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사람] 이재현 위고 대표 “저자의 첫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월간 채널예스> 2021년 6월호
편집자라는 직업에는 중독성이 있어요. 처음에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고민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 일을 오래 계속 하고 싶다라는 바람으로 나아가더라고요. (2021.06.02)
얼마 전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아무튼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인데, 이런 책도 만드네?” 위고 출판사가 펴낸 ‘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메모』, 『아무튼, 비건』,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딱따구리』, 『아무튼, 외국어』 등인데, 위고가 2013년 처음 출간한 책은 마이클 거리언의 『소년의 심리학』,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폭력에 반대합니다』이다. 에세이도 만들고 인문교양서도 만들고 철학서, 육아서, 그림책 등도 만드는데 출간 리스트를 보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묘한 연결성이 있는 책들, 그래서 독자는 출판사를 신뢰하게 된다.
위고는 2인 출판사다. 2012년에 조소정, 이재현 편집자가 설립, 2013년에 첫 책을 낸 뒤 현재까지 49종의 책을 펴냈다. 두 사람이 창업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책을 오랫동안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편집자라는 직업에는 중독성이 있어요. 처음에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고민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 일을 오래 계속 하고 싶다라는 바람으로 나아가더라고요. 위고를 함께 창업한 조소정 씨와 제가 편집자로서 각자 10년쯤 됐을 무렵, 오랫동안 책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 고민했고 그 답이 창업이었어요.”
이재현 대표의 편집자 경력은 2002년 이레출판사에서 시작됐다.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논문을 쓰는데 너무 잘 쓰고 싶었다. 석사 논문은 박사 논문을 쓸 수 있는가를 보는 일종의 자격시험인데, 대단한 논문을 쓰고 싶은 마음에 글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때 그를 지켜보던 친구가 머리를 좀 식혀보라며 편집 일을 제안했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출판 일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만든 책은 다니엘 오퇴이유의 글에 상페가 그림을 그린 『바보 같은 짓을 했어』라는 프랑스 책이었어요. 제가 불어를 전공했으니까 제게 맡겨진 것 같아요. 현재는 절판됐는데, 배우 다니엘 오퇴이유의 유년 시절에 관한 자전전 소설이라고 기억해요. 처음 출판사에 들어왔을 때는 편집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 주로 문학 작품이나 연구서만 읽어 왔기 때문에 교정 교열에 관한 개념이 희박했거든요. 당연히 독자나 시장이라는 개념도 잘 몰랐고요. 내가 편집자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마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제가 출판사를 만들고 20년 동안 책을 만들게 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워요. (웃음)”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푸른숲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아무튼 시리즈’를 함께 만드는 김태형 제철소 대표, 이정규 코난북스 대표와는 모두 푸른숲에서 맺은 인연이다.
‘위고’ 출판사 이름은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박물관 화재로 시계공인 아버지를 잃은 12살 소년 위고 카브레가 자동인형을 고치면서 겪는 모험을 다룬 책인데, 그 소년의 용기를 갖고 책을 만들고 싶었다. 조소정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소년소녀의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눈을 반짝이며, 주저하지 않고, 달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저마다의 소년소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소년소녀가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마다 마음속에 소년소녀를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책을 만들자는 의미에서 위고라는 이름을 정했어요.”
두 사람은 모든 책을 함께 편집한다. 각각 따로 맡는 책이 없고 저자와 소통하는 일에만 담당을 둔다. 2인 출판사, 공동 대표라서 좋은 점은 의논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을 다해도 체력이 떨어지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데,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설득할 상대가 있다는 거죠. 혹은 경험치로 알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설득하는 작업이 매번 힘들죠. 함께하는 이들이 많다면 오히려 설득하기가 쉬울 수 있어요. 어떤 사안에 대해서 공통된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면서 줄기가 잡히는데 둘이다 보니까 논쟁으로 흐르기 쉬워요. 물론 생산적인 논쟁이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매우 원론적인 문제에 가 닿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출판의 의의를 계속 상기하게 되는 건 장점일 수 있겠고요.”
이재현 대표가 위고에서 만든 책 중에 가장 각별하게 생각하는 책은 2014년에 출간된 데이비드 리코의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이다. 30년 동안 심리치료사로 활동해온 저자가 쓴 책으로 피할수 없는 삶의 조건인 ‘관계’와 인간의 깊은 욕망인 ‘성숙’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글이 너무 날카로운 동시에 아름다워서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어요. 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거리감을 놓치고 편집자가 아닌 독자가 되어버리는 거죠. 한 분야를 오랫동안 진심으로 탐구한 대가의 목소리를 한 단어 한 단어 읽을 수 있어서 무척 벅찬 경험이었어요.”
위고 출판사에게 있어서 새 길을 열어준 책은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이다. 이전까지는 정신분석, 심리학과 관련된 책을 집중해서 만들었는데, 『아무튼, 비건』을 기획한 전후로 동물권, 환경, 기후 등 사회과학 관련 도서에 좀더 집중하게 되면서 『아무튼, 딱따구리』, 『활생』, 『앞으로 올 사랑』 등을 펴내게 됐다. 이후에도 지속가능한 삶, 동물권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여성, 어린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시크』, 『폭력에 반대합니다』, 『여름의 잠수』 등을 출간했다.
“『아무튼, 비건』을 출간했을 때는 몰랐지만 이 시점을 경계로 좀 더 확장된 시선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위고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위고는 국내서와 외서를 고르게 펴내는 편이다. 외서를 선택하는 기준은 일단 ‘시의성’.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한 메시지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서전에서 소개되는 신간들도 챙겨 보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 저자의 연구 혹은 작품 활동도 유심히 살핀다. 외서는 초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하는데, 과연 이런 비용을 들여서 소개할 만한 작가인지를 신중하게 살펴본다.
“지난달에 출간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폭력에 반대합니다』는 국내 출간이 늦은 감이 있어 많이 고민했어요. 하지만 출간 시점이 무색하게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요즘, 린드그렌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림이 있다고 판단해서 출간을 결정했어요.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잖아요?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하는 것, 어른 마음대로 다루는 것 또한 폭력이니까요.”
현재 이재현 대표가 편집하고 있는 책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된 후 페미니즘의 고전이 된 『여성과 광기』의 개정판이다. 심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필리스 체슬러가 정신질환 여성들을 통해 그들이 수백 년 동안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에 희생되었음을 입증한 책이다.
“미국에서도 2005년에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꾸준하게 읽히는 책인데,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고전이라는 점이 흡족하지만 그만큼 현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어두워요. 1970년대에 여성이 처한 상황과 2005년대 미국의 상황 그리고 2020년대 상황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안타깝죠.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여전하고, 가부장적인 시스템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제스처에 ‘광기’는 이름을 붙이는 사회 현실에서 이 책이 조금이라도 여성의 연대에 힘이 되고, 거대 악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재현 대표가 책을 만들며 가장 기쁜 순간은 따끈따끈한 원고를 받았는데 글의 내용이 무척 흡족할 때다. 누군가의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는 설렘은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기쁨이다. 원고를 받으면 편집자는 이제 건축가가 된다. 여러 모양의 집을 지을 수 있으니까.
“편집자에게는 책과 삶을 연결하는 사고 과정이 필요해요. 책의 메시지가 삶의 메시지로 이어져야 하니까요. 책은 책으로 삶은 삶으로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기획하다 보면 대중을 상정하게 되는데, 그 대중 속에 자신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해요. 막연한 대중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잘 찾아보고 이를 벼리는 훈련이 편집자에게는 무척 중요해요. 내게 필요 없는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필요할까요? 그리고 편집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저자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편집자는 원고가 입수된 시점부터 이 원고가 속하게 될 시장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저자의 처음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일이 중요해요.”
최근 이재현 대표는 위고의 출간 목록을 살피며 ‘출판사는 일종의 상점 아닐까?’ 생각했다. ‘위고’ 라는 상점에서 에세이, 교양서, 사회과학서를 구입하는 손님(독자)들은 동일한 메시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한다. 어쩐지 산만해 보이는 상점인데 꼼꼼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소년/소녀의 마음이 튀어나온다. 바로 위고가 그렸던 모습이다.
“좋은 책은 삶을 변화시키는 책, 읽고 난 후 스스로가 다르게 느껴졌거나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운이 좋게도 정말 좋은 저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삶과 글이 일치되는 저자들의 글은 거짓말하지 않는 텍스트잖아요. 뭔가 거칠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한 글이 책으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위고는 올해 하반기부터 새 편집자와 함께 일을 시작할 계획이다. 3인 편집자 체제는 처음인데 책을 내는 속도를 좀더 올리고 다양한 책을 선보일 생각이다. 또 출판사 홈페이지도 제작 중에 있다. 끝으로 이재현 대표에게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 아닌가 싶었는데 너무나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책이 재밌다는 걸 꼭 아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20년 경력의 편집자에게도 역시 지치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혜윤 지음| 위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해. 시사 피디답게 문제의 원인을 파고든 저자가 한달음에 써낸 책. 기후변화, 동물권에 관한 책을 이렇게 감동적으로도 쓸 수 있다니. 마음이 움직여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책.
백상현 지음| 위고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의 『세미나7』 강해서. 국내에 미번역된 텍스트를 강해하는 원고라는 일종의 아이러니 앞에서 여러 고민과 시도를 했던 책.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라깡을 깊이 연구해온 저자의 내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책이었을 것이다.
조지 몽비오 지음/김산하 옮김 |위고
『아무튼, 비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게 된 책인데, 김산하 선생님이 이 책의 저자 조지 몽비오를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번역을 의뢰 드렸다. 칼럼니스트라서 그런지 글이 날카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국식 유머에, 온갖 동식물 이름 게다가 웰시어 등등 다양한 장애물이 산재해 있었는데 김산하 선생님의 열정으로 이 모든 것을 헤쳐 나왔다. 초고를 받았을 때 저자의 대담한 사고에 빠져들어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 난다.
사라 스트리츠베리 글/사라 룬드베리 그림/이유진 옮김 | 위고
어린이책에서 잘 다루는 않는 주제(우울증)이지만 사라 룬드베리의 그림에 마음을 뺏겨 덜컥 계약하고 말았다. 물론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감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언제나 어른보다 깊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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