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심리학자 김영아 교수 “나를 잘 대접하세요”
『나와 잘 지내는 연습』
정서적 단절인 채 나를 가두고 방치하는 건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에요. 방치일 뿐이죠. 가두고, 방치하는 게 나를 학대하는 첫 걸음이에요. 학대하지 않고 나와 잘 지내기 위한 첫 걸음은 나를 대접하는 거예요. 혼자 있어도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따뜻한 것 마시게 하고, 나에게 좋은 말 해줄 곳을 찾아가는 거예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 놀랍도록 소중할 때가 있다. 행복하자, 라든가 그래도 괜찮다, 당신은 소중하다, 같은 말.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흔해서 큰 감흥 주지 못할지언정 이것은 아주 필요한 말이라고. “나와 잘 지내지 못해 갖게 된 건강하지 못한 성격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어떻게 할 건가 하는 문제”라는 김영아 교수의 말을 듣자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절망이 희망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되는 사회, 이곳에서 모든 개인이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은 삶을 살아내는 주요하고도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아 교수는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코 연골이 녹았고 평생을 안면기형으로 살다 마흔이 넘어 코 재건 수술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 기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8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으며, 자신의 억척스러움으로 스트레스 받은 딸은 불과 7살 때 머리가 빠졌다. 흔들리고, 외로운, 혹독한 삶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직까지 아프면 말 못할”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의 이런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라면서 말이다. 거기서 자신과 화해한 건강한 개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김영아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다 아픈 사람”일 터. 그러니 우리 모두는 이 아픔을 덜기 위해, 아니 이 아픔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간곡히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 부디,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따뜻한 것 마시게 하고, 나에게 좋은 말 해줄 곳을 찾아가”자. 누구보다 나를 잘, 잘 대접하자.
나를 잘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가 만난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고요. 이를 테면 좌절한 사회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치유심리학자로서 어떤 위기감이 있었던 걸까요?
저는 젊은이들이 갖는 심리에서 공포까지 느낄 정도예요. 그냥 ‘고민이다’가 아니라 내 삶이 벼랑 끝에 있다는 그 공포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요, 놓아버려요. 그 놓아버리는 것이 느껴질 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희 때도 그랬죠. 우리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때의 고통보다 지금이 더한 거죠. 사회 저변이 우리는 그래도 성장기였잖아요. 지금은 둔화기, 침체기라 볼 수 있는데요. 이 사회 구조 내에서 갖게 되는 문제니까 더 힘들지 않을까 해요. 지금, 내가 어떻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느낄 때 이들이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나를 잘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과거 개인이 ‘희망’이라는 걸 가질 수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지금은 그것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에요.
개인이 희망을 갖기엔 상황이 너무 요원해요. 더 나아가서 보면요. 우리 때는 그래도 남이 어떻다는 생각을 덜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타인을 훨씬 더 의식하죠.
제목에서 적듯 ‘나와 잘 지내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고요.
제목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전에 썼던 책들 『아픈 영혼, 책을 만나다』, 『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 『내 남자의 그 여자』 등이 모두 아픈 사람, 십대 등으로 돌아왔는데요. 결국은 개인이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첫 단어를 ‘나’로 했고요. 바로 그 ‘나’와 잘 지내야 한다는 거죠. 나와 잘 지내지 못해 갖게 된 건강하지 못한 성격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어떻게 할 건가 하는 문제예요. 이걸 바꾸려면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연습을 해야 하는 거죠. 이래서 제목을 그렇게 잡았어요. 안 된다고만 할 게 아니라 연습이라도 해서 내 안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예요.
전에 비해 타인을 더 의식하게 됐다고 지적한 부분도 좀 더 설명해주세요.
상상 속의 군중에게 놀아나고, 나를 더 괴롭히죠. 일단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편안해져야 해요. 그래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건데요. 편안하게 바라보는 시각 위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되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왜곡되죠. 왜곡된 시각은 왜곡된 해석을 낳거든요. 결국 시작부터 잘 풀어보자는 거였어요.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깨달았다고 적었어요. 그것이 핵심일 텐데요. 그 화해가 잘 안 되는 개인들이 너무나 많죠. 타인과 비교함에 따라 행복의 폭도 굉장히 좁아지고요.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의 기준이나 틀을 작게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가 앉아있는 느낌이 들어요. 흔히 생각하는 행복은 내 아이가 성적을 잘 받아오는 것, 집 평수를 늘려가는 것이잖아요. 보편적으로 얘기하는 이런 기준을 누가 만드는가에 대해 생각이 많았어요. 저도 그런 기준을 갖고 있었고요. 끝내 그게 아니었다는 걸 느끼게 된 일도 있었죠. 결국 이것이 뭘 위해 하려고 했던 건가 봤더니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 때문이었어요. 어린 딸이 머리가 빠지면서까지 아프면 그건 행복이 아니잖아요. 많이 고민했고, 딸과 깊은 대화를 나눴죠. 지금은 딸에게 ‘엄마가 내 엄마여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어요. 제가 행복의 기준을 다시 세운 건 고통 가운데에서 온 거예요. 딸의 아픔 가운데서 왔어요.
고통에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에 공감해요. 그렇지만 모두가 고통의 순간에 변화하진 못하잖아요. 그게 비극인 것 같아요.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가치가 세 가지라고 말해요. 첫 번째는 내 안에서 스스로 퍼 올리는 가치가 있어요. 자발적 가치죠. 두 번째, 멘토를 만나거나 관찰을 통해서 알게 되는 가치를 경험적 가치라고 하고요. 빅터 프랭클은 그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초월적 가치라고 했어요. 누구나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 있죠. 거의 대부분은 경험적 가치에서 와요. 저도 경험적 가치를 통해서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수많은 고난에서 왔어요.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코 연골이 녹아버렸고, 초등학교 때는 기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어요. 그런 경험이 남들보다 더 혹독했다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이 상당히 많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자발적으로 깨달음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요. 힘들 때마다 건강하게 해석해내는 힘이 생겼던 것 같아요.
만약 빅터 프랭클이 초월적 가치를 몰랐다면 아우슈비츠에서 몸 사리고 자기 혼자 살아남았겠죠. 그가 그 안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영향력을 타인에게 끼쳐 그들에게 어떤 힘이 된다는 걸 생각하고 힘을 내잖아요. 그 초월적 가치가 제게도 있었던 거죠. 이렇게 상담을 하고, 누군가 내민 손을 잡아줬을 때 그들이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하는 반응들을 보게 되는데요. 저는 그때 비로소 이 삶을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그게 제게 있는 초월적 가치죠.
아직까지 아프면 말 못했을 것
마흔 넘어 코 재건 수술을 받고, 기차에 떨어져 8시간 넘는 대수술을 하고, 참 혹독한 삶이었어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 많이 했어요. 어쩌면 치부일 수 있는 얘기를 강의 때도 하잖아요. 그러면 어려운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요. 하지만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죠. 그 때문에 아직까지 아프면 말 못할 거라고 답해요. 예전엔 참 아팠지만 이제 그것을 어느 정도 견뎌내 하나의 자원으로 남은 것 같아요. 이 자원을 강의에서 말하면 사람들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잖아요. 그게 지금은 감사할 뿐이죠. 그들에게 내가 하나의 경험적 가치로 남고 싶은 거예요.
내면의 힘이 계속 강해지는 인생 과정이었던 거군요.
‘발달’이란 단어가 있어요. 한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나와 첫 울음을 울 때, 그의 인생을 피웠다고 해서 필 발(發)을 쓰고요. 생이 결국 죽음으로 가는데, 동양에서는 죽음에 ‘이른다’고 하잖아요. 바로 그 도달할 달(達)을 쓰는 거예요. 동양학에서 보는 발달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과업을 이룬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태어나서 우는 것도 발달, 잡고 일어나는 것도 과업, 결국 죽음도 과업이에요. 내가 죽음까지 잘 도달하는 것으로 발달을 이해할 수 있죠. 발달은 절대 멈추지 않아요. 역행하지 않고요. 그 순간순간 과업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발달은 ‘되어가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대학 졸업하면 발달이 멈추는 줄 알잖아요.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은 평생발달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발달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건 본인의 어린 시절 발달에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이 스물이 넘어서야 공백이 누군가를 만나 채워질 수 있다는 걸 느껴요. 때문에 중년의 발달을 중시하죠. 우리나라가 그게 많이 없어요. 그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지 못해요. 우리는 지금도 내면의 성장을 시켜가는 게 맞는 거고, 그렇게 가는 과정은 내가 만나는 여러 사건을 해석해내는 힘과 함께여야 해요. 결국은 역사예요. 오래, 길게, 차곡차곡 쌓이는 힘이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해치는 것은 삶이란 다름 아닌 ‘되어가는 것’, 과정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발’에서 ‘달’까지의 과정 안에 있어요. 과정의 점들이 모여 결국은 나를 이루는 것이죠. 과정의 연속성을 대개는 모르고 지금, 이 ‘점’이 내 인생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거죠. 이 점들이 이어져 어디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면 계속 갈 수 있어요. 그걸 느끼면 살아볼 만하거든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간절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과정임을 깨닫고 넓은 시각을 갖는 게 참 쉽지가 않아요.
점만 보는 오류는 그렇다면 어디서 생기는 걸까요?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주양육자를 섭취해요. 그런데 내가 섭취하는 대상, 관찰하는 대상에게서 미성숙하고 부정적인 것까지 섭취해요. 좋은 것만 쏙쏙 섭취하면 좋은데 그들도 외면하고 싶은 것들까지 섭취하거든요. 자신도 모르게 말이죠. 나는 그런 것들의 집합체예요. 그 사실을 봐야 해요. 이런 면은 긍정적이다, 이 점은 건강하지만 이런 점은 건강하지 않다, 라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거든요. 나를 알아야 나와 잘 지낼 수 있어요. 나와 상관없이 섭취된 콘텐츠를 쫙 펼쳐놓고 알아야 해요. 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몰라요. 점을 보게 되는 건 내 안에 잘나고, 괜찮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나를 누르고 다른 것만 보는 데서 비롯돼요. 부정적인 면만 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자꾸 타나토스 에너지가 나라고 생각하니까 점만 보게 되는 거예요.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을 하려면 내 안의 감각부터 깨우고, 나를 세밀하게 쪼개서 분석하고 통합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 작업을 못하죠. 얼마 전 27살 내담자에게 이렇게 물었더니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가장 안타깝죠.
책에 소개된 사례가 흥미로운 점은 한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했던 엄청난 문제가 저자의 어떤 질문 하나로 전환을 맞게 되는 모습이었어요. 자기를 분석해서 문제 하나를 발견해내면 놀랍게도 자신과 화해가 되더라고요.
제가 던지는 질문 하나가 나오기까지는 그 앞에 시간들이 필요해요. 자기에 대한 고민, 분석의 시간 중에 어느 날 질문을 던지는 거죠. 그럴 때쯤 내가 도망가지 않고 받아들일 자세가 될 때가 있어요. 이걸 직면의 시간이라고 해요. 그걸 잡는 게 제 역할이죠. 정말 재미있는 건 대여섯 달 지나서 직면을 할 때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교수님, 이거 첫 주에 한 얘기 아니에요?’라고 해요. 그때는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을 왜 해야 하느냐면 내가 그걸 막기 때문이에요. 틀을 만들고 들어가 앉아서 문도 안 열어주고, 남도 못 들어오게 한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이런 사연들은 너무 힘든 이야기들인데요. 상담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힘들지 않나요?
상담자가 되기 위해 우리도 훈련을 하잖아요. 웬만한 건 받아요. 그런데 주제가 특수하다든지 감당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있죠. 군 상담을 갔을 땐 더 했고요, 교도소 상담을 했을 때는 정말 아팠죠. 그때는 상담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에 운전해서 온 적이 없었어요. 오다가 너무 눈물이 나서 차를 세우고 꺽꺽 울었던 적도 많아요. 그러면 지치고 힘들다고 하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혼자 정화하는 법을 많이 알고 있어요. 예를 들면 혼자 드럼을 두드리거나, 혼자 걷고, 혼자 찜질방 동굴 같은 데 들어가서 생각하고요. 혼자 노래방도 가고요, 혼자 펍에도 가요.(웃음)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애써 마련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말씀은 힌트가 될 수 있겠네요.
요즘은 나를 들여다보는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외할머니 집에 다락이 있었어요. 곶감도 있고, 거의 모든 게 있는 보물창고였어요. 몰래 다락에 들어갔다가 밖에서 소리가 들려서 혼날까봐 못 나가고 그 안에 있게 됐어요. 거기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그때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런 공간, 골방 같은 공간에 혼자 있는 게 얼마나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자발적 갇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천주교의 피정처럼요. 혼자만의 여행도 그렇죠. 산티아고의 길을 높게 평가하는 건 혼자 험난한 길을 걸으며 나와의 대화를 하기 때문인 거잖아요. 그게 참 중요하죠.
자기만의 방이 모두에게 필요한 거죠.
그렇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해요. 어머니들과 강의할 때도 항상 얘기해요. 부엌 옆에 조그마한 책상이라고 내 공간을 만들라고 말이에요. 남편을 위한 공간도 물론이고요.
사소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장치들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질 수 있을 거예요.
저희 집에 다락이 있는데요. 그 공간이 너무 좋아서 그 집에 살게 됐어요.
제발 혼자 갇히지 말기를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향이나 질이 달라진다고 했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도 유정이도 너무 막 살아요. 삶의 의미가 없어요. 그 삶이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죠. 내가 성폭행을 당했지만 내 감정은 무시되고, 집안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한 내 삶은 없어지고 유린되는 거잖아요. 윤수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 둘이 진짜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내 삶이 내 안으로 들어와요. 그러면서 진짜 내 삶이 되니까 살아보고 싶은 거예요. 내 삶에서 원하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절박해지고, 삶의 자세를 바꿀 수 있는 거거든요. 이거예요.
영화 <굿 윌 헌팅>도 보면 윌이 자기 자신과 잘 지내지 못하다가 교수를 만나 자기와 잘 지내는 법을 아는 순간 여자친구를 찾아 차를 끌고 떠나잖아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순간 가게 돼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못하는 거죠.
교사 연수 강의에는 꼭 참여한다고 한 부분에서 저자의 교육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에릭슨에게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라는 스승이 있었듯, 제게도 그런 스승이 있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무척 가난했어요. 방 한 칸에 화장실도 없어 공중화장실을 가야 하는 그런 집이었어요. 5학년이 됐는데 친구들이 하나씩 없어져요. 파주에 살았거든요. 선생님께 물었어요. 서울로 간대요. 대학을 가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저도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나도 대학가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그 선생님 하는 말이, ‘우리 영아가 가야지 누가 가겠니’였어요. ‘우리 영아가 대학가면 참 잘할 텐데’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그게 정말 힘이었어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땐 이 얘기를 해요.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그런 스승이 되시면 좋겠다고요.
흔히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고 하듯, 모두에게 좋은 스승이 있어 최소한 경험적 가치를 삶에서 찾을 수만 있게 돼도 좋겠어요.
제발 혼자 갇히지 말라는 말 많이 해요. 보웬(Murray Bowen)이라는 학자가 정서적 단절이란 말을 했어요. 이 말이 지금 이 세대에 딱 맞아요. 부모에게 아무리 기대를 해도 아무것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이 단절을 해버리는 거거든요. 그렇게 된 개인이 다 감옥 같은 방에 들어가서 안 나와요. 이들에게 부모가 주지 못한 것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내담자들에게도 여기 와준 것이 고맙다고 늘 얘기해요. 저를 찾아온 거잖아요. 상담을 오는 것도 감사하죠.
나와 잘 지내는 첫 걸음은 나를 대접해야 한다는 거예요. 정서적 단절인 채 나를 가두고 방치하는 건 나를 대접하는 게 아니에요. 방치일 뿐이죠. 가두고, 방치하는 게 나를 학대하는 첫 걸음이에요. 학대하지 않고 나와 잘 지내기 위한 첫 걸음은 나를 대접하는 거예요. 혼자 있어도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따뜻한 것 마시게 하고, 나에게 좋은 말 해줄 곳을 찾아가는 거예요.
나를 대접하고, 나와 잘 지내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잖아요.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어요. 이에 관한 질문도 당연히 있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말하고 싶은가요?
사회 구조는 개인이 어쩔 수 없죠. 그걸 건드리지 못해 좌절하지 말라고, 구조는 두더라도 그 앞에서 내가 어떤 자세를 가질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그것에 방점을 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나서 그걸 찾기 시작하면 되는 것도 있어요. 그 부분이 저는 안타깝죠. 사회 구조적 문제라고만 할 것 또 아니니까요. 조심스럽긴 해요. 수저론 얘기 나오고 할 때마다 조심스럽긴 한데요. 그래도 그 문제를 안고 자신을 단정지어버리고 말면 어떻게 해요. 누군가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 경험과, 제 고난 속에서 온 해석과 쌓아가고 있는 것들을 나눠주면 그게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통해서 힘을 내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엔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고,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도 큰 의미가 있으니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책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에게 꼭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잘 모르겠어요.(웃음) 오래 전에 한 강의에서 ‘내 아픔이 네 아픔보다 크다는 말은 하지 마라, 크기 비교를 어찌 할 수 있겠냐, 그러나 나도 아팠다고 말할 수는 있을 거다’라고 하면서 제 과거를 털어놓고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더라는 얘기를 했어요. 우리는 다 아픈 사람일 뿐이라고요. 강의를 들은 한 친구가 한 얘기에 제 생각이 확 깨졌어요. ‘교수님은 아픔이 되게 많았는데요, 하나님이 교수님을 속성재배 하셨나봐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그동안 고난을 해석했던 것들이 감사함으로 바뀌었어요. 고난이 제 자원이 됨을 알았던 거잖아요. 그 뒤부터는 어떤 것이 와도 자세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이 책도 그렇죠. 제 고난이 없었다면 허울뿐인 책이었을지도 몰라요.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독자가 꼭 가지고 갔으면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의 첫 걸음은 나를 대접하는 건데요. 나를 대접한다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것만 알면 돼요. 내 삶의 주인이 다른 누구는 아니에요. 딸의 삶도 딸이죠. 그렇기 때문에 딸과 내가 동행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만 명심하면 좋겠어요.
홀로 남겨져 바위를 들어올리고, 운석과 싸우는 일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무치게 외로운 일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삶을 산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티는 순간,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내는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길고긴 인생이란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그간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완주한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제발 살아 주길 바란다.(96쪽)
나와 잘 지내는 연습김영아 저 | 라이스메이커
태어난 후 1개월 만에 가지게 된 안면기형이나, 열두 살에 겪은 끔찍한 기차사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삶의 부침 속에서도 김영아 교수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마치 실천이라도 하듯, 스스로 살기를 택했고 결국 삶의 유의미를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얻은 소소하지만 숭고한 삶의 의미들을 책을 통해 전한다. 또한 지금 청춘들이 보이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과 타인을 혐오하는 행동의 심리학적 원인을 알아보고, 쓰러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을 전한다. 더불어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내면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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