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지돈 "틀을 깨는 재미"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저는 기본적으로 인터뷰를 좋아해요. 제가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영감을 받는 사람이라서요. 다만 인터뷰를 다 믿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2023.04.27)
정지돈의 소설을 한 번만 읽는 독자가 있을까? 그는 자신이 읽고, 공부하고, 깨달은 것을 소설에 펼쳐 둔다. 보일 듯 말 듯 아득한 간극을 메우는 것은 독자의 몫. 그래서 정지돈의 소설은 여러 번 읽어야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첫 연작 소설집에서 그가 천착한 주제는 '모빌리티'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알던 모빌리티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진 촬영을 노련하게 잘하셔서 놀랐어요. 익숙해진 건가요?
처음에는 불편하고 긴장됐는데 하다 보니 괜찮아지더라고요. 모든 걸 내려놓았더니 편해졌습니다.(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매일 글 쓰는 거 말고는 특별한 근황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다른 일상이라면 임플란트 치료를 받아야 해서 치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최악으로 떨어졌죠.
첫 연작 소설집이 나왔습니다. 표지가 예쁘다는 의견이 많더라고요.
저도 그 얘기 많이 들었어요. 흩어진 타이포그래피가 맨 먼저 눈에 띄었고, 표지 그리드가 살짝 삐뚤어진 것도 마음에 들어요. 디자이너님이 의도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색감의 조합이 러시아 구성주의 느낌을 주더라고요. 이 책에 대한 편집부의 이해도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할 수 있었어요.
제목이 50자를 훌쩍 넘습니다. 이렇게 긴 제목의 단편을 표제작으로 삼은 책이 또 있을까 싶어요. 출판사의 반대는 없었나요?(웃음)
사실 저도 거절당할 줄 알았거든요. 편집부에서 넘어가더라도, 마케팅팀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다 너무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 상업적으로는 포기한 책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농담이고요. 덕분에 책 제목을 짓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어요.
어떤 재미요?
이렇게 긴 제목을 하겠다고 했을 때, 출판사의 반응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우리는 책 제목을 마음대로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시스템의 제약 안에서만 자유로울 뿐이죠. 제목은 필히 독자에게 후킹할 포인트가 있어야 하고, 길이도 적당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으니까요. 대부분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요. 저는 고정된 시스템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서서 새로운 것을 해낼 때 재미있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그 충돌 사이에서 진짜 멋진 게 나오죠. 표지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분들이 많다면, 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모빌리티'를 모티프로 쓴 네 개의 소설과 하나의 에세이가 담겼어요.
미리 계획을 세우고 연작 소설을 쓴 건 아니었어요. 각 소설마다 '나'와 '엠'이라는 인물이 공통적으로 등장하지만 이들은 서로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없죠. 다만 모빌리티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에 대한 소설을 한번 쓰고 나니 모빌리티가 발견되는 소재가 있으면 '그때 마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번에 써볼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쓰인 소설이 모였어요.
모빌리티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평소 '이동하는 감각'에 대해 자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같은 지역에 살아도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차를 타는 사람은 서로 다른 눈으로 도시를 인식하죠. 무엇을 타느냐에 따라 자주 가는 공간, 매일 보는 풍경이 바뀌어요. 예를 들어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새로운 곳을 갈 때 "거기 주차 되나요?"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하잖아요. 이건 무엇을 타느냐에 따라 삶이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거든요. 이렇게 모빌리티가 인간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데, 사회적으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모빌리티 연구가 사회학의 한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학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생각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무엇을 타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니, 흥미롭네요. 작가님의 이동 수단은 주로 '걷기'와 '자전거'인가요?
맞아요. 제 활동 반경이 마포구를 거의 벗어나지 않거든요. 이 동네에서는 차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게 훨씬 더 빠르고 편해요. 저는 걷는 것만큼 자유로운 게 없다고 생각해요. 언제든 멈추거나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차를 타고 나가면 그게 안 되죠. 구획과 방향에 맞춰서만 달릴 수 있으니까요. 이건 속도 때문에 생긴 시스템이에요. 속도가 빠른 이동 수단이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면 사고가 나니까, 그러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합의를 한 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속도를 얻고 자유를 포기한 셈이에요. 사실 이상한 일인데, 너무 당연하게 굴러가는 시스템이니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죠.
작가의 말, 해설 대신 안은별 문화연구자가 쓴 이 책에 관한 감상이 들어갔어요. 작가님과 연구자님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한 인터뷰도 인상깊었고요.
원래 제 소설집에는 해설을 넣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안은별 연구자는 문학 평론가가 아닌 사회학 연구자라서 글을 넣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덧붙여 편집부에서 독자를 좀 더 편하게 소설 속으로 안내할 수 있는 가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셔서 은별씨와 주고받은 대화가 실리게 됐죠. 결과적으로 정말 만족해요. 은별씨의 질문과 답변이 너무 완벽했거든요. 메일로 질문을 써서 보내고 답변을 받았는데, 파일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마치 모빌리티 연구서의 서문을 써주신 것 같더라고요.(웃음) 정말 감사했어요.
독자를 향한 '정지돈식 배려'가 아닐까 싶었어요. 두 분의 대화를 읽고, 소설을 다시 보니 새롭게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다행이에요. 다음에는 '정지돈식' 말고 그냥 독자를 향한 배려가 필요할까요?(웃음)
이번 연작 소설집을 펴내면서 개인적으로 듣고 싶었던 반응이 있다면요?
"너무 재밌다?"(웃음) 사실 작가로서 다양한 반응을 기대하지만, 이번에는 바람이 더 컸어요. 소개하고 싶은 예술가와 작품이 많았거든요. 첫 소설에 나오는 시인 '보니 브렘저'나 두 번째 소설에 나오는 초현실주의 화가 '레오노라 캐링턴', 초현실주의 예술가 '클로드 카엉' 등이 그렇죠. 독자가 이러한 여성 작가들을 찾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두 훌륭한 예술가인데, 이들에게는 이중적인 가려짐이 있어요. 여성이라서 가려진 동시에, 남성주의적인 예술이라고 평가되는 비트문학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해서 한번 더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죠.
보니 브렘저는 어떻게 알게 된 작가인가요? 한국어로 검색을 해봤는데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요.
아마 딱 하나 있을 거예요. 모빌리티에 관한 논문을 모아둔 책에서 보니 브렘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저도 논문에서 발견한 뒤 영어로 자료를 찾아보면서 비트 세대에 이런 여성 작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잭 케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 같은 남성 작가만 알고 있는데요. 보니 브렘저의 작업은 그들의 작업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어요. 그의 정체성과 신체, 주거 공간의 이동이 책에 어떻게 녹아있는지 알면 알수록 흥미롭죠. 그는 제한 속에서 움직이고 작업해야 했거든요. 반면, 백인 남성인 잭 케루악은 제한이 거의 없죠. 그러니까 『길 위에서』라는 작품이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여성 작가가 과연 '길 위에서'를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딜레마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이 소설을 쓰는 방식 또한 모빌리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면서 또 다른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이렇게 뻗어 나간 생각을 소설에 배치하는 방식이요.
은유적인 모빌리티죠. 이 책에 실린 소설 「내부순환」에도 그 생각을 담았고요. 흔히 어떤 자료나 책을 볼 때 '깊이'를 중요시하잖아요. 얇고 넓게 보는 건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여겨지고요. 저는 하나만 깊게 파는 건 그만큼 시야가 좁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깊다는 건 대체 뭐고, 넓다는 건 또 뭘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하나의 작품, 하나의 자료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자료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생각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뻗어나가는지를 파악해야 해요. 그래야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죠.
「내부순환」에 등장하는 작가 '데이비드 올'은 유령 작가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작가님은 이런 제안이 오면 수락하실 건가요?
대필 작가가 되는 걸 수락하기는 어렵겠지만, 글만 쓰고 대중에게는 드러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저는 혼자서 책 읽고 글 쓰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활동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예술가들은 '생산자'에 그치지 않고 '위상 창조자'로서 스스로 예술가상이 되어 대중의 인식을 전환시키거든요.
예를 들어 '반 고흐'는 돈에 상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열정을 쏟다가 장렬하게 사라진 예술가상이죠. 물론 여기에는 한계도 있지만, 자본이 점점 더 중요해지던 시대에 낭만적 가치를 부여한 것만은 분명해요. 이처럼 예술가는 그가 하는 말, 행동, 커리어를 통해 시스템의 결함과 문제를 보여줄 수 있어요. 좋은 예술가는 그걸 생각하면서 작업해야 하고요. 정해진 시스템을 벗어나서 그 체계를 어떻게 흐트러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도 예술의 영역이니까요. 결국, 숨어서 글만 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양가적인 고민 사이에서 늘 왔다갔다 합니다.(웃음)
인터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기본적으로 인터뷰를 좋아해요. 제가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영감을 받는 사람이라서요. 다만 인터뷰를 다 믿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인터뷰도 하나의 문학 장르라고 생각하거든요. 인터뷰어가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이 일어나기도 하죠. 덕분에 내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물론 인터뷰에 실린 모든 말이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의 문학처럼 읽어주신다면 더 재밌을 거예요.
어느덧 등단 10년차입니다. 소설가로 살아보니 어떤가요?
저는 글 쓰면서 사는 게 정말 잘 맞아요. 물론 일이 많아서 힘들 때도 있고, 지금도 매일 투덜대지만(웃음) 관심이 생긴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즐겁고, 제가 공부한 것을 소설로 풀어내서 독자에게 알려드리고 피드백을 받는 것도 흥미로워요.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지돈 소설가.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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