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소마의 DVD 라이프
웃기는 주윤발을 만나다 - <대장부일기>
<대장부일기>는 두기봉의 <팔성보희, 1988>, 왕종의 <장단각지연, 1988> 등과 함께 주윤발의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주윤발뿐 아니라 당대 홍콩의 초특급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고 있다.
웃기는 주윤발을 만나다 - <대장부일기>
증권 회사 직원인 주정발(주윤발)은 엽청문의 몸매에 왕조현의 얼굴을 가진 여인을 기다리느라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비 오는 날, 아리따운 주아(왕조현)와 사리(엽청문)를 만나게 되고 그녀 둘과 모두 데이트를 하게 된다. 주정발은 누구에게 청혼을 할지 몰라 고민을 하던 중, 결국 둘 모두와 결혼하게 된다. 결국 정발은 직장 동료인 지형(이자웅)의 도움을 받으며 코믹하고 피곤한 이중 결혼 생활을 해 나가는데…….
|
워낙 <영웅본색>과 <첩혈쌍웅> 같은 홍콩산 느와르 영화의 갱스터 히어로 연기가 강렬해서 국내 팬들에게 주윤발은 아무래도 액션 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80년대 말부터의 주윤발 따거(!)의 인기는 단순히 그의 액션 영화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로 주윤발은 <와호장룡> 같은 영화에서 원숙한 우슈 동작을 선보이기도 했고 단순히 손을 뻗어 총을 내미는 동작 하나에서도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인물이지만, 무술에 대해서는 거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국내에서 <영웅본색>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어 모으자, 그의 모든 영화가 액션 느와르 영화로 소개되면서 제2, 제3의 <영웅본색>을 기대했던 팬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는데, 실제로 홍콩 시절의 주윤발은 <가을날의 동화, 1987> 같은 로맨틱한 멜로물, <팔성보희, 1988>와 같은 요란한 광동식 코미디에서 <지하정, 1986> 같은 진지한 드라마 심지어는 <영웅무언, 1986> 같은 SF 호러 영화까지 손대지 않은 장르가 없을 정도였다.
|
<대장부일기>는 두기봉의 <팔성보희, 1988>, 왕종의 <장단각지연, 1988> 등과 함께 주윤발의 대표적인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주윤발뿐 아니라 당대 홍콩의 초특급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고 있다. <첩혈쌍웅>의 히로인 엽청문과 <천녀유혼>으로 당대 한국 청소년들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아버렸던 왕조현이 주윤발의 어여쁜 두 부인으로 등장하고 있고, <영웅본색>에서 소마(주윤발)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등장했던 이자웅이 친구 말이라면 뭐든 하는 충직한 직장 동료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정측사, 성규안, 오가려 등의 익숙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연출자는 <유성호접검, 1976> <초류향, 1977> 등의 고룡 원작의 미스테리 무협 영화를 통해 전성기를 구가했던 쇼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대표적 연출자 중 하나인 초원(楚原)인데, <대장부일기>는 초원의 만년 작품에 해당하는 영화로 대표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믹한 에피소드가 연이어 이어지는 광동 코미디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비교적 잘 통제한 원숙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에 주윤발이 <황비홍> <소오강호> 등의 주제가로 유명한 황점이 작곡한 흥겨운 테마곡을 직접 노래하는 뮤지컬 시퀀스는 영화의 직접적인 내러티브와는 이질적인 시퀀스지만, 영화의 경쾌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청년기까지의 사진이 보여지며 현재의 곤란한 상황을 설명하는 주윤발의 내레이션이 깔리고 중간 중간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로 <대장부일기>는 철저히 ‘주윤발’ 개인을 부각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상징하듯 종종 자기 패러디 장면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영화 초반부의 내레이션에서 주정발이 왕조현의 얼굴과 엽청문의 몸매를 닮은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실제로 왕조현과 엽청문이 연기하는 여인들이 그의 연인이 되고 주인공 주정발은 영화 속에서 자기 자신인 ‘주윤발’을 욕하기도 한다. 이런 자기 패러디 개그가 가능할 정도로 당대 홍콩 영화의 인기는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
기본적으로 <대장부일기>는 세련된 도시 전문직들이 속사포 같은 대사를 주고받는 고전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의 홍콩식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고민을 거의 떠안지 않고 있다.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이 보장된 이들에게 고민은 다만 1부2처제(一夫二妻制)의 위태로운 결혼 생활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형식적으로 <대장부일기>는 재치 있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할리우드식 코미디보다는 다소 과장된 상황이 빚어내는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거듭하는 광동식 코미디의 전통을 따르는 편이다.(이런 상황 코미디는 <폴리스 스토리> 같은 성룡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중반의 뮤지컬 시퀀스는 영화의 플롯을 거의 절반으로 나누고 있는데, 전반부가 주정발이 성공적으로 이중의 결혼생활을 이끌어 가는 상황들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그런 상황들이 드러나고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그동안 주정발에게 속아 왔던 여인들은 자신의 남편에 대해 장난스럽고 귀여운 복수에 성공한다.
한편으로는 <대장부일기>는 동시에 당시 홍콩인들의 정치적인 상황을 빗대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가령, 속물적인 주인공 주정발이 홍콩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아름다운 두 여인이 중국과 대만을 상징한다고 가정하면, 영화는 한층 재미있고 정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이 영화가 제작되던 당시 홍콩은 중국으로의 반환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것은 늘 홍콩인들에게 잠재적인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이런 상황처럼 주정발은 두 여인 중에 어느 한편을 특별히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그 ‘불안한 동거’를 유지하고 싶어하고, 그런 인식 속에서 위태로운 속고 속이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갈등은 결국 주정발의 이중 생활이 드러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것들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안 여인들은 귀여운 복수에 성공하기는 하지만 주정발에 대한 사랑까지 완전히 거두지 않는다. 여인들의 복수 장면 뒤에도 영화는 조금 더 진행되는데, 특히 뜬금없이 강도들이 여인들을 인질로 잡고 주정발이 우연히 그녀들을 구해내는 후반부 장면은 엉뚱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파멸로 끝난 이 괴이한 삼각관계를 심리적으로는 복원시키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영화의 다른 등장인물인 경찰들의 관계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장면을 해석하자면, 주정발과 두 여인, 즉 삼중국의 괴이한 삼각관계는 갑작스런 강도 사건처럼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회복되기 어렵겠지만, 당대의 홍콩인들로서는 그런 기적이 벌어져 위태로운 삼중국의 동거 생활이 좀 더 유지되기를 기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결국 두 여인을 모두 떠나보낸 주정발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판타지로 마무리된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주정발이 두 여인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황당한 상상이 등장하는 것. 얼핏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과는 거의 아무 상관이 없기에 사족에 가까워 보이는 장면이지만,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당대의 홍콩인들이 중국, 대만 사이에서 어떤 욕망을 꿈꾸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장부일기>는 주윤발이라는 배우의 넓은 스펙트럼을 확인해 볼 만한 영화다. 주윤발의 스타성 밑바닥에는 특유의 ‘서민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물론 주윤발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5:5 가르마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유치한 아이디어를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그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세련됨보다는 속물성이다. 이런 속물성은 주윤발이 전성기에 출연했던 다른 홍콩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것인데, 가령 <가을날의 동화>의 주윤발은 ‘trouble’을 ’차불‘이라는 중국식 발음으로 말하며 일확천금을 꿈꾸던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고 <영웅본색>에서도 주윤발은 우직한 의리 하나로 생을 돌파해 나가는 이웃집 형 같은 사람이었다. 신비스럽고 세련된 킬러로 출연했던 <첩혈쌍웅>이나 매너 좋은 신사로 출연한 <경성지연> 등을 제외한다면, 주윤발은 늘 적당히 속물적이고 넉살 좋은 중국계 서민들의 아이콘이었다. <대장부일기>에서 주윤발이 연기한 주정발 캐릭터 역시 물론 그런 주윤발의 연기 스펙트럼 범위 안에 있음은 물론이다. 또 이 영화는 유독 한국 영화팬들에게 인기 높았던 왕조현의 세련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
<대장부일기>는 지난 2007년 1월경 리마스터링 버전 DVD로 출시된 바 있다. 하지만 국내판 DVD가 정식 판권 계약을 맺어 출시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홍콩판은 스펙상 듀얼 레이어 디스크로 출시되었으나 국내판은 싱글 레이어 디스크로 출시되었으며, 홍콩판 DVD에 수록되어 있는 약간의 서플먼트도 찾아볼 수 없는 것. 이 DVD의 영상 퀄리티는 1988년작임을 감안하면 무난한 편이지만, 뚜렷하지 못한 윤곽선이나 뭉게진 듯한 검은색 표현 등에서 보듯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편이다. 특히 원경에서 인물들의 얼굴이 날아간 듯한 장면들의 표현은 아쉽다.
|
광동어 돌비 디지털 2채캳과 광동어 DTS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역시 오래된 영화임을 감안해야 한다. 장르 자체가 음향 퀄리티가 그리 강조되는 영화는 아니다 보니 강력한 음향 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대했던 뮤지컬 시퀀스의 음향 표현 역시 무난한 수준이다.
|
서플먼트는 전혀 수록되지 않았다. 홍콩판에는 이 영화에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이자웅의 인터뷰와 뮤직 비디오에 수록되어 있는데, 국내판에는 이런 서플먼트들이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역시 이 DVD의 판권이 의심되는 대목으로, 이 영화의 홍콩 판권 소유자인 포츈 스타는 과거 모 출시사에서 정식 출시되었던 HK 컨템퍼러리 콜렉션으로 몇몇 타이틀을 출시한 바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 판매 실적이 별로 좋지 못해 지속적인 출시가 되지 못한 바 있다. 국내 DVD 시장의 쇠락에 대한 아쉬움이 또 한번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