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드로잉으로 기록한 도시 이야기 『기억이 머무는 풍경』 정연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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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스케치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얼마나 비슷하게 재현하는가 보다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주는 감동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연석 작가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가 성장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부산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90년대 후반 IMF의 삭풍을 뚫고 어렵게 취직해 서울생활 15년차 건축가로 살고 있다. 살고 있는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스스로 도시유목민을 자처하며, 도시 곳곳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것이 취미인 자발적 뚜벅이다. 도시의 공간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는 작업이란 점에서 건축과 그림의 일맥상통을 믿고 있으며, 10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한 작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최근 『기억이 머무는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 170여 점의 드로잉을 통해 도시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런 식으로는 평생 타인의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일에 모든 것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세상일지라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타인의 도시가 아닌 나의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228쪽)

 

누구에게나 삶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도시지만 우리는 이 도시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꼭 유명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도시는 모든 사람 혹은 개인과 연결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찬찬히 걷고 들여다보고 사진도 찍고 그림으로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타인의 도시가 나의 도시가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연석02.jpg

 

책을 내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책에 나오는 장소를 선정하는 데 특별한 기준이 있었나요?

 

도시의 풍경을 담은 그림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오던 차에 제 블로그의 그림과 글들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신 재승출판 편집자님께서 먼저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기획서와 샘플 원고를 준비하면서 특별히 책에 실릴 장소들에 대한 기준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항상 봐오던 주변 도시의 풍경들이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몇몇 장소들을 따로 취재하면서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책에 실린 장소들은 특별히 유명하다거나 잘 알려진 관광지라 실린 것이 아닙니다. 제 생활의 배경이 되었던 곳들, 기억에 남았던 장소들이 대부분입니다.

 

책 제목처럼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시란 기억을 담는 매개체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가 있는지요?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장소가 있겠지만, 저한테는 종로의 골목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서도 종로와 주변의 장소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당시 회사가 있던 강남보다 오히려 종로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궁과 박물관, 미술관이 많이 몰려 있기도 하고 오래된 동네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거의 종로에서 이루어졌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그저 이곳저곳을 걸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걷기를 좋아하다 보니 걷기에 좋은 장소가 저한테는 기억에 남네요.

 

지면의 한계로 목차에서 빠졌지만 아쉬운 장소가 있다면 어디였나요?


홍대 옛날 기찻길 자리에 있는 오래된 선형의 건물들을 책에 넣고 싶었습니다. 시간적인 제약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빠지긴 했지만, 처음 당인리로 가는 철길 옆에 있던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쳐지고 바뀌는 과정이 건물에 그대로 드러나는 장소라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쌓이면서 변하는 건물들,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이 닿은 흔적이 많이 남은 건축들에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스레 책에도 넣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림을 그리기 위한 피사체로서의 건축적 형태도 개인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부산의 산복도로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그리고 싶었습니다. 산과 바다의 도시 부산의 시간과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풍경이거든요. 언젠가 이번 책의 연장선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면 꼭 넣고 싶은 장면들입니다.

 

건축가 중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건축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그림 그리는 실력이 중요한가요?


건축의 과정에서 스케치나 모형 같은 것들을 작업하게 됩니다. 특히 스케치는 머릿속의 개념이나 형태를 짧은 시간에 구체화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과정에서 사용합니다. 요즘은 컴퓨터그래픽을 능숙하게 다루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예전처럼 스케치 능력이 크게 요구되진 않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스케치 능력이 있다면 여러 가지로 유리한 부분이 있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건축 작업을 할 때 스케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림이 바로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건축에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가깝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좋은 건축가가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책 속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그림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림이 늘 잘 그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더 애정이 가는 그림이 있기는 합니다. 이번 책에 실린 그림 중에는 부산타워에서 바라보는 부산남항의 전망대 풍경이 좀 더 애착이 가는 편입니다. 가장 잘 그려서라기보다는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감천마을과 철암의 골목풍경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들입니다.

 

부산 남항.jpg

 

최근 어반 스케치가 유행하면서 거리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볼 기회가 많아졌는데 굉장히 여유로워 보이더군요. 실제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릴 때 마음가짐이 다른가요?


아무래도 현장에서 그릴 때와 작업실에서 그릴 때는 여건이 다르다 보니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가짐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현장 스케치를 할 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걸으면서 이곳저곳을 보는 것을 선호해서 짧은 시간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특징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편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그릴 수 있는 수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시간 안에 끝내려고 합니다. 현장 스케치의 경우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것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합니다. 현장 스케치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을 얼마나 비슷하게 재현하는가 보다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주는 감동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장소나 건축물을 바라볼 때 건축가 혹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관점의 차이가 있는지요?


기본적으로 건축이든 그림이든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람과의 관계, 시간의 흔적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건축가로서의 시선이 좀 더 공간이나 형태적인 부분에서 전문적인 것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있겠죠. 중요한 것은 건축이든 그림이든 장소를 그냥 스치듯 지나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좀 더 오래 꼼꼼히 뜯어보는 게 습관처럼 되기는 했습니다. 결국엔 대상에 대한 애정을 밑바탕에 깐다는 것은 건축가 혹은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공통으로 가지는 관점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가요? 건축가로서의 일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의 일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이유는 제가 그것을 간절히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건축가로서의 일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쭉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림은 건축을 공부하기 전부터 좋아하던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상당히 오랫동안 해오기도 했고, 그림 작업은 앞으로도 건축과는 별개로 계속할 생각입니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작업에 그림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건축과 그림은 저에게는 각각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결국 세상을 관찰하고 나름의 관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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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머무는 풍경정연석 저 | 재승출판
도시의 풍경은 대개 건축에서부터 시작한다. 먹고 쉬고 일하고 떠나고 잠자는 일상은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건축은 공간을 규정해주는 장치로도 있어왔지만 오랫동안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우리 곁에 있었다. 이 책은 저자의 삶의 배경이 되었던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 혹은 마을의 풍경 속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시간의 흐름을 드로잉으로 기록한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스쳐 지났던 장소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한때 우리 삶의 배경이었던 도시들을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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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머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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