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국문학번역상 대상(프랑스어) 수상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인터뷰
『빛을 향한 여행: 머묾과 떠남』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작가 서면 인터뷰
한국이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어떻게 헤쳐왔는지, 또 그 같은 시절에 대한 담론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 아니라 이해하고 멀리 내다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24.01.10)
오랫동안 한국 정치,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온 저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는 특히 한국 사진작가 김기찬, 조세희, 마동욱의 작품 세계에서 70~80년대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고 읽으며,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그 시절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의 오랜 한국 사랑이 이제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바뀐 세계를 재구성하며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고 근원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어느새 마르세유 골목과 서울 골목 풍경을 오가며 정다운 이웃들의 일상을 훔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교 역할을 한다.
먼저 ‘2023 한국문학번역상’ 대상(프랑스어)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문학평론가, 번역가, 출판인으로 20여 년간 프랑스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데 기여해 오셨습니다. 한국문학 작품에 이끌리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궁금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국문학 연구가로 활동해 오셨습니다. 프랑스 문학과 더불어 한국 문학에 깃든 예술성이나 독창성을 특별히 함께 언급해 주신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한국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덕분에 엑스마르세유대학교에 한국학 강의를 개설할 수 있었고, 이제 우리 학과는 프랑스 내 한국어 교육의 중심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문학하는 사람이 어떤 나라와 그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나라의 문학도 절로 궁금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현재 학과장을 맡고 있고 제 아내이기도 한 김혜경 교수와 함께 우리 대학 아시아학연구소를 한국문학 연구의 거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글마당’이라는 한국문학 전문지를 창간하고, 이어서 <드크레센조> 출판사를 설립했습니다. 현재는 제 아들 프랑크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포럼을 개최해서 지금까지 한국 작가 서른 분가량을 모셨는데, 이 행사 역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덕에 스무 해가 넘도록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가족에게 한국문학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한 나라와 그 문화, 정치 등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분야가 도움이 됩니다. 문학도 그중 한 수단입니다. 저는 허구를 통해 현실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한국문학이 거쳐온 여러 시대를 살펴보면 이 나라의 역사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문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여러 시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한국문학이 가장 활짝 꽃 피어난 시기는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인데,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젊은 시절과 겹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청준, 이문열, 조세희, 박완서, 최윤 같은 작가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한 나라의 시련을 증언하고 근대화의 허상과 실상을 폭로하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문학이었습니다.
이어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순서에 따르면) 이승우, 황석영, 이인성처럼 사유와 문체의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소설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우리가 ‘젊은 작가들’이라고 부르는 신진 작가들의 생기 넘치는 문체는 한국과 한국문학에 대한 또 다른 신선한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이끌리듯 우리는 김애란, 편혜영, 김중혁, 한유주 등의 소설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들은 당연히 상이한 양상을 띠지만, 현대 사회로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사회문제 속에서 신음하는 한 나라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문학과지성사에서 한국문학 평론집 두 권을 냈는데(『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과 『다나이데스의 물통』), 그 책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같은 관점입니다. 문학은 그것을 낳은 나라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은 한 나라의 역사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일견 한국 문학과 프랑스 문학은 별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계화된 커다란 두려움”이라고 일컫는 것들에서 판에 박은 듯한 똑같은 문학이 나오고, 지구 이편과 저편에서 모두 이런 책들을 별 느낌 없이 읽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문학은 부디 이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의 1960~80년대 사진 속 인물과 도시 풍경들이 등장합니다. 도시는 언어와 더불어 태어나고, 성스러운 말이든 세속의 말이든 언어가 이 한정된 공간을 채운다(본문 41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와 프랑스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을 텐데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게 도시는 무엇보다도 사회성이 집약된 장소입니다. 도시는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기 위한 곳입니다. 도시 건축이 이에 동참한다는 조건에서 말이지요. 사람들이 마주치고 만나고 서로 알려면 골목과 광장과 ‘아고라’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골목과 제가 태어난 마르세유 거리는 작은 마을 같아서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이 장소들은 일상의 행복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빵을 사러 가거나 장 보러 갈 때, 또는 이발소에 갈 때 낯익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도 없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한국의 골목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저희 동네처럼 말이지요. 자동차는 들어오지도 못했고, 걷는 속도로 삶이 흘러갔습니다. 몇 발짝만 가도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고, 그러면 멈춰 서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탈리아 남부나 프랑스 남쪽 지방에서는 여전히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말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는 흐름, 특히 물류를 위한 곳이 돼 버렸습니다. 차량과 물품과 군중의 이동 속에서, 소음과 매연 한가운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저는 이 사진 작품들을 통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절, 사람 냄새가 나던 시절, 느림을 흉보지 않던 시절을 예찬하고 싶었습니다.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친구와 수다도 떨고, 다른 이의 하소연도 들어주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외려 시간을 풍요로운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경제 체제는 모든 것, 심지어 말까지도 돈벌이 수단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한가롭게 나누는 대화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요!
김기찬, 조세희, 마동욱 사진작가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김기찬, 조세희 작가의 작품은 흑백 사진입니다. 흑백은 ‘노스탤지어’, 즉 그리움의 빛깔입니다. 저는 더 살 만하던 시절,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던 그 시절을 사뭇 그리워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꾸밈없는 사람들을 찍은 이 사진들, 특히 조세희의 작품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칩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모두가 없이 살던 시절의 한국을 담은 이런 사진을 보면, 국가 근대화의 폐해는 다음 세대가 더 잘 살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세희는 가진 것 없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 대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습니다. 목이 쉬도록 소리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결국은 지쳐버린 표정입니다. 이런 사진 앞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불편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다 보면 감상자의 시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가슴이 저릿하면서 울컥함이 올라옵니다.
한편 김기찬의 사진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시절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상업이 우리네 삶을 잠식하지 않은 시절의 사진들입니다. 길바닥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자고, 길을 가다 마주친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하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다양한 사람과 이런저런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같은 따스한 시선은 특히 아이들을 찍은 방식에서 두드러집니다. 김기찬의 사진에서는 반짝이는 재치와 잔잔한 웃음이 묻어납니다.
마지막으로 마동욱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컬러 사진인데, 그 무엇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진가의 집착에 가까운 열정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이 작가는 날이면 날마다 고향 땅을 누비고 다니면서 손바닥 보듯 훤한 전라남도 구석구석을 찍고 또 찍습니다. 얼굴이든 나무든 마을이든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깁니다. 가히 ‘총목록의 사진가’라고 할 만한 수준입니다. 우리가 “이것 보라고! 이런 게 있었다니까. 잊지 말아야 돼. 옛날에 있던 것 어느 하나도 잊으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입니다.
사라져버린 것들의 흔적을 찾으면 찾을수록 커져만 가는 그리움 속에서 ‘머묾과 떠남’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고, 또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본문 31쪽)를 묻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노스탤지어’, 즉 그리움은 어떤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입니다.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또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이들과 정답게 지내던 무렵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지요. 말 그대로 우리의 존재가 뿌리를 내린 시절, 즉 우리의 뿌리가 살아 있던 시절입니다. 이 뿌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또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줍니다. 하지만 뿌리내림, 즉 머묾 뒤에는 뿌리 뽑힘, 곧 떠남이 찾아옵니다. 나이가 들고, 떠나야 하고, 사는 곳을 옮겨야 하고, 소중한 이가 우리를 남겨둔 채 세상을 등집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입니다. 움직임의 시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직업과 도시와 이야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쭉 뿌리를 내리고 살았지만, 이제 움직임을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뿌리내림과 뿌리 뽑힘, ‘머묾과 떠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자취를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흔적을 찾아 나설수록 그 사라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불가능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지난날은 우리 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쉽니다. 생각 속에서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과 되뇌던 말들과 경험한 일들이 다시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다 지나가고 없는 것들인데 말이지요.
우리는 사라진 것들의 자취를 찾습니다. “진짜 있었던 게 맞을까, 전부 다 꿈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찾아다닙니다. 소식이 끊어진 친구,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 기억 속에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는 행복 넘치던 시절은 이제 없습니다. 이를테면 태어났거나 어릴 때 살았던 집이 그렇습니다. 그 집이 있던 곳에 다시 가보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습니다. 보기도 싫은 건물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서울의 옛 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수도는 급박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죄다 부숴야만 했습니다.
집과 거리를 부술 때는 추억과 존재도 산산조각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존재했던 것의 흔적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합니다. 코흘리개 적에 놀던 기억과 장소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뒤로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는 느낌에 시간을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망각이 본령인 문명의 과정 속에 이미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사방에서 잊기를 촉구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새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새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니까요.
『빛을 향한 여행: 머묾과 떠남』을 읽을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이미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미지에 대한 관찰과 상상력에 대한 탐구가 빚어낸 풍부한 시적 사유의 세계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강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낼 때마다 주목하고 음미하게 되는 언어의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 책에는 상상력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시론』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들이 있는데요, 작가님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한국 독자들이 언어의 기쁨을 느끼는 데는 이 책을 옮긴 이소영 번역가의 공이 적잖다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그 무엇보다 문학적인 언어를 좋아합니다. 우리를 열광시키는 것, 사유와 글의 빛깔, 문체를 좋아합니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단어들이 좋습니다. 문학은 일상의 언어가 아닙니다.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나날의 삶을 넘어서게 하는 미학의 과잉이자 여분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저는 책을 읽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다른 사람이 되려고 읽습니다. 자신을 열광시키지 않는 책에 붙들려 시간을 버리면 안 됩니다.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책은 진정한 책이 아닙니다.
저는 소설의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문체와 사유의 깊이, 어휘, 문장의 배열, 한 문장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충격과 감흥, 이런 것들은 그 무엇에도 비길 바가 없습니다. 언어가 아름답기만 하면 저는 정말 지루한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게 영향을 끼친 저자들은, 소설가든 수필가든 학자든, 언어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언어를 작업의 중심에 가져다 놓은 작가들입니다. 리샤르 미예, 피에르 미숑, 파스칼 키냐르, 쥘리앵 그라크, 또는 밀란 쿤데라,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이승우, 이인성 등의 현대 작가나 플로베르, 프루스트, 지오노 같은 고전문학의 거장들이 그렇습니다. 이 작가들은 제게 영감을 줄뿐더러 따라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저는 언어 자체를 실험한 작가들이 좋습니다. 바슐라르나 니체 같은 철학자와 샤를 멜망 같은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토퍼 라쉬 등의 역사학자, 롤랑 바르트, 장 스타로뱅스키, 장 피에르 리샤르 등의 문학비평가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게 영향을 준 작가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끝도 없을 것 같네요.
“인간은 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거를 통해서만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성 중인 존재다”(37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흔히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반으로 그의 과거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존재는 우리의 과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멀찌감치 떼어놓는 그 무엇, 다시 말해 ‘언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행위와 사유의 정확한 요약본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는 언어로 만들고 연출한 담론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은 늘 합리적이고 타당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제 와 보니 후회가 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고, 소중한 이들을 저버리기도 했으며,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겪은 것은 절반의 과거입니다. 과거는 우리의 논평입니다. 우리는 추억을 미화하고, 괴로움을 누그러뜨리고, 기쁨을 예찬합니다. 부지불식간에 과거를 탈바꿈시키는 셈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과거는 우리를 요약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하려는 것은, 또 우리가 되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늘 경험의 눈, 즉 과거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이 같은 미래는 우리의 과거 존재를 기반으로 정의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려는 것, 때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우리가 한 것보다 우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미래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내다보는 형식입니다. 가령 자신이 품은 계획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그 계획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과거의 계획은 어땠나요?”라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어떤 나라에 간다고 하면 그 나라에 대해 물어보지, 이때까지 가본 나라에 대해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한국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갖고 한국을 오랫동안 사랑해 오셨는데요, 개인적인 특별한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했을 때 멀리 프랑스에서 라디오로 듣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의 항거에 몹시 놀라면서 느낀 바가 컸고, 그렇게 해서 당시 프랑스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 저는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무척 많았는데,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대사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할 힘도, 수단도 없는 이들에게 유독 마음이 갔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회학, 그중에서도 집단 내의 관계 형태를 연구하는 사회학 분야에 흥미가 있어서 한국 사회의 ‘담론’과 ‘스토리텔링’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자국에 대한 담론이 이 나라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한국이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어떻게 헤쳐왔는지, 또 그 같은 시절에 대한 담론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 아니라 이해하고 멀리 내다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앞날은 어떠할까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그들 또한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앞서 말한 제 책 중 한 권(『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에서 저는 “한국문학 속 적의 형상”이라는 주제로 이 같은 내용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외국에서 한국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나라”라고들 합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이 미래에 다가가는 방식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또 한국인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앞날을 내다볼까요? 생각만으로도 흥미진진하지만, 우려되는 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 덧붙이자면, 저는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 한국에 가족이 있을뿐더러 한국인 며느리를 둔 사람입니다. 또 일 년에 보통 두세 번은 한국에 들어옵니다. 이만하면 독자 여러분의 나라에 관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클로드 드크레센조(Jean-Claude De Crescenzo) 엑스마르세유대학교(Aix-Marseille Université) 한국학 창설자. 문학평론가, 번역가. 1952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출생, 릴 제3대학교 대학원 박사.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아시아학연구소(IRASIA) 객원연구원. 2002년 엑스마르세유대학교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2018년까지 주임교수로 재직했다. 2017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 2009년 부인 김혜경 교수(엑스마르세유대학교 한국어과 교수, 한국어 보급의 산증인이다)와 함께 프랑스어판 한국문학 문예지 ‘글마당’(www.keulmadang.com)을 창간하고 프랑스 출간 한국 문학작품을 정기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한국문학 출판사 ‘드크레센조’(Decrescenzo Éditeurs)를 설립하고 한국 소설가 이승우, 한강, 은희경, 김애란, 정유정 등과 고전문학가 박지원, 이태준, 그리고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작품을 출간하였다. 한국문학 공동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문학평론가, 번역가, 출판인으로 20여 년간 프랑스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데 기여해 왔다. 그의 다수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이승우 작품의 상징과 주제를 해석한 『다나이데스의 물통』(문학과지성사, 2020)과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문학과지성사, 2023)이 출간되었다.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프랑스 내 ‘한국의 해’ 감사패, 2016년 한국문학번역원 공로상 수상. 2023년 김달진문학관이 주관하는 제14회 창원KC국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국립국어원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 주최하는 <2023 세계한국어한마당> 국제학술대회 개회식에서 ‘언어의 가장 빛나는 종착지, 문학’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최근 장클로드 드크레센조·김혜경, 두 번역가는 이승우의 장편소설 『캉탕』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2023 한국문학번역상’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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