다. 어떤 때는 미친 늙은이라며 혼을 내주고, 어떤 때는 가엾다며 그를 돕기 위해 망상의 시초가 된 책을 다 불태워 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늙은 돈키호테를 조롱하기 위해 귀부인이나 귀족 행세를 해 주기도 합니다(돈키호테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준 사람은 마을 어귀의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돈키호테가 혼자 만든 망상이었다면 그냥 어이없는 에피소드였을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표정으로 그에 대응함으로써 당혹스러운 모험 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저자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 대해 당시 유행하는 기사도 소설들을 풍자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 소설이 등장한 1605년은 스페인에선 기사도 문학의 대중적 인기가 정점에 달해 이제 쇠퇴를 시작할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 문학의 흐름은 재미있게도 실제 세계사 속의 스페인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늘 그랬듯이, 돈키호테의 배경을 음미하기 위해 다시 역사로 눈을 돌려 봅니다.

‘지리상의 대발견’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해외 진출이 시작되면서 지중해 최외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출발선부터 유리한 입장을 얻어 해외 팽창을 시작합니다. 특히 해양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실상 최강의 함대라 불리던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는 유럽의 서쪽 대양 교역로를 지배하는 최강의 해양 세력이 스페인임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그 영광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의 등장으로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 스페인은 1585년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 대패하고 와해되면서 몰락의 일로를 걷기 시작합니다. 영국과 무적함대의 이 전투는 단순한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중세와 산업 사회를 가르는 기술적인 점프 포인트였습니다. 주 화력을 대포로 무장한 영국 전함과 르네상스 시절의 해상 전투 기술이 중심이었던 무적함대가 만나 벌인 이 전쟁은 결국 어떤 의미에선 본격적인 산업 제국주의 사회로의 재편을 암시하는 복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부터 세계 진출과 교역의 중심은 런던과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합니다. 스페인은 팔렘방 등지의 향료 교역, 동아프리카 해안에서의 사치품 교역 등에서 마찬가지로 계속 쇠퇴 일로에 놓이게 되고, 남미 지역에서의 세력만을 유지한 채 역사의 중심 이야기 축에선 서서히 멀어지게 됩니다.

과거의 영광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오는 법이기에, 1600년대의 스페인에선 기사도 문학이 유행했습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무적함대도 결국 박살 나고 말았고, 나라의 위상 자체가 달라지고 들어오는 교역품의 양이 줄면서 국민들은 과거의 향수에 더욱 강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돈키호테』를 낳게 한 뒷이야기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들어가는 특징은, 바로 스페인만의 독특한 기사도 정신, ‘레콩끼스따’(reconquista)입니다. 중부 유럽과 게르만 지역에서 발흥했던 기사도와는 달리, 레콩끼스따는 보다 호전적이고 외향적인 형태의 기사도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권을 통일하고 영향력을 떨친 뒤, 서서히 세력이 줄어들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최대 세력이 된 것은 무어 인을 필두로 한 이슬람 세력이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유명한 노래 중 하나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인데, 가톨릭 국가의 한가운데에 이슬람 이름인 알함브라 궁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을 이야기하는 유적입니다.

레콩끼스따는 그런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기독교 귀족들의 투쟁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기독교 정신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부모로부터의 상속이 장자에게만 귀속되고, 둘째 아들부터는 각자 알아서 뭔가 살 길을 찾아야 했던 풍습은(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도 둘째, 셋째가 쫓겨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 정신과 결합하여 강렬한 대외 진출로의 모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초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미 원정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던 이유에는 이러한 레콩끼스따 정신이 밑바탕이 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돈키호테』의 배경이 좀 더 명확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8세기 무렵부터 이슬람과 치열하게 싸워 오면서 호전성과 진취성, 모험심이 커진 스페인에서는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놀라운 해외 진출 시도가 이루어졌고, 또 상당 부분에서 그럴듯한 성과를 거두며 유럽의 강자로 우뚝 설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술 혁명의 변화에서 스페인의 레콩끼스따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길지 못했던 영화로운 시절이 저물면서 중세에 대한 향수가 사회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도에 대한 추앙 속에, 우스꽝스러운 기사도 이야기를 통해 중세 사회에 대한 동경에 조롱을 날린 『돈키호테』가 있었습니다.

결국 소설 마지막에 돈키호테는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기 전, 그는 망상에 빠져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만의 기사도 나락에서 살아온 세월로부터 깨우침을 얻으며, 비로소 허구의 세계를 벗어 나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합니다. 우쭐한 옛 가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노년의 대부분을 이상한 모험에 쏟아 온 한 늙은 방랑 기사가 죽음 앞에서 얻은 깨달음은 어찌 보면 스페인이 걸어왔던 길과도 유사하고, 성공이라는 허황된 꿈을 좇으며 오늘도 세계를 자의로만 해석하며 살아가는 ‘정신 나간’ 현대인들과도 유사합니다.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사실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상마저도 헛것이었던, 안타까운 인생이었을 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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