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특집] 물고기를 잃고 바다를 얻은 이야기 - 김나영 콘텐츠 기획자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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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아주 오랜만에 다이빙을 하러 갈 수 있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필리핀 팔라완 섬의 작은 도시 푸에르토 프린세사. (2022.08.09)


필리핀 팔라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쿠버 다이빙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는 분명히 땅 위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바다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에요. 하지만 왜 좋아하는지 만큼은 확실합니다. 푸르고 따뜻한 물, 뜨거운 햇볕, 다이빙을 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그 아름다운 무료함, 소금기 밴 몸을 햇볕에 말리는 순간, 그리고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바다 생물들을 관찰하는 일. 이것들이 스쿠버 다이빙을 좋아하는 이유예요.

그리고 이번 여름, 아주 오랜만에 다이빙을 하러 갈 수 있었습니다. 도착한 곳은 필리핀 팔라완 섬의 작은 도시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 하지만 진짜 목적지는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은 바로 '투바타하(Tubbataha)'입니다. 이곳은 3월부터 6월, 1년에 딱 3개월만 입장이 허가되는 해상 국립 공원으로 인생에 꼭 한 번쯤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어요. 

다이빙에는 여러 형태가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다이빙은 '리브어보드(Liveaboard) 다이빙'이에요. 배에서 머물면서 바다를 돌아다니며 다이빙을 즐기는 거죠. 해변가 리조트에서 머물면서 다이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리브어보드'는 더 먼 바다로 나가서 다이빙을 할 수 있거든요. 특별한 점이 수도 없이 많지만, 보통의 여행과 다른 것은 바로 인터넷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가장 매력적인 점이기도 해요. 육지로부터 배로 최소 4시간, 길게는 12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서 진행하니, 인터넷을 비롯한 휴대폰 서비스가 전혀 터지지 않는 것이죠. 스트리밍 서비스여 안녕. 이제 아날로그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날로그 세상에서 다이빙을 하고 남는 시간을 잘 보내려면 책이 필요합니다. 가지고 다니는 장비만 해도 14kg 정도라 전자책을 가져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택인 것을 알지만 늘 종이책을 고르게 됩니다. 특히, 습한 바닷바람을 머금어서 약간 보드라워지고, 도톰해지고, 무게감이 생긴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넘겨 읽으면 어쩐지 뭍에서 읽을 때보다도 책의 농도가 짙어진 느낌이 들거든요. 어떤 책을 가지고 갈까 한참 고민한 끝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골랐습니다. 물고기들과 유영하기 위해 바다에 가면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책을 가지고 가다니요. 하지만 가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너무 뻔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뻔함조차도 아날로그의 백미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투바타하에서 만난 풍경은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와 하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제가 서있다니 믿어지지 않았어요. 물속에 들어가니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손상되지 않은 산호가 한가득인데,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게다가 물고기들이 제 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갔습니다.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왠지 물고기들이 “왔 어?”하고 웃는 것만 같습니다. 모랫바닥에서 조용히 잠든 상어의 통통한 볼을 구경하고, 산호를 과격하게 뜯어먹는 거북이, 곰치의 이빨을 닦아주는 새우를 보며 웃었습니다. 이 물고기들과 함께 (물론 장비의 힘을 많이 빌렸지만) 숨쉬고 있다니.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좋아서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바다를 유영했습니다.

다이빙이 끝난 후 사람들이 낮잠에 들 때 쯤, 저는 커피나 맥주, 과일을 들고 배 가장 위층의 데크로 올라갔습니다. 해먹에 누워서 책을 펼치기도 했고, 벤치에 기대앉아 몸을 말리며 책을 읽기도 했죠. 룰루 밀러가 삶의 이유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를 찾아 헤매다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매료되고,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또다시 절망하고, 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외의 사실에서 다시 시작해서 결말을 이끌어내는 모든 과정은, 끝없는 수평선 뒤로 해가 붉게 지고, 종이 위에 회색 그림자 대신 붉은 그림자가 지는 해질녘의 바다 위에서 끝이 났습니다.

다음 날 또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을 만났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물속을 헤매고 있자니 바닷속 세상이 조금 더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물고기'라는 이름 아래 이 생물들의 개성을 얼마나 무시하고 또는 넘겨짚었을까요. 바다는 인간에게 있어 태초의 고향인 셈이 아닐까. 내가 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나를 둘러싼 수천수만 마리의 해양 생물 중에 어떤 것들이 내게 가까울까. 저 너머가 보이지 않는 깊은 먼바다 속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내 보았습니다. 

'내 먼 친척이 여기 어디엔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룰루 밀러는 책에서 '물고기'를 잃고 새로이 얻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물고기'를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 물속에서 한참이나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와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책을 읽겠다는 역설적인 생각은, 더욱 역설적이게도 물고기를 잃은 대신 바다를 얻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오랜 시간 저의 도피처였던 바다가, 물고기를 잃고 나서 진짜 집이 되었거든요. 이제부터는 어딘가에서 도망치기 위해 바다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마다 생각하게 될 거예요. "집에 돌아왔어" 

책의 중간,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길을 찾지 못했던 룰루 밀러는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라고 말했습니다. 룰루 밀러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 빈손이, 이 길 잃음이야말로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물고기를 모두 잃고 자신의 성을 찾았듯이, 제 게는 마음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집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집이요.



*김나영

음식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를 보고 읽고 쓰며 다양한 콘텐츠로 만든다. 메일링 서비스 〈먹는 일에는 2000%의 진심〉을 발행하고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 | 정지인 역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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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나영(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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