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영장류로 조명한 인간의 자유 의지 『진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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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온 뒤로 독자 만나고 인터뷰하는 걸 좋아해요. 나중에 힘이 떨어졌을 때, 하고 싶다는 욕망이 떨어졌을 때 하나씩 빼먹는 제 곶감이에요. (2019.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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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앞두고 있던 사육사 진이는 사육장 바깥에 있던 보노보 지니를 구조하다 불가사의한 사고로 지니의 몸에 들어가게 된다. 진이는 영상을 보듯 지니의 과거로 빨려 들어가고, 빨리 자신의 몸을 되찾지 않으면 보노보 지니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아버지에게 내쫓긴 채 삶의 의미도 희망도 없이 떠돌던 민주는 우연히 보노보의 몸을 입은 진이를 도와 상황을 돌려놓기 위해 애쓴다.


간호사로 일하던 당시, 정유정 작가가 근무하던 중환자실에 어머니가 내려왔다. 죽음을 맞기까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었던 사흘의 기억이 29년이 지난 어느 날 작가에게 다시 찾아왔다.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 인간의 자유의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이야기는 이 기억에서 출발했다.

 
정유정의 이번 소설은 ‘따스하고 다정하다’. 기존 ‘악의 3부작’이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탐사했다면,  『진이, 지니』  는 인간과 영장류의 교감을 통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 독자를 끌고 갈 임무가 있다’라는 작가의 말은 그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노련한 이야기꾼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주의 : 소설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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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자료 조사 끝에 나온 소설


광주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책 나오고 프로모션하기 시작하면 서울에 올라와서 2, 3개월은 독자와 만나고 인터뷰해요. 그 뒤에는 다음 소설을 쓰러 다시 들어가죠.

 

띠지에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하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심플한 말인데 좋지 않나요? 제가 냉혈한이랑 악당을 다루는 소설을 쓰다 보니 작가도 등장인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요새는 어딜 가나 자기소개해달라고 하면 ‘다정한 그녀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정 콘셉트’를 밀고 있어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있던 3일간의 경험이 이번 소설의 토대가 되었다고요.


어머니가 중환자실과 입원실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시다가, 마지막 사흘 동안은 반사 작용이 없었어요. 연명 처치를 안 하겠다고 했어요. 어떤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죠. 아무런 미동이 없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많이 생각했어요. 소설을 구상하던 새벽에도 엄마를 생각하다, 제가 만약 그 순간에 가 있고 신이 죽기 전에 사흘의 시간을 준다면 어디로 갈까 생각했어요.


어딜 가고 싶으셨어요?


당시에도 인류학과 동물학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유인원이나 원숭이, 인간으로 분화하기 전 원형 영장류 조상이 살았던 시절에 가 보고 싶었어요. 이 하찮은 생물이 뭘 하고 다녔기에 이렇게 출세해서 지구를 지배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친구들을 지금 현실로 불러오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침팬지를 지금 현실로 불러오는 상상에까지 미쳤어요.


하지만 소설에는 침팬지가 아니라 보노보가 등장했어요.


막상 자료 조사를 하니까 침팬지 종의 특징이 인간 여자하고는 전혀 안 맞는 거예요. 권력 지향적이고 서열 사회인 데다 수컷끼리 친하고 암컷의 지위가 낮아요. 주인공인 사육사가 여자인데 침팬지는 아니다 싶었어요. 영장류 관련 책을 읽다 보니 보노보가 나왔어요. 보노보는 인간에게 발견된 지 100년밖에 안 됐대요. 암컷 중심의 모계 사회고 감성 지수가 발달해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데 능해요. 상대를 이용할 줄도 알고 심리전도 펼 줄 알고, 싸움보다는 연대에 능한 사회를 이루더라고요. 보노보와 진이를 묶으니 그제야 이야기가 제대로 나왔어요.


보노보가 발견된 지 100년 안 된 걸 저는 처음 알았어요. 모르는 것들을 소설에 넣으려면 그 용기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오래 걸리죠. ‘누가 이걸 알아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모르는 걸 써도 될까 하는 불안함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일단 우리나라에 나온 책을 다 읽고 서울대공원의 침팬지 전문 사육사인 우경미 사육사를 찾아갔어요. 침팬지 사육사들이 먹이를 꽂아서 낚싯대로 침팬지들을 유혹한다고 하더라고요. 침팬지가 잘 삐지는 성격이라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 땡깡을 많이 쓴대요. 그만큼 똑똑한데,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더 말을 잘 알아들어요. 표정과 말투,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사육사님께 많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답답했죠. 어디서 보노보를 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최재천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는데, 뜻밖에도 제 책을 좋아하셔서 다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 보노보 박사 1호인 유흥진 박사님을 소개받아서 왐바의 밀렵꾼 이야기와 보노보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이야기,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물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등을 듣고 김혜나 박사님과 도쿄 영장류센터로 갔죠. 거기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영장류 학자와 배우는 시간을 가지고 직접 실험에도 참여했어요.  『28』  때도 그렇고 나름대로는 동물을 대하는 자세가 어느 정도는 정립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에서 정말 개안을 했어요. 이제까지 제가 동물 감수성이 너무 없었던 거예요.


어떤 계기로 깨달았나요?


침팬지는 어쩌면 인간보다 영리할지도 몰라요. 눈만 나와 있는 멸균복을 보고도 낯선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특유의 과시 행동을 하더라고요. 강화유리벽을 주먹으로 치는데 실험실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흥분한 채 실험을 하지 않는데, 박사님들이 달래지도 않고 종일 앉아서 그들이 원해서 행동하길 기다려요. 성나있는데 달래서 실험하면 침팬지들을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대요. 그걸 보면서 동물을 대하는 타당한 자세를 많이 배웠죠.


일본 구마모토의 보노보 생추어리에도 다녀오셨죠?


거기서 보노보를 처음 봤어요.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더 예뻐요. 가운데 가르마 머리에 입술이 빨개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와서 사람의 동공에 초점을 맞추고 눈을 들여다봐요. ‘너 누구야’ 묻는 것처럼 들여다보더라고요. 보자마자 반하게 됐어요.


지니의 눈을 통해 진이가 무의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그 경험에서 나왔군요?


맞아요. 눈이 제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할까.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동공의 중심을 맞춰서 쳐다보더라고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어요. 과시 행동을 안 한다는 말은 책을 통해 배웠지만 진짜 그 정도로 다가와서 쳐다볼 줄은 몰랐거든요. 보노보가 침팬지에서 분화한 게 300만 년 전이라고 해요. 2,200만 년 전에 원숭이와 영장류가 분화했다면, 800만 년 전에는 인간, 맨 마지막으로 분화한 게 침팬지와 보노보예요. 학자들은 보노보가 분화하기 이전 원형 종과 가장 가까운 외모와 성격을 가졌다고 보더라고요.


이렇게 술술 나올 정도면 자료 조사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소설 준비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이렇게 많이 준비하니까, 정말 소설을 잘 쓸 것 같거든요.(웃음) 자료 조사할 때는 이것도 쓰고 저것도 써야겠다는 야망이 넘치지만 엄청난 소설을 쓰겠다 싶어 앉으면 금세 쪼그라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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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람들


전 작품이 ‘악의 3부작’으로 묶인다면, 여기에서는 등장인물이 다 선해 보여요.


『진이, 지니』  에 나온 인물은 엄밀히 말하면 성숙한 사람들이에요. 여주인공은 특히 선악을 초월해서 성숙한 인격체여서 한 번은 다루는 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장소설으로 읽히기도 했어요.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나  『내 심장을 쏴라!』  도 성장소설이었죠. 첫 번째는 열다섯 살 소년소녀들이 자유의지가 싹트는 걸 다룬 로드픽션이고,  『내 심장을 쏴라!』  는 정신병원에 갇힌 스물다섯 살이 주인공, 『진이, 지니』  는 서른 다섯 살 여성이 죽음 앞에서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구현하는 이야기에요. 인간이 과연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를 다루려다보니까 성숙한 인격체가 필요했어요. 민주는 미성숙하고 알을 덜 깬 상태에서 진이를 만나 성숙해지는, 삶의 의미를 깨닫는 주체예요. 한심한 캐릭터지만 소설 안에서 성숙해지는 캐릭터를 좋아해요.


실제 생활에서도 미성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나요?


그런 캐릭터가 잘 맞아요. 저도 허술한 데가 많아서 특히 젊은 친구들을 보면 나이를 떠나서 동질감을 느껴요.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는데, 제 밑으로 동생이 셋 있어서 엄마 노릇을 해야 했어요. 그때는 친구들이랑 커피 한 잔도 못 마시는 삶이었죠. ‘내 인생을 도대체 언제 사나, 빨리 내 앞에 빛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래서 지금 그런 처지에 있는 친구들,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냉정한 말이지만 견디라는 말밖에는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책을 쓰면서 민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왜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선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방조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받는데, 나쁜 사람들은 잘 살고 있다는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러니 악인이 많아지면 이 세상이 버텨 낼 수 없고 인간이 멸종할 수밖에 없는 거죠. 악인들이 다 잡아먹을 테니까요. 저도 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지만 악을 억누르고 사는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을 살게 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외로 선한 사람이 99명이면 악한 사람은 1명밖에 없어요. 저는 그 99명을 선하다기보다 보편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사람은 남한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칠 때 느끼는 죄책감이 당연히 있을 거예요. 타인을 배려하고 연민하는 마음이 사실 공감을 가져오는 거거든요. 공감이 바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지점이고, 공존을 모색하고 공감하고 연민하는 게 인간의 자질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존엄한 재능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이런 공감 능력이 없고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고 번성할 수 있었을까요?


『28』  에서는 구제역 당시 돼지들을 보고 모티프를 얻으셨다고 했는데, 인간을 향한 관심이 동물로도 넓어지고 있나요?


생명체 자체도 넓혀지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을 더 알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관심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는 거죠. 그리고 문학이 하는 일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물을 통해 인간을 조명해 보기도 하고, 인간을 통해 동물을 조명해 보기도 하고요.


정여울 평론가는 민주의 ‘세상을 소리로 읽는 재능’을 민주의 능력을 ‘소통의 희망’이라고 표현했어요.


우리가 친구들과 같이 앉아 있으면 남의 말을 백 퍼센트 듣는 사람은 열 명 중에 두 명일 거예요. 다 고개 끄덕이고 딴짓 하거나 자기 할 말만 하거든요. 누군가 고통스러워할 때 누군가 그 말에 진짜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민주한테 그런 재능을 부여했어요.


예전에 감정을 색채로 보는 능력을 쓰려고 하셨죠?


맞아요. 『종의 기원』  에서 주인공에게 쓰려고 했죠. 민주가 비슷한 능력을 가진 거죠. 남들은 별 능력이라고 생각 안하는 능력을 가져다가 큰 역할을 맡기는 걸 좋아해요.


히어로물 써볼 생각은 없으세요?


저는 히어로물이 재미 없더라고요. 거대한 히어로물은 그 인물이 변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선택받은 선한 자이자 능력자가 마지막에 가서도 결국 선한 일을 하고 끝나잖아요. 선함에서 선함으로 가는 거죠. 변화해가면서 넓은 폭을 보여주는 게 소설적 인물이고, 소설가는 그런 인물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민주가 다른 소설에서 또 나오게 될까요?


『28』  의 한기준이 여기서 다시 나오는데, 독자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김용이 다시 나올 때도 좋아하시고요. 전 소설에서 나왔던 인물이 다시 나오는 게 독자들에게 주는 서비스 같아요. 한기준도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독자들이 많아서 자기 일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넣었어요. 그리고 저도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공력이 덜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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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임무


죽음과 삶을 다루려면 이야기도 무거울 것 같은데, 의외로 웃긴 부분이 있어요.


이야기하는 주제는 작가가 정하는 거고 독자의 눈치를 보면 안 돼요. 대신 쓸 때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해요. 죽음을 다룬다고 비장해지면 누가 읽어 줄까 싶더라고요. 계속 얹어서 무겁게 가야 하는 소설이 있다면, 어떤 소설은 계속 빼면서 가벼운 무게를 유지해야 해요.  『진이, 지니』 를 쓰면서 독자들이 헛웃음을 좀 터뜨리게 해야겠다 싶어서 문장도 신경 썼어요. 12장 절정 부분에 가야지만 소설의 주제가 나오기 때문에, 저는 거기까지 독자를 끌고 갈 임무가 있어요. 끌고 가려면 별짓을 다 해 유혹해야 하죠.


파인애플이네요(웃음). 농수산상품권 부분도 웃겼어요.

 

남편도 그 부분을 그렇게 웃더라고요. 그 부분은 사실 웃기려고 쓴 게 아니었거든요. 스쿠터를 빌려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게 상품권밖에 없잖아요. 민주도 진지하고 저도 진지했어요.


남편분이 소설을 쓰는 동안 읽고 조언해주나요?


초고를 일단 공책에다 쓰고 컴퓨터에 옮겨요. 그걸 남편한테 먼저 보여주죠. 남편은 소설을 즐기는 일반 대중 입장이라 제가 새겨들을 일이 많아요. 끝내고 보여줬더니 남편의 인상이 어둡더라고요. 속으로 벌벌 떨면서 재미없냐고 물어보니까 이건 아닌 것 같대요. 그동안 소설을 쓰면서 절정 부분에서 폭발할 때가 많았어요. 감정, 액션, 모든 게 깨지는 게 절정이었거든요. 그래서  『진이, 지니』  도 스쿠터랑 119 자동차 추격 신을 넣었더니 남편이 마지막에서는 자기 생을 돌아봐야 하는 장인데 액션이 나오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신경질이 나더라고요. 다 써놨는데! 하지만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종일 생각하니까 그 말이 맞더라고요. 그래서 한 3주는 폐인으로 살았어요. 안 써지니까 매일 술 먹고 남편 욕을 있는 대로 하는(웃음) 그 시간이 지나서야 힌트를 잡았어요. 12장에서 화자의 인칭이 전복되는 시점이 있어요. 진이가 자신이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공감의 순간을 ‘나’라는 호칭으로 만든 거죠. 그럼으로써 진이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죽음 앞에서의 선택을 타당하게 만드는 이유를 찾아내는 걸 써서 남편한테 보여줬어요.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눈이 빨개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목멘 소리로 말해서 제가 원하는 반응이 나왔다 싶었죠.


소설에 큰 기여를 하셨네요.


지금까지 생색내요. “내가 일좀 했지?” 이러는 거예요. 그럼 또 신경질이 나요. 고마운 마음보다 다 썼는데 마지막에 마음고생 시킨 게 먼저 생각나서요. (웃음)


노래를 들으면서 소설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민주가 부르는 노래를 찾아보니 클리프 리차드의 ‘early in the morning’이에요.


민주가 이른 아침에 떠나잖아요. 구글에 ‘이른 아침에 떠난다’를 검색했더니 그 곡이 뜨더라고요. 쓰기 시작할 때부터 퇴고할 때까지 들었어요. 경쾌한 것 같지만 슬픈 노래예요. 조수미 씨의 ‘나 가거든’도 많이 듣고요.


다 가는 노래네요?


돌아오지 않고 떠나는 소설이라서요.

 

 

독자가 나의 에너지


전작의 줄거리를 보면 한 작품에서 다루는 시간이 짧은 편이에요.  『종의 기원』  도 유진이 눈을 뜬 이후부터 사흘간 벌어진 일을 다뤘어요.


시공간을 최소화하는 게 원칙이에요. 시간도 최소한, 공간도 최소한으로 하는 걸 선호해요. 『28』 은 한 도시를 다루는데, 저한테는 그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었어요. 이야기를 담을 수 있되 빠듯하게 꽉 차서 들어가는 공간이죠. 공간이 너무 크면 작가가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요. 그렇게 해도 공간을 다 장악하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더 짧아지면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3박 4일을 좋아해요. 삼각형이 가장 안정적인 도형이라고 하잖아요. 소설 플롯도 삼각형이 제일 편해요. 첫째 날 시작, 둘째 날 전개, 셋째 날 절정, 넷째 날은 에필로그가 되는 식이죠. 4박 5일로 쓰면 이야기가 변주되고 증폭될 뿐이지 같은 성격인 거예요. 3일로 설정하면 독자가 생각지 못하게 이야기가 분절돼요.


바다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다  『진이, 지니』 를 쓰는 걸로 뒤집어졌다고요.


바다가 바다인 동시에 죽음인 시간인 SF 판타지적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크루즈가 죽음의 시간에 갇힌 소설을 쓰려고 해양학, 지질학, 천재지변 등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자료조사를 6개월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시간에 대한 개념이 서야 하니까 양자 물리학 책이 남았는데,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요,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거예요. 이걸 읽고도 기초적인 개념이 안 선다면 시간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책을 폈는데, 거기서 러셀의 말이 나온 거죠.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버트런드 러셀

 

거기서 딱 걸린 거죠, 넘어진 김에 돈을 줍는다고, 소설을 주웠어요. (웃음)

 

그 소설도 나중에 나오게 될까요?


일단 파일을 열어봐야 해요. 다시 공부한다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요. 2년 정도 견딜 욕망이 느껴지면 쓰는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버려야죠. 신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야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2, 3년 주기로 꾸준히 쓰고 계신데, 다음 작품은 2년 혹은 3년 후 만나게 되겠네요.


다작을 하고 싶어요. 2년에서 2년 반까지만 하고 3년까지는 안 가고 싶어요. 독자들이 3년째 되니까 책 안내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이번에는 해외 판권이 팔리면서 출장이 많아서 어쩔수 없었어요. 작년 해외 행사가 7번 정도 있어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썼죠. 내년에는 영미권에서  『7년의 밤』  이 나와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3년을 끌면 안 될 것 같아요.


인기가 많아질수록 행사도 많아지고, 소설을 쓰기 더 힘들어지지 않나요?


그래도 독자들을 만나는 게 좋아요. 강연하면 눈이 반짝반짝해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저런 게 좋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혼자 외롭게 소설을 쓸 때면 독자들이 위로가 돼요. 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깽판치고 세월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거죠. 손 편지도 많이 받아서 울고 싶은 날이면 편지를 읽으면서 울어요. 그럼 다음날이면 또 책상 앞에 앉을 용기가 나요. 그래서 책 나온 뒤로 독자 만나고 인터뷰하는 걸 좋아해요. 나중에 힘이 떨어졌을 때, 하고 싶다는 욕망이 떨어졌을 때 하나씩 빼먹는 제 곶감이에요.
 


 

 

진이, 지니정유정 저 | 은행나무
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간다움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삶의 희망으로 치환하는지를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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