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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SF에는 세계를 파괴할 힘과 재생할 힘이 있어요”

『그날,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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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소망하는 바를 최대한 이뤄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 싶다, 치유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2021.04.05)


2045년에 살고 있는 ‘해미’는 20년 전 원전 사고로 엄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군인 출신 잠수사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면서 거듭 상처를 받고, 그럼에도 다시금 그 일에 뛰어들며 엄마를 잃은 상처로 괴로워한다. 해미에게는 동생 ‘다미’가 있다. 다미는 원전 사고가 난 부산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쳤고, 언니 해미를 구하러 갔다가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끊임없이 해미를 원망한다.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갑자기 놀라운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20년 전 그날로 돌아가 엄마 ‘수아’를 살리는 것. 이들의 시간여행은 성공할 것인가. 과연 엄마와 해미, 다미는 상처 없는 삶을 다시 살게 될 것인가. 

『테세우스의 배』로 ‘2020 SF어워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경희 작가의 두 번째 장편 『그날, 그곳에서』는 타임리프 SF소설이다. 이경희 작가는 구상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작품을 쓰면서 이 이야기가 2014년 4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에 이경희 작가는 “제 마음 속에 자리잡은 후회나 공포, 슬픔 같은 것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라며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에 있는 이경희 작가를 이메일로 만났다. 



치유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필연적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다혜 작가님의 추천사 중 “애달팠다”라는 말에 많이 공감하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나요?  

이건 작가의 특권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썼기 때문에 애달픔을 느끼진 못했어요.(웃음) 오히려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세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고 힘든 곳인데 적어도 소설 속 주인공에게는 그 힘든 상황을 벗어날 능력이나 기회가 한 번쯤 주어지잖아요. 주인공 한 명에게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소망하는 바를 최대한 이뤄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 싶다, 치유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해미, 다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현실의 사람들까지도요.

『그날, 그곳에서』는 원전 사고로 엄마를 잃은 해미와 다미가 시간여행을 통해 엄마를 살리려는 이야기죠. 작품 구상은 어떻게, 언제 시작되었나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주관한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을 준비할 당시 전략적으로 세 가지 다른 아이디어의 작품을 준비했어요. 그 중 첫 번째는 공모전 당선작이자 저의 데뷔작이기도 한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예요. 이 단편은 전형적인 시간여행 플롯 위에 임진왜란, 구미호, 그리고 몇몇 역사적 인물들을 엮은 작품인데요. 검증된 이야기 구조를 활용하는 대신 소재를 남들과 최대한 차별화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두번째로 준비한 작품이 「루프 트립」이라는 제목의 단편인데요. 이 작품은 거꾸로 재난, 죽음, 가족, 타임머신 같은 안전하고 뻔한 소재를 사용하는 대신 플롯 구조를 극단적으로 꼬아본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정말 많이 반복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요. 주위에서 장편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루프 트립」을 장편으로 고쳐 쓴 작품이 바로 『그날, 그곳에서』예요.

단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군요? 독자로서는 장편이 된 덕분에 이야기를 충분히 만끽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조금 신기했던 점이 있는데요. 단편 버전에서는 이 이야기가 ‘구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조를 방해하는 이야기’였거든요. 그걸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대중적인 취향을 고려해 가족을 구조하는 이야기로 변경하게 됐어요. 그런데 ‘구조하는 이야기’로 시놉시스를 바꾸고 보니 이 작품이 2014년 4월의 어떤 사건을 강하게 은유하게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처음엔 특별한 의도 없이 구상했던 재난 상황과 스쿠버다이빙을 모티브로 한 시간여행 설정들이 갑자기 그때의 사건과 밀접한 장치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설정을 전부 뜯어 고칠까 생각한 적도 많았고요.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저 스스로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각색 과정들을 거쳐온 것은 아닐까 하고요. 제 마음 속에 자리잡은 후회나 공포, 슬픔 같은 것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그 후론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공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제 나름의 답을 완성하기 위해서요. 부족하지만 나름의 결과물로 완성된 작품이 『그날, 그곳에서』 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 

해미와 다미 자매, 그리고 엄마 수아까지. 인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모두 ‘서로를 살리기 위해서’예요.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선택을 해서라도 구하고 싶어 하는데요. 이러한 마음에 집중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대형 재난 사건의 유가족 인터뷰를 많이 읽었어요. 거기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 중 하나가 그런 정서를 담은 말들이었고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에 뛰어드는 인물의 내면을 상상했을 때 이외에 다른 감정의 방향을 떠올리기가 어려웠어요. 

“중요한 건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것”(377쪽)이라는 대사가 등장하죠. 작가님의 가장 큰 메시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생각인지 좀 더 들려주세요. 

시간여행 픽션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과거를 바꾸는 일을 대리 체험할 수 있어요. 그걸 목적으로 삼는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고요.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는 다루고 있는 소재의 특성상 독자가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몇 배의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았어요. 소설 속에서 아무리 과거를 바꾸는 데 성공한들 우리 현실은 그대로니까요. 현실의 우리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상처를 안고 현재를 살아내는 것뿐이에요. 사실 치유라는 말도 어느정도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온전히 치유되는 상처라는 건 없고, 적당히 수습해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고작인 것 같아요. 그마저도 주위 많은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만 겨우 가능하고요.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지도가 나오죠. ‘작가의 말’에서 이곳이 모두 실재하는 장소인 것을 밝혔는데요. 구체적인 현장을 독자에게 보여준 이유가 있나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전 반경 30km가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해요. 지금도 출입 불가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고요. 저는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데요. 기장에 있는 원전에서 직선 거리를 재보면 저희 집이 딱 30km가 나와요. 저 역시도 안전하지 못한 거죠. 고리 원전, 월성 원전, 한빛 원전이라고만 하면 사람들은 그게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요. 원전이 생각보다 정말 가까이에 있고,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만약 COVID-19가 아니었다면 직접 소설 속 공간을 걸으며 진행하는 다크 투어리즘 북토크 같은 걸 해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워요.(웃음)

안전가옥은 특별히 작가와 PD가 협업해서 이야기를 개발하잖아요. 이번 작품에서 PD의 의견으로 처음 구상과 바뀐 대목도 있나요? 

스포일러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초반부에서 주인공이 테스트를 받는 장면은 PD님의 제안으로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어요. 덕분에 더 긴장감 있고 재미있는 장면이 됐어요. 어떻게 보면 사소한 수정일 수도 있는데 그로 인해서 동생 다미의 존재감이 굉장히 커질 수 있었고요. 전체 작품이 해미 원톱의 이야기가 아닌 자매의 이야기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작품 속에는 붕괴, 지진, 원전 사고 등 각종 재난이 등장하는데요. 재난을 다룰 때 세운 규칙이 있었다고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정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나 민감한 주제이고, 쉽지 않은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쓰는 내내 한 줄 한 줄을 조심해야 했어요.



언젠가 그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쓰면서 작가님이 가장 고민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서 답해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OOO이 OOO의 문자를 받고 호텔에서 기다리게 되는데 이 장면에 대한 인물들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결정하는 부분이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문장이잖아요. 좀 엉뚱할 수도 있는데 제 눈물 버튼 중 하나가 청개구리 이야기거든요. 평소에는 엄마 말을 뭐든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가 무덤을 물가에 세우라는 말만 곧이곧대로 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말하자면 OOO이 약간 그런 캐릭터예요. 그래서 슬프고요.

작가님은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라는 에세이도 쓰셨지만 질문 드리자면, SF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에세이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보통 소설에서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다.’ 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면 그건 대개 은유이거나, 내면을 묘사하는 표현일 거예요. 하지만 SF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을 수 있어요. SF에는 세계를 파괴할 힘과 재생할 힘이 있어요. 물론 판타지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것은 가능해요. 하지만 SF는 판타지보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장르이고, 그렇게 거짓말을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게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와 작품이 무엇인지도 소개해주세요. 

이서영 작가님의 『유미의 연인』에 수록된 단편 「센서티브」와 『악어의 맛』에 수록된 「노병들」을 정말 좋아해요. 작품 속에 깊게 자리잡은 정서와 힘을 사랑합니다. 『악어의 맛』 후기에 ‘세상을 총체적으로 사랑하려 했다’는 표현이 나와요. 세상의 좋은 면과 나쁜 면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시선. 언젠가 저도 꼭 그런 경지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요.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작가님은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기왕이면 미래로 가고 싶어요. 더디지만 인류는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적어도 지금보단 예의 바르고 어른스러운 존재가 되어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아니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겠죠?  

마지막으로 어떤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었으면 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아무래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다만 이 작품을 읽는게 상처를 상기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분들을 잘 피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이경희

환상문학웹진 거울 필진.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가 황금가지 제4회 타임리프 공모전에 당선되어 데뷔하였고,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으로 황금가지 제6회 작가프로젝트 공모전, 「χ Cred/t」로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을 수상했다. SF와 판타지 양쪽에서 활동 중이며, 대표작으로는 『테세우스의 배』,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마음 여린 땅꾼과 산에 깔린 이무기 설화」 등이 있다. 그는 SF와 판타지의 팬보이로 10대를 보내며 오랜 세월을 방황한 끝에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1980~1990년대 걸작 애니메이션과 만화들, <스타트렉> 에피소드들, 톨킨과 이영도, 르 귄과 젤라즈니, 알프레드 베스터와 코드웨이너 스미스, 듀나, 배명훈, 곽재식, 김보영, 이서영 등 위대한 장르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자신만의 샛길을 발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이 SF 불모지라는 음모론이 들불처럼 일어나 한국 SF를 집어삼킬 대위기에 처하자 그는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SF 불모론자들의 목을 꺾….



그날, 그곳에서
그날, 그곳에서
이경희 저
안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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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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