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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결국은 사랑의 문제 아니에요?”

『해질 무렵』 펴내 젊은 세대의 현실은 지난 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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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젊은이들이 겪는 지옥 같은 현실은 우리가 다 만들어 놓은 거란 말이에요. 『해질 무렵』의 화자가 박민우와 정우희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60대 초반의 윗세대이고 또 한 사람은 현재의 2030세대잖아요. 그 세대의 과거와 현재가 같이 있는 거죠. 그러면서 지금의 울적하고 씁쓸한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행복해?’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별 거 아니잖아, 행복하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지금 시대 젊은이들을 위한 소설


『해질 무렵』과 만난 후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은 이전과는 다르다.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빌딩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멀지 않은 과거에 이곳에는 낮고 오래된 집들이 있었겠지,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조금만 고개를 틀면 볼 수 있는 곳,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로 비켜 앉았을까. 『해질 무렵』 속에서 주인공 박민우가 품었을 법한 질문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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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이 『여울물 소리』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작품 『해질 무렵』은 60대에 접어든 건축가 박민우의 기억을 따라간다. 그는 산동네 ‘달골’에서 성장했지만 “어떻게든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일류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성공의 길목에 들어선다.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동급생들의 빈자리는 늘어갔지만 “눈가리개를 한 노새처럼” 한눈 팔지 않은 덕분에 시대의 질곡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때마침 시작된 도시재개발은 그에게 순풍으로 작용했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소위 말해서 중산층에 올라선 사람들이 다 비슷한 세월을 겪었단 말이에요. 자기는 성공했다고, 가난으로부터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죠. 박민우만 그런 게 아니고요. 이른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게 있지만, 개발독재 시절에 다들 눈 감았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이득을 얻는 게 조금 생기니까 그런 거에 간섭하고 끼어드는 것이 굉장히 철없는 짓이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내 삶을 선택해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박민우로 하여금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달골’에 남겨졌던 첫사랑 차순아다. 갑작스럽게 박민우의 삶에 등장한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고백한다. “어쩐지 지난 세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오랜 친구에게 옛이야기 하듯 들려주고 싶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박민우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차순아의 목소리를 따라 과거로 회귀하는 박민우는 자신의 손으로 세상의 모든 고향들을 밀어버렸음을 직시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오랫동안 산동네의 초라하고 구질구질한 삶에서 운좋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시대를 통과한 모두가 자신은 낙오하지 않고 이제는 잘살게 되었다고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박민우의 과거에 기대어 완성된 이곳은 정우희에게 있어 오늘의 현실이다. 스물아홉 살의 연극연출가인 그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약 없는 희망을 붙든 채 살아간다. 박민우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물들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지만, 그녀의 보금자리는 장마철이 되면 곰팡이가 까맣게 벽을 채워가고 여차하면 빗물에 잠기고 마는 반지하방이다. “수도권 변두리의 숙소를 돌아다니면서” “밀림 속의 맹수들 틈에서 잔뜩 움츠린 채 눈치만 발달한 작은 포유류” 같은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시간은 박민우의 그것과 교차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박민우와 같은 세대가 이뤄놓은 근대화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그대로 있으니까, 그것이 박민우에게는 회한으로 남아있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현재의 현실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현재의 젊은이들이 겪는 지옥 같은 현실은 우리가 다 만들어 놓은 거란 말이에요. 『해질 무렵』의 화자가 박민우와 정우희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60대 초반의 윗세대이고 또 한 사람은 현재의 2030 세대잖아요. 그 세대의 과거와 현재가 같이 있는 거죠. 그러면서 지금의 울적하고 씁쓸한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행복해?’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까 별 거 아니잖아, 행복하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박민우와 정우희, 좀처럼 접점이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을 잇는 인물은 김민우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우희와 인연을 맺은 그는 청년세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으로 재계약만을 바라보며 근무하다, 그마저도 해고되어 여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삶을 버텨낸다. 정우희와는 “둘 다 연애질이나 하고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오고 있다. 김민우와 정우희, 박민우와 차순아, 네 사람의 성긴 인연은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난다.

 

『해질 무렵』은 젊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이건 현재의 젊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에요. 소설을 읽고 변화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파편화된 채로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순응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변화해야 되잖아요. 과거를 미화해서는 절대로 변화하거나 나아지지 않거든요. 비판적인 시선으로 봐서 바꿔야죠. 이 소설은 변화의 출발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냐는 거죠. 변화해야죠.”

 

근대화와 도시개발의 과거, 그 끝에 남겨진 현실을 비추며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었던 작가는 『해질 무렵』에 감춰진 또 다른 이야기로 ‘사랑’을 말했다.

 

“누군가 『해질 무렵』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장이 두 개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하나는 김민우의 엄마가 우희한테 ‘우리 민우 좀 사랑해주지 그랬어’ 하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라는 문장이었대요. 그 두 문장이 윗세대와 젊은 세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결국은 사랑의 문제 아니에요? 모든 게 사랑해주지 않아서,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죠. 업보를 저지른 세대들은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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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서사도 끝나지 않는다


소설가 황석영은 한 인터뷰를 통해 “당대 청년 이야기를 내가 소설로 다룬 건 처음인 듯하다”고 밝힌 바 있다. 『해질 무렵』 안에서 작가가 시도한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다. 200페이지의 경장편임에도 풍부한 서사를 쌓아 올리고, 동시에 속도감 있게 읽힐 수 있도록 새로운 구성 방식을 택했다.

 

『해질 무렵』은 아주 짧은 소설이죠. 그런데 서사는 풍부하게 가지고 있죠. 종래에 쓰던 서술적 소설이 아니라 씬으로 이어진 소설이에요. 60개 정도의 씬을 만들어서 얽었거든요. 이 소설은 디렉션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시나리오 같은 거예요. 장면전환이 이루어지고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이 엇갈려 있죠. 씬에 나타난 장면이 다 미쟝센으로 이어져 있는 거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길고 서술적인 이야기는 지루하잖아요. 그러니까 압축된 씬과 씬으로 이어져 있는 거죠.”

 

서사의 힘은 줄곧 작가가 강조해 오던 문학의 생명력이자 경쟁력이다. 한국소설 또는 출판시장이 위기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한국소설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 문학이 위기예요. 20세기 초반에 소설이라는 양식이 출발할 때부터 그랬어요. 그 이후로 문학이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어요. 항상 위기죠. 뒤집어 놓고 이야기하면 문학은 시대적 위기의 반영인 거예요. 위기 그 자체죠. 미디어나 매체가 하도 빨리 변하니까 종이 매체가 사라진다는 말로 위기를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위기일지언정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사에 대한 능력과 욕구는 끝나지 않는다고 봐요. 만약 서사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사라진다면 마땅히 꿈도 꾸지 말아야 돼요. 꿈이라는 건 자기가 현실에서 겪었던 것을 무의식 속에서 재편성하고 재구성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거든요.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동물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서사도 끝나지 않아요.”

 

올해 초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을 출간한 후, 작가는 한국문학이 가진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한국문학은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에 비교한다면 여전히 서사가 가진 힘이 있다”는 것. 이 역시 소설가 황석영이 변함없이 지켜온 한국문학을 향한 애정이었다. 그 마음은 우리 소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요즘 만화가 드라마로 바뀌어서 나온 걸 보면 그 현실 인식이나 생동감에서 굉장히 놀라게 되거든요. 그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가까이 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반대하는 말들도 많이 있겠지만, 나 스스로도 마찬가지고 젊은 작가들을 포함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그 만화가들보다 현실적 서사에 가까이 가 있지 못한 거니까요. 그 위기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제대로 접근해서 그리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책을 안 사는 거죠.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빠져 있는데 누가 돈까지 주고 사서 읽겠어요. 책을 사서 볼 사람들의 삶을 그려줘야죠. <미생>이나 <송곳>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굉장히 놀랐어요. 얼마나 현실에 가까이 가 있는지 몰라요. 물론 매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 현대 문학, 특히 젊은 사람들의 문학이 과연 동시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그들과 같이 가고 있는가에 있어서는 조금 자괴감이 든다는 거예요.”

 

아울러 작가는 ‘좋은 이야깃거리’란 무엇인지, 놓쳐서는 안 될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일 중요한 건 재미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없을까?’에서 출발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어요. 어떤 관념을 하나 정해서 소설을 쓴다면, 예를 들어서 이번에는 죽음에 대해서 쓰겠다든가, 이런 식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거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소설의 출발이 그래요. 저잣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시작을 해야죠. 소설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잘 그리면 저절로 주어져요. 현실을 그대로 잘 그려내면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게 보이죠. 그걸 먼저 강조해서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아요.”

 

현재 작가는 내년에 출간될 자서전을 집필 중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방북과 투옥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온 몸으로 겪어낸 생생한 체험을 담아낼 예정이다.

 

“집필은 2/3 정도 마친 상태예요. 내가 겪은 광주항쟁이라든가 방북, 투옥, 그런 경험들을 보강해서 마치려고 해요. 처음에는 자서전 같은 걸 쓰기 싫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런 전쟁이나 혁명, 망명 등을 경험한 작가가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내가 유일해요. 2차 대전 직후에는 많이 있었는데 선배들이 다 가고 나니까 그런 작가가 없는 거죠. 얼마 전에도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했는데, 세계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이행기에 있거든요. 그래서 나의 삶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한국 독자들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서 증언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는 냉전이 해체될 때에도 베를린에 있었고 유럽에서도 10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세계사적 변화를 대부분 다 봤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을 자세히 쓰면 중요한 증언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내에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억압이 있으니까 밖에 나가서 쓰려고 해요. 억압이 머리를 짓누르니까 자꾸 살피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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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황석영 저 | 문학동네
거장 황석영이 신작 장편소설 『해질 무렵』으로 돌아왔다.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이후 3년 만이다. 성공한 건축가 박민우는 인생의 해질 무렵에 서서 길 위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돌아보며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본다. 더는 변화할 무엇도, 꿈꿀 무엇도 없을 것 같은 그의 일상에 ‘강아지풀’ 홀씨 하나가 날아든다. 그 작은 씨앗은 그가 소년시절를 보냈던 산동네 달골, 아스라한 그 시절 가슴 설레게 했던 소녀를 불러오고 달골에서 함께 부대끼던 재명이형, 째깐이, 토막이, 섭섭이형 같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견고하게만 보이던 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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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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