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소마의 DVD 라이프
법보다 더 중요한 인간애(人間愛) - <누들>
영화는 예측대로 휴머니즘적인 결말에 이르지만, 최근작 중에 <누들>만큼의 감동을 주는 영화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세상에는 언어와 제도를 넘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사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법보다 더 중요한 인간애(人間愛) - <누들>
전쟁으로 남편 둘과 모두 사별한 스튜디어스 미리(밀리 아비탈). 집으로 돌아온 미리는 아이를 봐달라는 중국인 가정부의 부탁을 얼떨결에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한 시간이면 돌아온다던 가정부는 아무 연락이 없고, 미리는 예정에 없던 아이와의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할 줄 아는 히브리어라고는 ‘난 중국 어린이입니다’뿐인 여섯 살짜리 아이 누들(바오치 첸). 미리는 우여곡절 끝에 가정부가 살던 집을 찾아내고 가정부가 강제 출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
매일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온통 어두운 이야기들뿐이다.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사회 빈곤층의 소외감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얼마 전 벌어졌던 고시원 방화 살인 사건은 그래서 더욱 끔찍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삶을 살았던 한 남자는 자신의 처지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거나 오히려 더 약자인 여성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그의 끔찍한 선택의 희생자 절반은 ‘외국인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동포들이었다. 그렇게 ‘강남’이라는 화려한 도심의 그늘에서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희망’을 일구며 살아가던 세 명의 여인들은 갑작스럽게 떠나가야 했다. 더구나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의 사후 처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사회 안전망’에 대해 무심한 이 땅의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씁쓸함을 남겼다.
|
<누들>은 2002년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가 불법체류자들을 모두 강제 추방하겠다는 선언이 있은 후에 벌어졌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영화다. 갑작스럽게 강제 추방된 한 중국인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이스라엘에 남겨 놓고 떠나게 되었던 것. <누들>은 이 이야기에 전쟁으로 두 명의 남편을 잃은 한 미망인의 이야기를 더해 구성한 영화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미리는 이민국에서 중국인 가정부가 강제 출국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미리가 그녀가 아주 중요한 것을 남겼다고 말하자 이민국 관리는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한다. 물론 이민국 관리는 그 선물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장면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주류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철저히 ‘타자’로 본다. 이 영화에서 몇몇 인물들이 중국인들에 대해 ‘그들은 거칠다’거나 ‘그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불편하다’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타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는 이스라엘 사회의 편견을 드러내는 장면들이고, 사실 그건 우리 사회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
물론 <누들>에서 위와 같은 사회적 문제는 영화의 전면에 배치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낯선 두 남녀, 즉 6살 중국인 아이와 성인 이스라엘 여성의 정서적 교감이 매우 중요한 영화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성장’은, ‘누들’이라는 어린 중국인 어린이에 의해 어른인 미리가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미리는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두 남편이 모두 전사(戰死)함에 따라 예상치 못한 이별을 경험한 여성이며 아이가 없다. 즉, 미리는 아내로서의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 관계의 종말은 불행했고 어머니로서 경험은 갖지 못한 미숙한 어머니다. 이로 인해 미리의 인간관계는 늘 삐거덕거리고 어머니로서는 미숙함을 드러내곤 한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서 미리는 누들을 혼자 집에 두거나 아이를 배려하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는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방관하기도 한다.
이런 미숙함은 이 영화에서 단지 미리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미리의 언니인 길라(아낫 왁스만)와 형부 이지(아론 아붓볼)는 미리를 두고 일종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길라는 미리와 자신의 남편과의 친밀감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형부는 미리에 대한 감정이 모호한 편이다. 이 부부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있고 관계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 이런 이들의 어색한 관계 속에서 옛 친구인 마티(이프타크 클레인)라는 남자까지 등장하면서 이들의 풀리지 않는 관계는 더욱 꼬여만 간다. 하지만 ‘누들’이라는 아이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이들의 꼬여버린 관계는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
이스라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언급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60년 역사는 곧 팔레스타인 고난의 60년과 등치되는 것이고, 이 나라에 내재한 정치적인 갈등과 고통은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향하여>나 <바시르와 왈츠를>처럼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들뿐 아니라 이집트 경찰 악단의 이스라엘 방문을 다룬 <밴드 비지트> 같은 소품들까지도 이스라엘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누들> 역시 마찬가지다. 미리가 사별한 두 남편들의 그림자는 미리의 방에 있는 작은 제단(祭壇) 위에 있다. 누들이 미리에게 두 남편이 어디 있는지를 묻고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누들과 미리의 정서적 공감대는 한 단계 상승하게 된다. 그동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누들은 미리가 지닌 상실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미리는 누들의 밀입국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결심하게 된다.
<밴드 비지트>나 <누들> 같은 이스라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이스라엘 영화 특유의 서글픈 공기를 체감하게 된다. 가족이나 이웃의 누군가는 잃어버렸을 그런 적막한 감정이 영화에 묻어나오는 것. <누들>은 물론 적극적인 음악의 사용 등에서 볼 수 있듯 앞서 언급한 다른 이스라엘 영화들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대화합’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 역시 낙천적인 ‘대중 영화’다. 이 영화의 말미에서 꼬여있던 대부분의 관계들은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누들은 일종의 매개체이며 말하자면 ‘천사’다. 소년은 그 순박한 눈망울과 어린이다운 표정만으로 파괴된 이스라엘인들의 공동체성을 회복시킨다.
|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관계 복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중국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공항에서의 해프닝을 통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미리는 중국인들의 도움을 통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스라엘인들과 중국인들은 즐겁게 식사를 한다. 이 영화의 감독 아일레트 메나히미는 누들이라는 ‘타자’를 통해 인간 사이에 흘러야 할 관용의 가치를 역설한다. 미리는 ‘중국’이라는 낯선 곳에 도달해 중국인들의 호의를 접하며 자신의 미션을 완료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국’이라는 기표는 일종의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상향은 물론 인간 사이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의 함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판타지는 한편으로는 썩 기분 좋은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미리는 ‘법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또한 실현하기 힘든 이 진리가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들>은 요즘처럼 산다는 것 자체에 절망할 때 꼭 챙겨볼 만하다. 영화는 예측대로 휴머니즘적인 결말에 이르지만, 최근작 중에 <누들>만큼의 감동을 주는 영화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세상에는 언어와 제도를 넘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사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
극장 상영 시 <누들>은 꽤 성공적인 흥행 스코어를 기록한 영화였다. 불과 10여 개의 상영관에서 18일 만에 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흥행 기록은 소규모 개봉 영화로서는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누들> DVD의 퀄리티는 그다지 훌륭한 편은 아니다. 제3세계 영화들의 경우는 보통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공개가 되고 DVD 출시 등을 거치면 좀 더 좋은 퀄리티의 영상을 선보이는데, <누들>의 경우에는 영화제 상영을 제외하면 정식 극장 개봉한 나라들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판 <누들> DVD의 색감은 약간 칙칙한 느낌이 많이 들고 어두운 장면 등에서는 필름 노이즈가 많이 발견되는 편이다. 스펙상의 해상도는 높은 편이나 원본 소스 자체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는 듯 하다. 아쉽지만 이 영화의 DVD를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 만족해야 할 듯.
|
돌비 디지털 2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영상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편이다. 따뜻한 온기를 담아낸 피아노 중심의 BGM이 잘 살아있는 편이며 낯선 히브리어 대사음들의 표현에 큰 무리가 없는 편이지만, 약간 먹먹하게 표현되는 부분도 느껴진다.
|
서플먼트 역시 전혀 없다. 작은 영화의 흥행작임에도 불구하고 국내판 예고편조차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지만, 출시 자체가 고마운 영화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