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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그때 꼭 했어야 하는 말들”

『네 컵은 네가 씻어』 출간 기념 ‘미지’ 작가 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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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니 ‘해야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었어요. (201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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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입 속에서든 입 밖에서든 이런 말들을 되뇌면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이 하나 있다. 이 말을 해야 우리 아이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는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잘가”라는 말.
- 『네 컵은 네가 씻어』 23쪽


서른여섯의 중반까지, 평범한 아이 엄마로 살았던 미지 작가는 갑작스레 아이를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다. 어쩐지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부부는 그날, 예기치 못하게 아이를 잃고 둘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며 미지 작가는 ‘말’에 사무쳤다. 더 많이 표현했어야 하는 말, 꼭 해야 했지만 머뭇거리게 되었던 말, 차마 드러내기 어려웠던 아픔의 말이 계속 떠올랐던 것이다. 허공을 맴돌던 그 무수한 말들은 그녀의 첫 책 『네 컵은 네가 씻어』 에 담겼다.


출간을 기념해 지난 11월 22일, 당인리책발전소에서 미지 작가의 북토크가 열렸다. 그녀는 “책을 쓰는 것은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하며, 마음속에 차오르는 말들을 꼭 하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이날의 북토크는 김서령 소설가의 사회로 진행됐다.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출판사를 통해 미지 작가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는 김서령 소설가는 『네 컵은 네가 씻어』 는 “그만큼 매력적인 책”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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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몰아치듯 썼어요


김서령 : 첫 책이에요. 출간하고 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미지 : 아직은 실감이 잘 안 나요. 책을 쓰겠다고 계획해서 나온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우연히 책까지 내게 된 데다, 아직 출간 한 달째라 더 얼떨떨해요. 예전에 남편과 데이트를 하면서 당인리책발전소에 들렀었는데 그때도 이 책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서 제가 북토크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웃음)


김서령 : 책을 낸 후 일상에 일어난 사소한 변화가 있어요?


미지 : 아픔을 겪고 얼마간은 친한 지인들만 만나고 밖으로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책을 내면서 예쁜 서점도 구경 가고, 조금씩 세상으로 나오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또, 결혼 전에는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일을 아예 그만뒀었거든요. 이제 다시 사회에 발을 디디고 적응하는 중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처럼 전혀 모르는 분들과 뵐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걸 보면서, 이제 조금씩 생활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김서령 : 저는 이 책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처음 보았는데요. ‘페미니즘 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해야 하지만 못했던 말’에 대한 책이더라고요. 특히 초반에 아이를 잃은 내용을 보고 펑펑 울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글을 쓰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집필을 시작했던 건가요?


미지 : 예상치 못하게 아이를 떠나보내고 힘든 시간을 겪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아픈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잊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도 잘 안 났어요. 그래서 더 잊기 전에 기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죠. 국문학을 전공했고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은 늘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출판사와 연이 닿아 아이에 대한 내용을 쓴 글을 보여드렸는데 더 길게 써보길 제안하시더라고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정신없이 몰아치듯 썼어요. 쓰다 보니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니 ‘해야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가장 확실한 사실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내 가장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냈다. 그것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으며 그래서 다시는 예전처럼은 살 수 없다. 어차피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중략)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잊고 있었던 말들이 찾아왔다.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그러나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었던 나의 진짜 이야기 말이다. 나를 걱정하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 『네 컵은 네가 씻어』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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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김서령 : 책을 읽은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미지 :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초고가 굉장히 거칠었어요. 탈고하는 과정에서 다듬긴 했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 많이 나오는 건 사실이죠. 엄마와 시어머니는 책을 읽고 저를 굉장히 많이 이해해주셨어요. 남편은 과거 연애사에 대한 내용을 불편해하더라고요.(웃음) 제 내밀한 속내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거예요. 책을 쓰는 입장에선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김서령 : 제목이 매력적이에요. 슬픔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어서 첫 장을 읽고 펀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처음부터 이 제목이었나요?


미지 : 원래 제목은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였어요. 거의 확정된 상태였는데 출판사 분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책 내용은 못했던 말들을 꼭 하고 싶다는 것인데, 제목부터 너무 소심한 거예요.(웃음) 그래서 책에 수록된 ‘못한 말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러던 중, 표지를 그려주신 박영준 작가님께서 원고를 읽고 컵을 크게 표현해주신 걸 보고 ‘이 부분이 인상적인가보다’라고 느꼈어요. 컵을 씻으라는 건 사실 너무 사소한 말이잖아요. 일상의 사소한 말부터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제목을 짓게 됐어요.


김서령 : “네가 무슨 상관이니?”,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내 것 돌려주세요” 등 사소하지만  쉽게 하지 못한 수많은 말들이 책에 실려 있어요. 이중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미지 : “나랑 사귈래?”(웃음) 앞으로 이 말을 할 일은 없겠지만, 아쉬운 말이에요.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못할 것 같지만요.


김서령 : 『네 컵은 네가 씻어』 는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 책에 실린 말들 중 제대로 내뱉어본 말이 별로 없거든요. 어떻게 하면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미지 : 용기의 문제인 것 같아요. 할 말을 못했다는 것은 그 말을 했을 때 다가올 상황을 감수하느니, 그냥 말하지 않고 참는 거잖아요. 하지만 말을 했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 지는 자신의 추측일 뿐인 거예요. 저는 이전까지 제가 착하기 때문에 할 말을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혹은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참았던 거였어요. 이제는 말을 다 하면서 살려고요. 말하고 난 뒤에 조금 불편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감수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김서령 : 저도 까다롭고 피곤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말을 숨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 안의 미련을 들키기가 자존심 상해서, 말하면 후회할까봐 입을 다문 적도 많아요. 작가님은 내뱉고 나서 후회되는 말이 있나요?


미지 : 이 이야기를 하면 너무 슬퍼지는데, 가장 후회되는 말은 아이를 원망했던 거예요. 네가 생겨서 내 인생이 꼬였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했는데, 아직도 그때 아이의 눈빛과 표정이 생각나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기분을 알아차리니까요. 평생 후회할 말이 아닐까 싶어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어요. 육아와 집안일로 혼자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남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기 때문에 엉뚱하게 아이에게 원망이 갔으니까요. 만약 아이를 계속 키울 수 있었다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워요. 여러분들도 남을 원망하는 말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망은 결국 자기 안에서 생기는 감정이니까요.

 

그때 나는 바로 인정했어야 했다. 이것은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유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키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즈음 유군도 바빠져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힘들다고 말할까. 그건 너무한 거야. 유군은 돈을 벌고 있잖아.(중략)


그렇게 오기를 부린 결과 불똥은 이상한 방향으로 튀고 말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아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갑자기 생겨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아이를 원망했다. 그때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유군에게 빨리 말했어야 했다. 이렇게 말하고 도움을 청한 후 우리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줬어야 했다. 사랑했어야 했다.


“나 좀 도와줘.”
- 『네 컵은 네가 씻어』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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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중심에 두고 살기 


김서: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어요?


미지 : 어떤 분이 써주신 리뷰를 보고 눈물이 났어요. 제게 편지를 쓰듯이 글을 남겨주셨더라고요. 본인에게 힘든 일이 있었을 때 ‘이게 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면서,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저는 사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되게 싫어했거든요. 만약 운명이 있다면 저는 참 박복한 사람인 거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저에게 주어진 삶이 이런 것이고, 누구에게나 각자의 어려움이 있는데 다만 제게 닥친 어려움은 이 슬픔일 것이라고 받아들이니 두려울 게 없더라고요. 그분께 무척 감사했어요. 또 여러 책들에 위로를 많이 받았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 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교통사고로 읽고 쓰신 책인데 처음에는 왜 나에게만 이런 운명이 닥치나 했는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면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아픔을 극복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제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 해요.


김서령 : 텀블벅 후원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아요. 독자를 위해 책을 썼지만, 글쓰기 자체가 미지 작가에게도 분명 치유의 과정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미지 : 실물이 없는 책인데도 구매해주시는 것을 보고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응원 받는 느낌이었죠. 저는 이 아픔을 말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가기엔 너무 괴로웠어요. 공기가 통해야 상처가 금방 아문다고 하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내 상처를 바깥에 드러내면 좀 무뎌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썼어요. 저는 교정보느라 원고를 하도 많이 읽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데, 책을 읽고 눈물 흘리셨다는 독자 분들을 볼 때마다 ‘내가 쉽지 않은 일을 했구나’라는 실감이 나요. 책을 쓰는 게 극복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김서령 :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미지 : 사실 오래 전부터 소설가가 꿈이었기 때문에 첫 책은 꼭 멋진 소설이길 바랐어요. 어쩌다보니 에세이가 첫 책이 되었고, 아직도 치유의 과정에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끝까지 써보고 싶어요. 요즘 주로 생각하며 쓰는 글의 주제는 ‘아이를 다시 낳아야 하나’에 대한 문제예요. 이게 책으로 엮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써보려고요. 이렇게 원 없이 마음속의 이야기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김서령 :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세요.


미지 : 아픔의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복잡한 관계 속에서 꼭 찾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거죠. 상황에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없어져요. 여러분들은 살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중심에 두시길 바라요. 그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네 컵은 네가 씻어미지 저 | 걷는사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오래 전부터 마음에 남은 하지 못한 말들이 있으신가요? 왜 그때 그러지 못했을까 후회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그런 것들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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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성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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