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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에서 『바리데기』까지 - 황석영의 소설과 영상문학

중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소년은 이모들을 따라 읍내에서 하나밖에 없는 극장에 갔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입장도 하지 못했을 관람불가등급의 영화였지요. <삼포 가는 길>, 소년이 본 영화의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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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소년은 이모들을 따라 읍내에서 하나밖에 없는 극장에 갔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입장도 하지 못했을 관람불가등급의 영화였지요. <삼포 가는 길>, 소년이 본 영화의 제목입니다. 소년이 지금껏 영화의 제목을 기억하는 것은 영화의 내용이 자신을 극장에 데려간 이모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후에 안 이름이지만, 영화의 여주인공인 ‘백화’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이모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삼포 가는 길>의 한 장면

소년의 집에는 이모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핏줄이 섞이지도 않은 그녀들을 소년은 이모라 불렀고 소년의 엄마는 그녀들의 언니였습니다. 소년의 집은 70년대 당시 작은 항구 도시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선술집, 정확하게 말해, 시쳇말로 작부집이었습니다. 소년이 살던 그 골목에는 그런 집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수시로 드나드는 뱃사람들과 가끔씩 들어오는 외항선의 선원들이 골목에서 객고를 풀었고 이모들의 몸을 샀지요. 어디에서 온지도 모를 인생들의 술주정과 이모들의 울음 같은 악다구니로 골목은 늘 시끌벅적했습니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 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로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도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삼포 가는 길」 중에서)

황석영의 초기 소설들 - 세상의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내 안의 창

술 취한 손님의 행패에 당하고 우는 이모들은 봤어도, 아무리 어두운 극장 안이라지만, 그렇게 철철 우는 이모들의 모습을 소년은 처음 보았습니다. 소년에게는 꽤나 당혹스럽고 낯선 광경이었지요. 성질 더러운 뱃사람들에게조차 지는 법이 없는 그녀들에게 그토록 순정한 눈물이 있었다니, 소년에게는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그날의 충격이 구체적인 삶의 인상으로 정리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입니다.

소년은 그렇게 황석영(원작자)과 이만희(연출자)를 만났습니다. 김진규(정씨)와 백일섭(영달), 문숙(백화)과도 첫인사를 나눴지요. 이것 또한 소년이 성장하여 알게 되는 사실임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소년은 그 골목에 사는 것이 무척이나 창피했지요. 골목의 친구들은 더없이 좋은 동무들이었음에도 소년은 쉰 막걸리 냄새와 갯비린내가 묘하게 섞인, 지저분한 그 동네가 싫었습니다. 동네 형들이 시키던 양담배며 미제 구루무 뚜룩질(좀도둑질)도 골목에 살기 싫은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운이 좋았던지 소년은 골목에서 흔치 않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고달픈 자취생, 가난한 고학생이었음에도 잠시 동안은 꽤나 우쭐했습니다. 시내버스의 안내양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예사였고 공단으로 출근하는 누나, 형들을 ‘공돌이’ ‘공순이’라 깔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시 황석영과 만나게 됩니다. 80년대를 풍미한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황석영 원작)이란 영화를 통해서 말이지요. <영자의 전성시대>로부터 우리 영화의 한 장르가 되다시피 한 소위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어둠의 자식들>의 한 장면

갈보, 둥기(기둥서방), 포주가 사는 그곳은 성이 돈으로 계산되어 팔리고, 나면서부터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나도록 운명 지워진 가련한 인생들이 그곳으로 찾아듭니다. 그 불쌍한 인생의 고혈을 빨아먹는 철면피(폭력배, 비리경찰 등)들은 그 작은 세상을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철저히 가진 자만을 위해 고안된 시장경제의 강고한 시스템은 가련한 인생들이 죽어가거나 말거나 요지부동,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청년이 된 소년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바로 그 가련한 인생의 한 부류임을 깨닫습니다. 내 누나 역시 스스로 비하하여 부르던 공순이인 것을 절실히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가득 찬 그 모순의 한복판에 던져진 불쌍한 인생임을 절감하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진실은 선배들의 구전과 선구자들의 기록으로밖에 배울 길이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을 수밖에요. 그때에 황석영을 읽었습니다. 「삼포 가는 길」「객지」「돼지꿈」「섬섬옥수」 등을 통해 보는 세상은 그동안 권력이 선전하고 자본가들이 공갈친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6, 70년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 배우지 못한 자들은 이제 고향마저 빼앗긴 채, 막장과 노가다판과 공기구멍조차 없는 밀폐된 좁은 공간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꿈은커녕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대접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습니다. 최소한 일한 만큼의 삯을 제때에 받아 굶지 않고 사는 것, 그 유일하고 소박한 바람조차 세상은 그들에게 용납지 않습니다. 떼어먹고 뜯어먹고 입바른 소리라도 할라치면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비정한 자본과 그 기생의 무리들에 의해 인간은 공사판의 철근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울화가 치밀고 분통 터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작가는 희망을 말합니다. 건강한 긍정성으로 우리의 삶을 견디게 해줍니다. 정씨가 고향 삼포로 가는 것이나 <어둠의 자식들>의 영애가 다시 골목으로 돌아오는 것은 거기밖에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절망과 실패의 현장임에도 작가는 유린당하고 망가진 그들과 함께해야 그나마 꿈꾸고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그들을 그곳으로 보냅니다. 「객지」의 동혁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폭동으로 변해선 안 됩니다.” 동혁이 말했다. “개선을 위한 쟁의를 해야지, 원수 갚는 심정으로 벌이다간 끝이 없어요.” 이러한 동혁의 말투는 오랫동안 노가다판에서 분쟁을 겪어 선택의 감각이 예민해진 고참 인부의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격일 따름이었다. (「객지」 중에서)

그는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결실만을 기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먼 미래까지 바라보는 것이지요. 설사 쟁의가 성공하지 못 하더라도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긴 안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삼포 가는 길」의 영달이나 「섬섬옥수」의 보일러 수리공 상수, 「돼지꿈」의 근호 등 황석영의 냉정한 리얼리즘은 세상의 모순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긍정적 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절박한 조건들을 극복할 힘을 북돋아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실패가 예정된 여로에 불과합니다. 작가가 아무리 건강한 긍정성으로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도록 할지라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귀결되고 마는 제3세계의 천민자본주의의 모순과 왜곡된 구조 하에서 삼포는 결코 이를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를 꾀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성장의 논리는 결국 지배계층의 과비만에 일조할 뿐, 민중계층의 삶은 피폐되고 그들은 성장의 뒤편에서 말라 죽어가고 맙니다. 이제 정씨의 삼포는 없습니다.

영화 <삼포 가는 길>의 한 장면

“삼포라고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 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중략)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 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삼포 가는 길」 중에서)

일감이 생겼다고 안도하는 영달의 말은 공사판이나 떠돌아다니는 자신들의 인생이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자조와 절망의 슬픈 고백일 따름입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영희 아버지가 결국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었던 달동네에서의 삶과 다를 바가 없지요. 아버지가 매달고 올라간 작은 쇠공은 아무리 발버둥친들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서의 숙명적인 추락을 상징합니다. 절대 그들의 탓이 아님에도 그 절망의 무게는 온전히 그들의 몫입니다. 이것이 제국의 발아래 놓인 강토의 운명인 것이지요.

『바리데기』 - 다시 황석영에게서 찾는 내 안의 창

“군인의 명예란 언제나 국가가 추구하는 옳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데 있다고 나는 믿었다…. 나는 갑자기, 국가가 요구하는 바는 언제나 옳은 가치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자신이 이 거리를 본의 아니게 방문하고 보니, 마치 침입한 꼴로 되어 버린 불청객인 듯 여겨졌고, 같은 기분에 들었던 그곳 도시에서의 휴양 첫날이 생각되었다.” (「낙타누깔」 중에서)

황석영의 눈은, 자신의 베트남 참전 경험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와 같은 처지의 피식민지까지 그 시야가 확대됩니다. 귀국을 앞둔 위 소설의 주인공이 독백하는 바는 우리가 제국의 용병으로 남의 나라에 가서 제국전쟁의 하수인 대리인 노릇을 한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작가의 시선은 곧 “아직도 전쟁 중인 나라가, 뭐 남의 나라를 돕겠다구? 세계평화가 어떻구 어째? 야 나발 불지 말라고, 돌아가서 니 나라나 지켜!…. 얻어먹으러 온 주제에 주인을 모독해.”라고 지청구를 듣는 『황색인』의 시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국의 깃발을 영영세세 나부끼기 위해 제 맘대로 전쟁을 일삼는 무리들은 21세기 오늘에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그 땅의 주인들은 염두에도 없는 듯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우린 여전히 그 제국의 하수인 신세를 면치 못해 또다시 전쟁터에 국민의 군대를 보내야 했지요.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의 용병수당과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성장의 밑천을 삼았던 것과 똑같이 제국의 시은에 의한 과실을 얻어먹겠다는 얄팍한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언제까지 제국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이 흘리거나 버린 부스러기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 만합니다. 베트남의 달러가 우리의 재벌을 키웠을지는 몰라도, 인간적 삶의 조건을 성숙시키거나 민초들의 궁핍한 생활을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할 내 동포 내 민족은 북의 주민들이지 미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복 출신들은 우리 군의 통수권을 우리의 것으로 돌려놓겠다는 자주국가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전쟁이라도 난 양 호들갑을 떨며 성토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망령은 사라졌고 냉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체제경쟁으로 섣부른 짓을 벌여야 했던 반도의 어둠은 걷혔습니다. 북한 권력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제 미치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군의 탱크에 효순이, 미순이 같은 우리의 어린 딸들이 죽어가는 세상보다는, 우리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이제 미친 짓, 무모한 짓은 그만 하라고 타이르고 어우르는 세상이 분명 옳은 세상입니다. 휴전선 북쪽의 세상은 누가 뭐라거나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할 우리의 핏줄이요 우리의 살붙이입니다. 제국의 깃발로 금 그어야 할 원수의 땅이 아닌 것이지요.

그 땅에 바리(『바리데기』)가 태어났고 딸이 여섯이나 있는 집의 일곱째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졌습니다. 그 집의 개 칠성이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버려진 채로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자라면서 겪은 그녀의 수난과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평안했을 것이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되는 가뭄과 물난리 등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경제 현실은 전쟁만큼이나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실정범이 될 것을 각오하고 찾아간 황석영의 북한은 초근목피로도 연명하기 힘든 굶주림의 땅이었습니다.

외삼촌의 탈북으로 바리네 가족은 강제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두만강변에서 할머니와 견디어야 했던 움막집에서의 시간이란 짐승의 생존만도 못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발마사지업소에서의 시간, 어쩔 수 없는 내몰림으로 밀항선을 타고 견디어야 했던 배 밑바닥에서의 죽음보다 가혹했던 시간들, 바리는 그래도 그 잔혹한 운명의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죽은 할머니, 칠성이와 교통할 수 있는 바리의 독특한 능력 때문이지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바리는 거부할 수 없이 닥치는 현실의 고난을 저승을 떠도는 넋으로, 혼으로 견디어냅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을 찾아가는 전설 속의 바리공주처럼 그는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의 인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찾아갑니다. 엄밀히 말하면, 찾아가는 것이 아니지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도록 내동댕이쳐진 삶 속에서 바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그것뿐인 것이지요. 가난과 질병, 기아와 전쟁으로 고통받는 유형의 세상에서도, 그래서 바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실화를 차용한 남편의 실종에서도, 샹 언니의 배신으로 자신의 아기가 죽은 다음에도 그녀는 잠시 절망과 혼돈을 겪을지언정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1세기에도 황석영은 여전히 세상의 모순과 제국의 음험한 압제에 대하여, 평화를 빌미삼아 자행되고 있는 모든 비인간적인 폭력과 횡포에 대하여, 부국과 부강을 내세워 인간 살인극에 동참하는 제국의 하수인들을 노려보는 경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영국까지 분단의 우리 현대사가 초래한 생생한 비극의 현장에 그는 늘 서 있지요. 일당 130원의 구로공단 직공(시다)으로 떠돌거나, 출가하겠다고 암자로 숨어들었을 때나, 간첩죄를 마다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나 그는 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형제애를 가진 건강한 청년으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필자가 안타까운 것은 석탄 가루 가득한 막장에서도, 살인 참극이 벌어진 광주에서도 그는 어디에서나 살아 있는 모국어로 글을 썼고 그가 탄생시켜 세상에 보낸 인물들 또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가진 우리와 똑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 아닌 어딘가를 헤매어야 하는, 살아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것이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혁명아 『장길산』이 황석영에게서 혹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소설로 영화로 만난 『오래된 정원』의 연인들처럼 그저 추억으로만 존재해야 할 만큼 세상의 장벽이 견고한 것인지 슬며시 화가 납니다.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 같은 이 세상을 바리가 아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우리 엄마가 묶여 있어. 엄마가 미움에서 풀려나면 너희두 풀릴 거야.” 과연 바리 같은 인간이 몇이나 될까요?

* 필자의 블로그(//blog.86chu.com/epogue21)에서 영상 등 관련 자료를 더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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