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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만화의 로망과 꿈 - 『원피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피터 팬>에서 이채로운 사실 하나는, 후크의 캐릭터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피터 팬>에 따르면 후크는 야비하고 잔인한 악당일 뿐이다. 피터 팬의 순수한 마음을 시기하는 세속적인 악당.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피터 팬>에서 이채로운 사실 하나는, 후크의 캐릭터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피터 팬>에 따르면 후크는 야비하고 잔인한 악당일 뿐이다. 피터 팬의 순수한 마음을 시기하는 세속적인 악당. 실사판 <피터 팬>의 후크도 기본적으로는 악당이다. 이미 성인이 된 후크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피터 팬을 질시한다. 그러나 성인의 세계에서, 온갖 추잡한 일들을 겪은 후크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다사다난한 직장생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인생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후크를 이해할 수 있고 연민까지도 느끼게 된다. 후크를 만난 웬디가, 그의 어른스러움에 매혹되는 이유는 그것이다. 후크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도피하여, 마냥 즐겁고 화사한 것만 찾아다니는 피터 팬과는 달리 후크에게는 연륜이 있다. 물론 그는 잔인하고 비열한 악당이지만, 디즈니 만화 속의 후크처럼 단순한 악당은 아니다. 후크는 성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웬디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웬디를 달래줄 수도 있다. 그건 철없는 피터 팬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유명한 동화 『보물섬』을 각색한, 데자키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보물섬』에서는 외다리 해적 실버가 가장 멋진 인물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보물섬』이 나온 후, 해적 실버는 전형적인 악당에서 영웅적인 캐릭터로 변모했다. 그건 어른들의 꿈을 반영한 것이다. 도시의 일상에 지친 어른들은, 모든 질서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바다 위를 누비는 해적을 동경한다. 실사판 <피터 팬>에서는 웬디의 아버지와 후크를 연기하는 배우가 같다. 나약하게 질서에 순응하는 중년 남자의 마음에도, 해적을 동경하는 원초적인 모험심이 남아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허클베리 핀이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어릴 때에는 누구나 해적을 동경한다고나 할까.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가 해적을 동경했던 것도 어린 시절부터였다. 오다 에이치로가 생각하는 해적이란, 아이들이 놀다가 밥을 먹으러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처럼, 언제나 새로운 즐거움에 매료되고, 그 모험에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그렇듯이.
1997년 <소년 점프>에서 연재를 시작한 『원피스』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만화다. 그 뿐 아니라, 걸작 만화를 뽑을 때에도 항상 상위에 오른다. 소년만화부문에서는 단연 1위. 청년만화까지 합쳐도 3, 4위를 놓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해적이 보물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이고, 기발한 능력을 발휘하는 악당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결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구성의 『원피스』가 그토록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에서는 『원피스』를 ‘소년 만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로망과 꿈을 그대로 보여주는’ 만화라고 평가한다. 작가 자신도 “소년 만화는 모험이다, 여행이다, 동료다, 라는 거다. 우정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그리는 쪽은 좀 부끄럽다고 생각해도, 어린이들은 스트레이트하게 받아들여준다. 그러니까 왕도로부터 벗어나면 안 된다.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을 읽어왔고, 결국 그게 가장 재미있었는데, 왜 최근에는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미 국내에서도 30권이나 출간되고, 애니메이션까지 방영되고 있는 『원피스』는 고잉 메리호의 해적들이 펼치는 모험담이다. 악마의 열매를 먹어 고무인간이 된 루피는, 자신의 영웅이었던 해적 샹크스의 길을 따라 해적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삼도류의 달인 조로, 발차기가 특기인 요리사 상디, 천재적인 항해사 나미 그리고 거짓말쟁이 우솝과 함께 모험의 길에 나선다. 『원피스』가 독자를 사로잡는 첫 번째 이유는 이들 캐릭터의 매력이다. 작가가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말하는 조로(외모가 아니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부터,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거짓말을 했던 우솝까지 모든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역들, 그리고 악당까지도 매력이 흘러 넘친다. 그리고 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도처에서 등장할 수 있도록, 기발한 모험들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루피 일행이 다다르는 곳마다 사건이 생기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판타지물에도 뒤지지 않는 방대하고도 아기자기한 모험담이 펼쳐지면서, 각각의 개성적인 인물들이 루피 일행과 맞닥뜨리고, 결투를 벌인다.
루피 일행과 새로운 적들의 싸움이 독자를 『원피스』속으로 강렬하게 끌어들인다. 캐릭터, 이야기 거기에 각각의 싸움을 묘사하는 솜씨까지 『원피스』는 3박자가 절묘하게 갖추어진, 최강의 소년만화다. 전투 장면에서 『원피스』는 <드래곤 볼>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루피 일행은 모험을 떠나면서 도착하는 섬마다 괴상한 적들을 만난다. 물이 약점인 루피를 바다로 끌어들여 싸우는 인어족와의 결투나 하늘섬에서 만난, 번개를 무기로 쓰는 갓 에넬과의 결투는 압권이었다. 루피만이 아니다. 세 개의 칼을 휘두르는 조로와 현란한 발차기의 상디, 니코 로빈의 트위스트와 나미의 임팩트 다이얼 그리고 전투형으로 변신이 가능한 쵸파까지 『원피스』의 액션 장면은, 영화 이상으로 박진감이 넘친다. 더욱 아기자기한 것은 물론이고.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원피스』는 하나를 말한다. 로망과 꿈.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서, 즐겁게 달려가자. 그것이 바로 ‘로망과 꿈’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단어다. 어른이 된 후크에게는 더 이상 로망과 꿈이 없지만, 그 역시 어렸을 때에는 로망과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적이 된 이유 하나에는 그런 순수한 열망도 있지 않았을까. 『원피스』의 루피와 친구들이 해적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로망과 꿈. 일본 만화에서도 점차 낡은 단어가 되어버리는 듯하던 ‘로망과 꿈’을 다시 살려낸, 그것도 가장 노골적이고 치열하게 보여준 만화, 그것이 바로 『원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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