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특집] 별점 5개의 책 - 임수연 <씨네21> 기자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출장 가기 전 짐을 쌀 때 옷가지보다 고민되는 것이 이번엔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고르는 일이다. (2022.08.09)
출장 가기 전 짐을 쌀 때 옷가지보다 고민되는 것이 이번엔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고르는 일이다. 다 읽지도 못하면서, 어떨 땐 손도 안 댔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캐리어 맨 밑바닥에 열심히 챙긴다. 의미 없이 짐 가방 무게만 늘어날 땐 '이번에도 망한 선택이었다'며 자조한다.
올해 칸 국제 영화제 출장을 준비할 땐 경쟁 부문에 진출한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을 생각했다. 어쩌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꺼내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2017년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던 것을 보면 5년 전에 구매했지만 '사놓고 아직 안 읽은' 수백 권의 책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몇 년 만에 서재를 훑던 내 눈에 갑자기 포착된 이유는 무엇일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복기하다 같은 해 개봉한 〈캐롤〉로 넘어갔고, 자연스럽게 〈캐롤〉의 원작 소설을 쓴 하이스미스가 떠오른 건지, 〈리플리〉로 대표되는 하이스미스의 범죄 심리극이 〈헤어질 결심〉과 장르적으로 비슷할 거라고 내 맘대로 추측했던 건지, 혹은 박찬욱을 영화감독이 되게 이끌었던 알프레드 히치콕을 생각하다가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원작을 쓴 하이스미스의 이름이 기억났을지도.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을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기분 좋은 공상도 즐기면서 출장 중 틈이 날 때마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었다. 다음 영화 스케줄을 기다리며 프레스 전용 와이파이 카페에 앉아서, 영화진흥위원회 부스를 찾아 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숙소 베란다에 앉아 한국보다 저렴한 크루아상을 우걱우걱 뜯어 먹으면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의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는 첫사랑 애나벨과 연애하던 찰나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남자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는데도 두 사람이 같이 살 집을 짓고 2인분의 식사를 마련하는 등 상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매주 편지를 쓴다. 〈리플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이 스미스는 지독한 욕망과 집착의 정신 병리를 흥미로운 범죄극의 구조로 서술해 몰입시키며, 때로는 망상병자 데이비드에게 이입하게도 한다. 데이비드의 입장에서 서술됐던 데이비드와 애나벨의 관계에 얽힌 진실이 냉정하게 드러날 땐 "과거의 애나벨이 아예 여지를 주지 않은 건 아닌데"라는 원망이 순간적으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찬욱을 떠올리며 책을 고른 데다 〈헤어질 결심〉과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같은 시기에 만난 까닭에 나는 무의식중에 두 작품을 비교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스스로에게 경도된 데이비드의 나르시시즘과 사랑에 미친 '집착 광공'임에 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분)는 범죄와 로맨스를 엮었다는 장르적 유사성 외에는 극과 극에 서 있다. 남성의 욕망이 폭력으로 이어질 때 그 피해를 무고한 여성이 입어야 하는 광경을 심적인 브레이크 없이 보기란 참 어렵다. 1950~60년대의 하이스미스와 히치콕, 그리고 2022년의 박찬욱이 무엇이 닮고 다른지 비교하며 범죄와 로맨스를 섞는 현대적 방식을 고민한다. 올해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최고 평점을 받았던 〈헤어질 결심〉이 왜 끝내주는 현대적 장르 영화인지 더 선명해진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사심 때문에 챙겨 간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감독보다 글 잘 쓰는 평론가로 더 유명하던 1994년에 출간됐던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은 박찬욱 감독의 '찐 팬'임을 인증할 수 있는 증거품이다.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마니아들이 헌책방 투어를 하게 만들었던, 한때 10만 원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던 '레어템'이기 때문이다. 결국, 2005년 『박찬욱의 오마주』라는 제목으로 새로 추가된 글이 포함된 개정 증보판이 나왔고, 나 역시 출간되자마자 구입했지만, 박찬욱 감독의 진정한 팬이라면 왠지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을 반드시 소장해야만 할 것 같았다.
결국, 덕후의 집착을 눈치챈, 같은 종족의 덕후이 자 내가 가장 신뢰하는 영화 애호가 친구가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중고책을 선물로 줬다. 이번 출장에 이 책을 싸 들고 간 이유는 간단하다. 칸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 수줍게 책을 내밀며 사인을 요청하고 싶었다. 굳이 절판된 버전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증명되지 않을까, 감독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그동안 영화 기자로 일하면서 박찬욱 감독을 만날 일이 꽤 있었는데 왜 (〈박쥐〉를 극장에서만 9번 보고, 술자리에서 목에 핏대 세우며 영화가 별로라고 한 이들과 설전을 벌인 적도 있던) 팬심을 어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이번이 기회다. 심지어 사인을 받는 곳이 칸이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문제는 내가 업무가 바빠지면 업무 외의 모든 것을 하얗게 잊어버리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을 포함한 한국 영화 4편과 경쟁 부문 상영작 21편을 챙기고 칸 현지 라이브 방송까지 진행하다 보니 캐리어 맨 밑바닥에 소중히 모셔놓은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 드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그대로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고만하면 그냥 슬픈 이야기겠지만 이 책은 존재 자체로 뜻밖의 힘을 발휘했다. 가장 순수하게 영화를 사랑했던 시절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고 출장길에 오른 덕분에 영화제 기간 내내 기묘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20대 시절 영화에 미쳤던 내가 결국 영화 일을 하게 됐고 지금은 칸에 와 있다.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은 내가 피로에 찌들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일종의 부적이었다.
어떤 책은 내가 하는 일과 어떻게든 연결되면서 감상의 층위를 다양하게 만든다. 어떤 책은 존재 자체로 내가 시간 쏟는 일이 무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출장길 책 선택은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별점 5개다. 정말 잘 골랐다.
*임수연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를 본 후 뜨겁게 사랑하고 때로는 논쟁하는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다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 기자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영화는 물론이고 TV 프로그램, OTT 시리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사를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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