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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리 보셔트 『타이틀 나인』 노시내 번역가 후기

국민 정서나 여론을 앞세워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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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72년에 제정된 타이틀 나인의 첫 37어절이다. (2024.01.10)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우연히 2021년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프라미싱 영 우먼〉을 접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결말을 제외한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주인공 캐시는 의대를 그만두고 낮에는 커피숍에서 일하고 밤에는 술집에서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남자들을 유인하여 혼내준다. 캐시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같은 의대생이고 절친인 니나의 죽음 때문이다. 니나는 의대 파티에서 남학생에게 성폭행당하고 그 장면을 담은 동영상까지 퍼지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하지만 가해자와 범행에 가담한 남학생들은 아무도 징계받지 않고 잘살고 있다. 캐시는 그들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차근차근 행동에 옮긴다. 복수의 대상에는 가해자를 두둔했던 학장도 포함되어 있다. 앞날이 창창한 남학생의 장래를 망칠 수 없다며 사건을 덮어버린 그 학장과 캐시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나는 이 영화의 교묘한 제목을 생각했다.

실제로 2015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학교 운동선수인 가해자 브로크 터너를 가리켜 언론이 “앞날이 창창한 청년”으로 일컬었다. 가해자가 전도유망한 남자 선수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은근한 표현이다. 잘못한 남학생들에게만 유독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 미국 사회의 경우 영화 속 가해자처럼 명문 대학에 다니는 부유층 백인 남학생이면 그들의 잘못에 더욱 너그러워진다. 반면에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여성의 삶이 성폭력으로 망가지는 것에는 동정이 인색하다. 오히려 2차 가해를 하느라 바쁘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게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느냐며 피해자를 탓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여성 성폭행 피해자를 바라보는 가혹한 편견의 시선은 비슷하다. 피해자가 소수자, 이민자, 저소득, 장애인 등 주변부 여성이라면 어려움은 배가된다. 이 영화에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여성 두 명이 그 창창해야 할 앞날을 통째로 무참하게 빼앗긴다. 불의에 내 손으로 복수하는 일은 영화 속에서는 멋져 보일지 몰라도, 현실성도 없고 위험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다. 더 바람직한 방법은 시간과 자원과 참을성이 요구될지라도 제도를 고쳐서 해결하는 것이다. 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규정과 지침을 마련하여 피해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제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단호한 법 집행으로 위반자들을 제재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고 장기적으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



번역 중이던 책과의 연결성을 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였지만, 주제가 무엇인지 깨닫자 곧 영화를 시청하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타이틀 나인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피해자 니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타이틀 나인에 의지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의대의 미흡한 사건 처리에 관해 민권사무국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이틀 나인 진정을 넣겠다고, 정부에서 조사가 나올 테니 각오하라고 학장에게 위협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학장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혹시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본서에 등장하는 생존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타이틀 나인에 대해 잘 몰랐고, 심지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있는 법도 모르거나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법 제정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첫걸음이 피해자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줄이 될 수 있다.

물론 영화 줄거리의 전개상 타이틀 나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타이틀 나인에 관한 번역 작업에 한창 몰입해 있던 내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연상 작용이 이어졌다. 다행히도 영화와는 다르게 본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용감한 여성과 제3의 성에 속하는 차별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그들의 가족이 타이틀 나인을 근거로 진정을 내고 소를 제기하여 성과를 거두고 교육 환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미국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72년에 제정된 타이틀 나인의 첫 37어절이다.

한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논의되고 있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보면, 우선 타이틀 나인의 두 가지 측면이 눈에 띈다. 타이틀 나인은 성차별 금지법이고, 교육계에 한정하여 적용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아니다.

책에서 상세히 설명되듯, 미국에서도 타이틀 나인에 앞서 성차별 금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차별금지법의 도입을 모색한 적이 있었다. 하나는 인종, 피부색, 출신국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는 1964년 민권법 제6편에 성차별 금지를 추가하여 더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으로 확대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법에 성차별 금지를 명시하는 평등권 수정안ERA을 통과시켜 교육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성차별 금지법을 마련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보수의 반대에 부딪혀 둘 다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서 적용 대상을 교육계의 성차별로 협소하게 잡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 바로 타이틀 나인이었다.

타이틀 나인이 제정되었을 때 가장 문제가 된 교육계 성차별 이슈는 여자의 입학을 제한하고 여자 교원을 채용하지 않는 대학의 행태였다. 타이틀 나인이 그런 학교를 제재할 수 있는 무기로 기능하기 시작하자, 정말로 입학과 교원 채용에서 서서히 개선이 이뤄졌다.

타이틀 나인의 효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학교 운동부에 가입하거나 학교 대표 선수로 뛰고 싶은 여학생들이 타이틀 나인을 근거로 학교에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남학생 선수가 누리는 것과 똑같은 시설과 예산과 체육 장학금을 요구하여 받아냈다. 학교 스포츠 성평등에 꾸준한 진전이 이뤄졌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여학생의 스포츠 참여로 이어졌다. 오늘날 여자 축구를 비롯해 미국 여자 선수들이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서 세계 최강의 수준을 자랑하게 된 것도 타이틀 나인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타이틀 나인을 발견한 것은 여자 운동선수만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성폭력을 당하거나 그럴 위험에 노출된 여학생과 여성 교직원들도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타이틀 나인을 근거 삼아 학교가 그런 적대적이고 성차별적인 환경을 방지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고, 오랜 밀고 당김 끝에 드디어 학교가 성폭력 방지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성적 지향 때문에 괴롭힘이나 불이익을 당하는 성소수자 학생들 역시 타이틀 나인을 발견했다. 타이틀 나인은 이 학생들도 지켜주었다. 시간이 가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이 법의 적용 범위는 쉼 없이 확장되었다. 앞으로 또 다른 학생들이 또 다른 문제에서 타이틀 나인에 의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타이틀 나인이 하지 못한 것이 있다. 성차별과 다른 형태의 차별이 겹치는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유색인종이고 장애가 있는 여학생이 학교에서 차별당했을 경우, 그 학생이 당한 차별 행위에는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 성차별의 요소가 동시에 담겨있을 수 있다. 그렇게 차별이 중첩되더라도 타이틀 나인은 오로지 성차별만 다룰 뿐이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도 결론 부분에서 힘주어 지적하듯,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아닌 타이틀 나인의 중요한 한계다.

미국에서 연령 차별,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법 역시 민권법 제6편에 추가되지 못하고 각각 따로 제정되었다. 다시 말해 나이 지긋한 유색인종 장애인 레즈비언 여성이 차별받았다면, 어느 법에 호소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법마다 세부 규정과 구제 절차가 다르므로 그것을 일일이 찾아 장단점을 따져보고 어떤 법으로 가장 잘 보호받을 수 있을지 알아내는 부담은 피해자의 몫이 된다. 과장된 사례 같지만, 먼 미국의 일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한국도 이민자가 증가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권리 확대에 나서는 등 사회가 다각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앞으로 교차적·복합적 차별 문제가 더 흔하게 불거질 것이다. 그렇다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하나의 차별 행동에 여러 개의 차별 유형이 겹칠 경우를 통합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안이 될 수 있다.

흔히 차별금지법 반대자들은 법을 제정하기 전에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권이 문제 될 때는 법이 주도적으로 문화의 변화를 유도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도 있다. 국민 정서나 여론을 앞세워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도입됐을 때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인종주의자였다. 미국에서 타이틀 나인이 제정됐을 때 미국인 대다수는 ‘여자가 무슨 스포츠냐’고 했다. 지금도 인종차별, 성차별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민권법과 타이틀 나인의 제정이 미국 사회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긍정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저자는 말한다. “문화의 변화가 법의 변화보다 뒤처질 수 있고,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민권의 근본적인 공정함을 인정하는 흐름을 없던 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문제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눈가리개를 벗은 사람은 본 것을 안 본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부인하려는 사람이 많아도, 한국 사회는 이미 눈가리개를 벗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눈가리개를 벗었다. 그들에게 본 것을 안 본 것으로 하라고 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제를 문제로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다. 그래야 이 사회가 차별 생존자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소중한 생명줄을 쥐여줄 수 있다.



타이틀 나인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저 | 노시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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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시내(번역가)

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27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마이너 필링스》 《책임 정당》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작가 피정》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저/<노시내> 역26,1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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