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인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이야기"
에세이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사람을 볼 때 되게 애처롭고 애틋한 걸 먼저 느끼기 때문에, 그 어린 생명들이 자라면서 경험하게 될 어떤 죽음의 풍경 어떤 상실의 경험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너무 크게 다가와서, 그냥 애처롭고 슬프고 아프고 그런 것 같아요. (2023.04.19)
안희연 시인이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흘러나올 법한 기억과 마음이 고여서 책이 되었다. 그 책을 사이에 두고 시인과 마주앉았다. 우리는 애처로움과 상실과 맑음을 말했다. 사랑하는 일과 살아가는 일을 떠올렸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은 시인 안희연의 것이면서 '당신'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다.
책 제목을 정해두고 글을 쓰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제목은 김민정 시인(난다 출판사 대표)이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원고를 한 번 읽으시고 제목이 딱 떠오르셨대요. 첫 꼭지에서부터 제목이 쏟아졌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이라는 제목에서 독자들이 많은 상상을 하게 될 것 같고,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이어서 쓸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될 것 같아서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라고 답변을 드렸어요.
첫 꼭지에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진다"는 문장이 있어요. 처음부터 '당신'과 '밤'에 대해 쓰신 건, 무의식의 반영이었을까요?
맞아요, 그건 확실해요. 첫 꼭지에서 제목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했고, 쓸 때는 그런 줄 몰랐어요. 그런데 편집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내밀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친구한테 들려주는 것 같다, 아주 깊은 밤에 너에게만 마음이 막 쏟아져서 어쩔 수 없이 들키게 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같다, 날이 밝으면 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드는 아주 은밀하고 깊은 이야기다"라고요.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쓰려고 하셨어요?
세 가지 키워드가 있었어요. 먹고, 사고, 사랑하고. 대표님이 책 제안을 주실 때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착안하셨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사는 게 살아가는 삶과 굉장히 밀접한 이야기들이잖아요. 그걸 가지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기획이었어요. 제가 1, 2, 3부의 제목을 가제로 '먹고', '사고', '사랑하고'로 붙이기도 했는데요. 나중에는 '먹고 사고 사랑하고'라는 키워드가 없어도 하나로 꿰어지는 이야기 더미가 생겨났어요. 그래서 책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새롭게 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책읽아웃-황정은의 야심한책>에 출연하셨죠. 그때도 느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시인님은 참 '애쓰며' 사람을 대하시는 것 같아요.
맞는 것 같아요. 가끔은 그게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애쓰지 말자'를 한해 목표로 세울 때도 있는데요. 만난 그 순간에 진심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요. 시간을 들여서 초대해 주시고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에 진짜 너무 감사함을 느껴서, 그 순간만큼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에 있어서도 애쓰는 편인 것 같고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한 편의 글을 쓸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주어진 시간 동안은 에너지를 탕진하듯이 쏟아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서 에너지를 비축해요.
글쓰기는 평생 지속해야 하는 작업이니까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하면 내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힘을 덜 쓰려는 노력을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당연히 있고요. 지금도 그 거리 조절을 잘 못해서 글 쓰고 나면 한 2~3일 동안 되게 힘들 때도 많아요. 특히, 이번 책에 있는 이야기를 쓸 때 그랬어요. 그냥 가볍게 일상을 스케치한다고 생각하고 접근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요. 자꾸만 저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를 생각할 때 제 기억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재료를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특히, (이번 책에서) 할머니 관련된 꼭지를 쓰고 나서 한 달 동안 글을 못 썼어요. 사실 세 달 정도 걸려서 쓴 글이었는데, 한 문장을 쓰면 눈물이 나고 또 한 문장을 쓰면 눈물이 나니까 '이건 정말 내가 존재를 걸고 쓰는 거구나, 어쨌든 시작했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었어요. 어떻게든 완결을 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어요. 미로 같은 길을 걸어서라도 가장 진실하게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글이든 제 삶의 조각들이 담기기 때문에, 글 쓰고 난 뒤에 겪게 되는 여운은 늘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감당해야 되는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쓰는 것 같아요.
힘을 빼고 쓰려 해도 도저히 안 되는 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신에 일상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애쓰기는 해요. 혼자 산책 많이 하고요. 여유가 있을 때는 동네 엄청 잘 돌아다니고, 지하철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까지 걸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오고, 많이 걸으면서 덜어내려고 해요. 그래야 또 앉아서 고요하게 몰두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균형을 맞추려고 나름 애를 많이 쓰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놀라요. 글에서 보는 제 얼굴하고 실제로 만났을 때의 얼굴이 되게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잘 웃고 말수도 많다고 해요. 제 글에서 말도 잘 안 하고 되게 침울할 것 같은 인상을 많이 받으시나 봐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인지부조화를 느끼시는 분들도 있어요.(웃음)
다정한 사람이니까 골짜기도 품고 있는 것 아닐까요? 골짜기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것이고요.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날 때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떤 사람이든 만나면 애처로움을 먼저 느껴요.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있음이 감격스럽고 되게 애처롭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 사람이 혼자 방에서 등 돌리고 앉아 있을 때의 표정 같은 것, 그 '등뼈'를 상상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애처롭고 안쓰러워하고...
「등뼈를 상상하는 버릇」이라는 글이 있죠. '어떤 뒷모습들'을 떠올릴 때 어떤 마음이 되시는지 궁금했어요. 애처로움, 안쓰러움을 느끼시는군요.
책을 내고 나면 낭독회 같은 걸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죽어도 못 읽겠는 두 꼭지가 있는 거예요. 할머니 이야기랑 '등뼈' 이야기는 제가 소리 내서 읽지는 못하겠다는 마음이 되더라고요. 아마 유난히 아끼는 꼭지여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겠지만.
"나의 책장에는 책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존재가 있다"고 하셨어요. 부엉이(올빼미) 장식품이라고요. 그런데 하나 같이 입이 없다면서요?
네, 왜 입이 없는 것만 제 눈에 띄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부엉이들이 나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오해하는 걸 수도 있어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지운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존재는 그 모양 그대로 세상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는 입이 없는 그 존재들이 '백지라는 무기'를 가진 제가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감시하는 존재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엄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더 진실한 이야기를 쓰게 하는 파수꾼 같은, 저한테는 부엉이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아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입이 없는 채로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밤이라는 시간 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응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 눈빛을 저는 모른 척할 수 없고, (부엉이는) 제 안의 가장 진실한 밤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저를 망치러 온 구원자 같은 느낌이에요.
부엉이에 대해 쓰신 글이 「본 못 자국과 못 본 못 자국」인데요. 못 박힌 부엉이가 등장해요. 흉터를 안고 있는 존재임을 언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아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유 없는 죄책감이 자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모든 존재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제가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는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죽음을 딛고 삶의 자리에 왔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 몫이라는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못 자국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못 자국. 내가 본 못 자국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한 마음일 것 같고, 보이지 않는 못 자국까지 발견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걸 잘 보려면 마음의 심층까지 보려고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그런데 저는, 글쓰기를 통해서든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든, 제 삶을 그런 방향으로 추동 해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본 못 자국'에서 '못 본 못 자국'의 세계로 계속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저한테는 부엉이가 그것을 관장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나무뿌리'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김없이 넘어지곤 하는 나무뿌리가 있죠. 시인님의 나무뿌리는 어떤 건가요?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앞에서는 번번이 넘어져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통과 중인 사람들의 얼굴은 제가 귀신같이 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뭐랄까요... 어떤 부재를 경험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저의 나무뿌리인 것 같기는 해요. 모른 척하기가 많이 어렵고요. 그럴 때는 사람들의 신발 같은 걸 되게 유심히 보거든요.
지하철 같은 걸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날이 있어요. 그러면 그냥 발만 보는 거예요. 그 중에도 저의 나무뿌리가 있을 때가 있어요. 사람들의 발이 주는 풍경, 그리고 발을 벗어나서 이제는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 아니면 그들 곁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 이런 게 저의 가장 큰 나무뿌리가 아닐까 생각해요.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죠. 성장 과정에서의 이유도 좀 있을 것 같고요. 요즘에는 어린 아이들을 보는 게 나무뿌리 같기도 해요. 아이들이 산책하는 장면이 그렇게 마음이 아파요, 이상하게.
선생님과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이야기도 쓰셨죠.
너무 사랑스러운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기본적으로 저는 사람을 볼 때 되게 애처롭고 애틋한 걸 먼저 느끼기 때문에, 그 어린 생명들이 자라면서 경험하게 될 어떤 죽음의 풍경 어떤 상실의 경험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너무 크게 다가와서, 그냥 애처롭고 슬프고 아프고 그런 것 같아요.
"얼굴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셨어요.
얼굴은 너무 신기해요. 얼굴이 있다는 것도 너무 신기하고, 내 얼굴을 내가 못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보여지는 방향에 놓여 있다는 것도 너무 신기해요. 얼굴이라는 게 인간에게 왜 존재해야 되는지 납득할 수 없고 너무나 이상하니까 기본적으로는 아주 생경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얼굴을 볼 때마다. 그리고 앞만 닦잖아요. 뒷면이나 안쪽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세계인 것 같아요. 입구는 분명하게 있는데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어떤 방 같은 느낌, 열리지 않는 문처럼 느껴져요. '못 본 못 자국'의 세계를 보고 싶은데 거기에 손이 닿지 않으니까, 괜히 '여기에 악취 나는 썩은 물이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너무 이상한 것 같아요, 얼굴이라는 게.
그런 속성 때문에 가식적일 수도 있는 거겠죠.
그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감춰지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 같아요. 눈은 진짜 거짓말을 못하잖아요. 다 감출 수 있는데 눈은 거짓말 못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케이크 상자 위에 있는 투명한 부분이 저한테는 눈처럼 여겨져요.
시인님의 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어떤 인상을 받으면 좋으시겠어요?
얘 너무 투명하다.(웃음) 송사리가 살 것 같은 1급수다.(웃음) 저는 맑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줄 때 극찬을 받은 것처럼 기쁜 마음이 되는 것 같아요. 글도 그래요. 너무 투명해서 핏줄이 다 들여다보이는 피부 있잖아요, 제 글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맑음에 대한 갈망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맑은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안에 가라앉은 게 많아야 맑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이게 수련이에요. 진흙을 가라앉혀야 눈이 맑아지니까.
생채기라든지 티끌이라든지, 그런 게 없어야 맑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전혀요, 전혀. 나뭇가지도 많이 가라앉아 있고 돌덩이도 가라앉아 있고, 그래야 윗물이 맑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견디기도 해야겠네요.
그럼요. 몰라서 맑은 게 아니라 알아서 맑은 거 있잖아요.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셨어요.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러니 이제 가세요, 당신의 기억으로." 이야기의 바통을 '당신'에게 넘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이 꼭 직접적인 효용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그 시간을 즐겁게 재미있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이 책만큼은 그 시간을 보낸 뒤에 연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들이 자신이 가야 될 방향이나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연결이요. 각자의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은 제가 갈 수 없는 곳이거든요.
이 책은 금방 읽혔으면 좋겠고, 독자 분들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세계 안으로 들어가셨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테이블을 놓으시고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지, 나한테 가장 내밀하게 또는 의미 있게 남아 있는 사물이나 경험은 무엇인지, 그걸 찾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강했어요. 진짜 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고, 도움닫기 판 같은 것이고요. 독자 분들이 각자의 뜀틀을 넘어서 각자의 기억의 세계로 점프해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장소 제공: 카페꼼마&얀 쿠브레 여의도점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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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는 코를 박고 엎드리는 일이 먼저다. 만나려고. 찾으려고.” 시인 안희연이 먹고, 사고, 사랑하며, 기도하듯 써내려간 이야기! 안희연 시인의 새 산문집을 난다에서 선보입니다. ‘먹고 사고 사랑하고’, 그런 기획으로 시작된 글임에 3부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그런데 열어보면 곧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