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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독서는 원래 산만한 거예요”

‘그림 속 저 책은 무슨 책일까?’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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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 속 인물은 어떤 상태이고 왜 여기에 있을까, 그럼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도대체 뭘까’ 하는 상상을 하고, 상상의 근거를 찾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어요. (2019.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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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이 읽는 책을 엿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의 표지가 빼꼼히 삐져나온 가방의 한 귀퉁이를 보거나, 친구에게 빌린 책에서 밑줄 친 문장을 발견할 때면 왠지 그 사람과 내가 흠뻑 가까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출판평론가이자 2만여 권의 책을 소유한 ‘탐서주의자’ 표정훈 작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명화 속 인물들이 읽고 있는 책에 호기심을 품은 것이다.

 

그는 책이 등장하는 그림을 보며 늘 ‘그림 속 저 책은 무슨 책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고 한다.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상상은 그림이 그려진 역사와 화가의 삶을 관통하며 책을 추정해나간다. 빈틈 없는 근거로 묘한 설득력을 지니는 표정훈 작가의 상상을 통해 책의 정체가 드러나면, 그림은 어느새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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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들어있는 책 이야기


단독 저서로는 6년만의 신작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다른 작가들 책의 서평 쓰고, 칼럼 쓰고, 방송에서 책 소개하면서 출판평론가라는 직함으로 계속 활동하며 지냈어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을 출간한 뒤에도 많은 분들이 여전히 ‘출판평론가 표정훈’이라고 소개를 해주시는데, 이제는 작가로 불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웃음). 부끄럽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작가 표정훈으로 기억되었으면 해요.

 

3년 전, 담당 편집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필이 시작된 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림 속 저 책은 무슨 책일까?’라는 궁금증을 파헤쳐가는 기획이 흥미롭더라고요.


2000년대 초중반에 <중앙일보>에 ‘그림 속 책’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원고지 2.5매 분량의 아주 짧은 칼럼을 20회 정도 연재했는데, 그 칼럼의 주제가 이 책의 기획이 되었어요. 책이 등장하는 그림이 굉장히 많은데 그 안에 있는 책이 과연 무엇일까 상상하는 내용의 칼럼이었거든요. 그때부터 이런 책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3년 전, 편집자님을 만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냈고 당시 썼던 칼럼을 보여드렸더니 흔쾌히 한번 해보자고 하셔서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죠.

 

초고는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다고요.


제 성향과 취향대로 샘플 원고를 써서 편집자님께 보여드렸는데 좀 더 쉽고 편안하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더 많이 담아서 다시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책에 지식을 많이 담으려고 하는 강박이 있나 봐요. 쓰고 나니 역사교양서가 되어버린 거예요(웃음). 처음에는 제 생각과 개성을 담아 쓰는 게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편해지더라고요. 이 책은 쉽고 편하게 독자에게 말을 걸 듯 쓴 첫 번째 책이라 제게 더 의미가 있어요. 그동안은 제 글쓰기의 눈높이가 독자보다 위에 있었던 것 같아요. 자꾸 무언가를 가르쳐주려고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서 같은 눈높이에서 독자와 공감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죠. 역시 좋은 편집자를 만나면 책이 더 새롭게 나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작가 소개에서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기, 이야기에서 그림을 상상하기’가 오랜 취미라고 했어요.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외의 유명 미술관을 자주 가고 했던 것은 아니고요. 미술책을 보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아요. 제가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보니, 많이 버리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미술책은 버리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왠지 미술 관련 책을 버리면 책만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그림도 버리는 것 같아서 아까워요(웃음). 그래서 미술책을 보며 다양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이 화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 속 인물은 어떤 상태이고 왜 여기에 있을까, 그럼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도대체 뭘까’ 하는 상상을 하고 근거를 찾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어요.

 

 

상상의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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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들레르의 초상>, 귀스타브 쿠르베, 1847년경, 캔버스에 유채
              53x61cm, 프랑스 파브르미술관

 

 

집필 과정이 궁금해요. 그저 그림을 보고 어떤 책일지 상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림이 그려진 시대, 화가의 사연, 당대 출판문화 등의 정보가 가지처럼 뻗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단순한 상상이라기 보다는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지역을 찾아요. 그리고 그 시기 즈음에 화제가 되었거나 많이 읽혔던 책들을 추리고, 그 책이 그림 속에서 묘사될만한 연결고리는 무엇이 있을까 찾아보는 과정이 이루어졌어요. 그 연결고리는 화가의 삶, 그림 속 인물의 삶 등이 힌트가 될 수 있어요. 그러한 단서들을 모아서 하나의 상상을 완성해나가는 작업이었죠.


책에 나오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보들레르의 초상’의 경우를 예로 들면 먼저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각 인물들의 사연을 찾아요. 그 과정에서 쿠르베가 보드레르와 친하게 지냈고, 보들레르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쿠르베의 화실을 도피처로 삼았단 기록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림의 배경을 쿠르베의 화실일 거라고 추정했죠. 그런데 그 연도 즈음에 보들레르가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돼 1860년대 중반까지 그의 작품을 번역했다는 자료가 있는 거예요. 그럼 그림 속에서 보들레르가 보고 있는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 중 한 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웃음).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 하녀.jpg

                                           <하녀>,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 1910년, 캔버스에 유채
                                              75.6x64cm, 미국 워싱턴국립미술관

 

 

‘갈 수 없는 나라(110쪽)’에서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그림 속 하녀가 읽고 있는 책이 조선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정이 재미있더라고요. 이 작품에서는 그림 속 소품이 상상의 힌트가 되었던 건가요?


맞아요. 그림 속에 청화백자, 기모노를 입은 여인, 도자기 등 동아시아의 물건들이 놓여 있잖아요. 또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이 보스턴에 살던 화가이고, 하녀가 있다는 건 무척 부유한 집일 거라는 게 또 다른 단서였죠. 그래서 ‘동아시아에 대한 책이 아닐까’라고 가정했어요. 여기까지 오면 이제 어떤 책인지 확정하는 것이 문제인데, 조선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일 거라 쓴 건 완전한 상상이었어요(웃음). 예전에 읽었던 책이었는데 빨래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었거든요. 빨래는 하녀에게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고 힘든 일 중 하나잖아요. 그래서 그 책과 그림을 연결 지어 보았습니다. 단서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쓰면서도 참 기분이 좋았어요.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이네요. 맞아떨어지는 단서들을 찾을 때마다 쾌감이 엄청났겠어요.


처음 그림을 볼 땐 참 막연하고 막막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단서를 찾고, 힌트를 얻어 자료를 추적해나가다 보면 ‘혹시 이런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의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렇게 심증으로 굳어지다가 ’맞아 이걸 거야‘라고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확정하게 되면 쾌감이 느껴지죠. 아무리 상상을 바탕으로 했다고 할지라도 근거가 있어야 설득력이 생기니까요. 책을 쓰면서 친분 있는 미술사 선생님께 이런 기획으로 집필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저를 격려하시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책을 쓰지 못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학자의 입장에서는 확증이 되지 않은 내용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글을 써내려갔습니다(웃음).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상으로 이야기를 추정해볼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요.

 

총 38점의 그림이 실렸는데요. 선정 기준이 무엇인가요?


책이 등장하는 그림들 중, 책과 그림을 가장 그럴듯하게 연결 지을 수 있는 것 위주로 선정을 했어요. 이야기가 풍부한 그림, 화가의 사연이나 그림 속 인물의 사연이 깊이 와닿아서 전할 내용이 많은 것들이요.

 

2부 ‘그녀만의 방’을 한 파트로 여성의 이야기를 따로 구성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책이 등장하거나 독서 장면을 묘사한 그림 중, 여성이 책을 읽는 풍경을 그린 게 굉장히 많아요. 인류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문자를 해독하고 스스로 창작을 하게 된 역사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잖아요. 글쓰기와 책 읽기에도 위계가 있었던 거죠. 남성, 귀족, 부유한 사람, 지식인만이 글을 쓰고 책을 읽었고, 여성에게는 그게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는데 근대 이후, 이러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면서 여성이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죠. 그래서 아예 한 파트를 할애해 여성의 이야기를 다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상의 시작은 ‘그림 속 저 책은 어떤 책일까?’라는 궁금증이었는데요. 왜 그림 속에 등장하는 책은 명확히 어떤 책인지 알아볼 수 있게 그려진 게 드문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에 실린 그림에서도 책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반 고흐의 ‘석고상, 장미꽃, 소설 두 권이 있는 정물’뿐이라는 게 흥미롭더라고요.


맞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화가들은 책이라는 텍스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림도 텍스트라고 생각하거든요. 화가는 기본적으로 이미지라는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책 또한 자신의 작품을 이루는 이미지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겠죠. 반면 저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미지 텍스트에 있는 문자 텍스트를 궁금해 하는 사람인 거고요(웃음).

 

 

존 프레더릭 피토- 버려진 귀중한 것들.jpg

            <버려진 귀중한 것들>, 존 프레더릭 피토, 1904년경, 캔버스에 유채
              55.88x101.6cm, 미국 스미스칼리지 미술관

 

 

도무지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림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에 실린 그림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존 프레더릭 피토’의 ‘버려진 귀중한 것들’이에요. 책이 워낙 여러 권 그려져 있어서 보는 순간 무슨 책들일지 상상하기가 어려웠어요. 물론 시기를 추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억지스러울 것 같아서 포기했어요. 이 그림은 제가 아는 한 책을 묘사한 그림 중, 책이 가장 다양하게 그려진 그림일 거예요. 또 제목이 ‘버려진 귀중한 것들’이잖아요. 좀 서글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책은 언젠가 결국 버려지거든요. 그런 책의 운명을 나타낸 거 같아서 너무 좋았는데, 막상 이야기를 구성하려니 막막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책들인지 확정하는 것은 포기하고 대신 책의 최종 운명에 관한 내용을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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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벌레>, 카를 슈피츠베크, 1850년, 캔버스에 유채
                                        49.5x26.8cm, 독일 게오르크샤퍼박물관

 


글을 쓰고 나서 더 좋아진 그림이 있다면요?


카를 슈피츠베크의 ‘책벌레’라는 작품이요. 전부터 좋아하긴 했는데 글을 쓰면서 그림 속 노인에게 너무 빠져들게 됐어요. 이 그림은 사실 슈피츠베크가 노인을 조롱하는 의미로 그린 거예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세상과 담을 쌓고 전통적인 이야기나 책에만 빠져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작품이었는데, 노인의 입장에서 상상하다 보니 그림이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노인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을 읽으며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부러웠어요. 지금은 이 그림을 보면서 ‘저 노인 되게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작가님에게 책과 그림은 각각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은 즐거움이고요. 책은 진지함이에요. 이렇게 나누어 이야기하면 그림을 더 좋아하는 거라고 느껴지실 텐데,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만약 누가 제게 “그림과 소설 중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소설을 선택할 거예요. 왜냐면 그림은 화집이나 이미지 파일로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원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원화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잖아요. 하지만 소설은 언제 어디서든 책을 펼쳐 볼 수 있죠.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제게 책은 넷플릭스고 그림은 오직 영화관에서만 봐야 하는 영상 같은 느낌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책이나 소설을 택하겠지만 내심 속으로는 그림을 보는 것이 더 즐겁죠(웃음). 그림은 나에게 다가오는 반면, 책은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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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더 다가가는 책 읽기


2만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계시다고요. 작가님도 분명 읽지 않은 채 가지고만 있는 책이 있겠죠(웃음)?


엄청나게 많죠(웃음). 그래서 저는 책을 ‘본다’와 ‘읽다’를 구분해요. 표지를 보고, 서문과 목차 정도를 읽었으면 책을 본 거고요, 내용 중 3분의 1 정도 봤다면 읽은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책을 읽는다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걸 떠올리잖아요. 물론 그게 기본이긴 하지만, 세상에 있는 수많은 책 중 그렇게 모든 내용을 정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결국 책은 보는 게 중요한 거죠.

 

‘독서 가운데 뜻밖에 보람과 유익이 큰 독서는 바로 ’표지 독서‘다(31쪽)’라는 문구가 생각나네요. 이 부분에서 위안을 느꼈다는 독자들이 많더라고요.


표지에는 제목, 저자 정보, 출판사 등이 쓰여 있고 책의 뒷 표지에는 간단하게나마 그 책의 내용이 인상적으로 소개돼 있어요. 저는 이것만 읽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면 ‘책등 독서’가 있는데요. 서가 앞에 서서 꽂혀있는 책의 등을 쓱 한번 읽어보는 거예요. 꼼꼼하게 한 권을 다 읽는 건 그저 독서의 한 부분일 뿐이니까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한 말 중에 ‘책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건 어려울지라도, 책과 가벼운 인사 정도는 반드시 하고 지낼 일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독서에서는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책과 만나서 친숙해지고 인연이 생기면 그 다음엔 깊이 들어가 볼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독서 관련 강연을 하러 가면 많은 분이 “저는 책을 꼼꼼히 읽기가 힘든데 독서력이 떨어지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하세요. 그러면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 독서는 원래 산만한 거다”라고 대답하거든요. 책을 읽을 땐 누구나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앞부분이 무슨 내용이었지?’라며 되돌아가 읽어보기도 하는 등 뇌를 계속 움직여요. 저는 독자는 ‘주의 깊은 독자’가 아니라 ‘산만한 독자’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인가요?


재즈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이 한 인터뷰에서 “어떤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대요. “내가 들어서 좋은 음악이 좋아하는 음악입니다.” 책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지금 나의 상황에 꼭 맞는 책, 지금의 나에게 좋은 책이 결국 좋은 책 아닐까요. 그러니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지나 상황, 목표 등에 따라 매번 좋은 책의 조건은 달라지겠죠. 그렇게 보면 선물 중에 가장 안 좋은 게 책이에요. 아무리 상대방의 생각과 처지를 아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을 100% 알아차릴 순 없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가장 좋은 선물도 책일 수 있어요. 선물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친한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할 때, 포스트잇에 사인을 하고 메시지를 써서 붙여드릴 때가 많아요. 제 책의 운명은 책을 받은 분께 달렸으니, 부담 없이 보시라는 뜻에서요(웃음).

 

책을 굉장히 많이 읽으시잖아요. 종이책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50세가 넘었기 때문에, 제가 종이책에 대해 가지는 감수성과 생각은 젊은 세대와 확연히 다를 거예요. 그래서 감히 예언이나 예측을 할 수는 없지만, 기대 섞인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종이책의 비중이 쉽게 줄어들거나 쇠락하진 않으리라 생각해요. 책은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책장을 넘길 때 소리가 나잖아요. 오감으로 읽는 거죠. 하지만 디지털 매체는 눈과 뇌로만 읽어요. 예를 들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카페에 앉아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하면, 우리는 단순히 책의 내용만 읽은 게 아니라 봄날, 그 카페에서의 추억을 갖게 돼요. 책의 이러한 물성에서 비롯되는 몸의 기억이 가지는 가치가 결코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책에는 그림에 대한 작가님의 상상을 뒷받침하는 역사, 예술사 등의 내용이 많이 녹아 있어서 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텐데요. 이 책을 좀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만한 힌트가 될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책을 읽어본 한 지인께서 “이 책은 쉬운 데 어렵기도 하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어떤 부분에선 어려운데, 그래서 어려운 책인가 싶으면 또 어떤 부분은 쉽게 풀리기도 한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정확하게 잘 봤다”고 했어요(웃음). 한걸음, 혹은 반걸음만 깊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림 속에 있는 이 책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해 이야기를 상상하고 글로 풀어낸 것은 제가 그림 속으로 한걸음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잖아요. 이건 그림이 저에게 다가온 게 아니라 제가 능동적으로 다가간 거죠. 이처럼 책 속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본다고 생각하면서 읽어주신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해요. 다만 다음에 또 책을 쓴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웃음).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이유가 있으세요?


출판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작가와 독자를 만나왔는데, 사람들은 책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은 수험서나 학습서, 학과 교재로도 충분하죠. 오히려 사람들은 독서를 통해 나에게 익숙한 것, 내가 그동안 느껴온 것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른 언어로 공감해주길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로 나를 가르치고, 배울 게 많은 책보다 저자와 공감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잖아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넬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의 책이길 바라나요?


이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 스스로 평가할 순 없지만 저는 다른 책을 찾아 읽게 만드는 책이라면 좋은 책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 좋은 책은 하이퍼링크라고 하잖아요. 책에 그물이 있는 거죠.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에 인용되고 소개된 책이 많은데, 그 책들을 한 번 읽어볼 수 있는 사다리가 되어도 좋겠고요. 꼭 제가 소개한 책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다른 그림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성공일 것 같아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표정훈 저 | 한겨레출판
시대의 흐름, 역사와 문화, 예술의 반영, 동시에 책과 그림을 논하는 인문교양에세이로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을 지켜줄 책이다. 읽는 자들이 들려주는 ‘읽는 기쁨’이 독자에게 행복의 충격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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