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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플랫폼의 오전 8시

도시의 아이러니와 타인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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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사회의 규율이 온전히 신체와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는 오전 8시는, 삶의 안전선과 조화되지 못한 도시의 신체들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온전히 쓰지 못해 ‘방심해 있는’ 시각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매일 같은 시각 은하철도999


여의도 증권사에 다니는 10년 차 직장인 37세 K의 집은 강동구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그에게 집 근처 역과 직장 근방 역 사이에는 스물세 개 정거장이 있다. 매일 아침 스물세 개, 왕복 마흔여섯 개의 정거장을 오가며 그는 10년 동안 회사를 다녔다. 일주일에 대략 200개 이상의 정거장, 한 달이면 800개를 오간 그의 정거장 수는 10년을 합산하면 10만 개에 이른다. 헉! 은하철도999를 탄 것도 아닌데 10만 개 정거장이라니. 혼자 쓸쓸한 명절을 보내던 37세의 K는 어느 날 자신이 오간 정거장 수를 문득 할일 없이 헤아려 보다가 놀란다. 그래도 그는 곧 다시 스스로를 위안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갈아타지 않고 직장까지 직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서울의 동과 서를 쏜살 같이 횡단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 K의 출근길, 아침 지하철이 목적지까지 달리는 시간은 평균 53분이다.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 게이트를 빠져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 역사에서 회사 엘레베이터까지 다시 종종 걸음으로 5분. 그러므로 그가 생존을 위해 사수해야 할 마지노선은 오전 8시의 지하철 플랫폼이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중략) 가까스로 문이 닫히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였다.”(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중에서)

 

기다리던 오전 8시의 ‘열차’가 들어온다. 일단 오전 8시의 열차는 그에게 ‘반갑다.’ 그러나 다시 그는 착잡해진다. 서울의 직장인 K에게 적어도 오전 8시는 “신체의 안전선”과 “삶의 안전선”이 분할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착잡한 마음을 사색으로 연결시킬 겨를도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하지만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문득 K는 예전에 서울 지하철 출근 시간 혼잡도에 대한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지하철 한 칸의 승차정원은 대략 160명, 좌석은 54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 출근 시간 강남역에 내리는 2호선 전철 한 칸의 승객수가 350명 정도라고 한다. 이 시각 나는 ‘사람’인가, 짐인가. 그가 몸을 싣는 지하철 5호선이 사정이 조금 낫더라도, K에게 매일 오전 8시는 이런 자문의 회귀가 불가피한 시간이다.   

 

시간의철학

 

‘삶’과 ‘사람’의 아이러니


도시의 오전 8시는 이런 방식으로 ‘신체의 안전선’과 ‘삶의 안전선’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며,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분열되는 것은 ‘말’ 자체다. 본래 ‘사람’이라는 명사는 ‘살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사람’은 처음부터 ‘고양이’나 ‘개’처럼 대상을 지시하는 호명이 아니라,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도시의 오전 8시 지하철은 ‘살다’의 온전한 품격을 증발시킴으로써, ‘삶’이라는 풍부한 지평을 단순한 생존의 영역이나 경제적 생활세계로 격하시키고, 그나마 거기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마저 ‘(생존적) 삶의 안전선’으로부터 분리해낸다.

 

이 말들의 분열, 동사와 명사의 분할과 긴장, 행위와 행위 주체 사이의 간극에는 인간‘다움’이나 삶‘다움’이라는 가치 증발, 본질이나 목적이 되어야 할 삶과 도구적 생활 방식 사이에서 발생한 어떤 전도 현상이 내포되어 있다. ‘삶의 안전선’에 전력질주로 올라타고 “문이 닫히면” “유리창에 밀착”되고 마는 저 소설 속 오전 8시의 ‘얼굴’은 그런 점에서 지금 세계의 스탠다드한 시계침이다.

 

이 분열의 시계침이 지시하는 철학적 함의는 개별성을 대변하는 신체가 삶의 전체 안에서, 또는 목적과 수단이 조화되지 못하고 깨어져 나가는 변증법의 불가능성이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앙리 르페브르에 따르면, 오늘날 개별성과 보편성의 이러한 높은 수준의 긴장은 헤겔의 경우처럼 지양(종합)되지 않는다.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긴장은 어떤 일탈적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적 삶은 이 불가능성 자체를 정상적인 것으로 향유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러한 긴장과 분열로 유지되는 삶의 ‘정상성’을 ‘현대성의 아이러니’라고 불렀다.

 

다른 얼굴들의 같은 얼굴들


그러나 이 아이러니를 다른 식의 역설로 바꿔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분열은 ‘다른 것’들을 ‘같은 것’으로 변질시키기도 한다고 말이다. 예컨대 오전 8시의 지하철 플랫폼에서 K는 밤을 지난 시간 다음 처음으로 세상의 수많은 ‘다른 얼굴들’을 다시 마주한다. 아직 의식이 충분히 깨어나지 않은 오전 8시, K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다른 얼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는 ‘일단’ 깜짝 놀란다. 마주하는 얼굴 수만큼이나 그들의 손금은 다양할 것이다. 손금이 지시하는 삶의 모양들도 제 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K는 타인의 얼굴들과 마주하여 또 다른 아이러니를 느끼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문이 닫히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인 K의 지하철 오전 8시는, 타인의 수많은 얼굴들을 모두 그런 유리창의 같은 얼굴로 마주하게 되는 이상한 시간이다. 발걸음은 초조하며 일사불란하다. 방향을 거슬러 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군중의 흐름은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피로감, 미세하지만 이름 모를 적의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K는 타인의 얼굴들에서 또 다른 타인의 얼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도 그런 얼굴들의 흐름에서 구별되기 어려운 얼굴들 중 하나일 것이다. 개별자들에 붙은 이름인 타인들은 이런 식으로 다시 동일한 ‘하나’가 된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선언을 흉내 낸다면 ‘모든 개별적인 것은 지하철 출근 시각 공기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린다.’

 

문화와 사회의 규율이 온전히 신체와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는 오전 8시는, 삶의 안전선과 조화되지 못한 도시의 신체들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온전히 쓰지 못해 ‘방심해 있는’ 시각이다. 그래서 도시의 민낯이 방심의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과 과학에서 찾는 물리적 세계의 원리인 ‘하나이면서 모든 것(hen kai pan)’은 오전 8시에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역설로 도시적 개별성을 ‘같은 것’으로 흡수해 버린다. 타인의 얼굴들이 모든 타인들과 마주하여 서로의 거울이 되는 도시적 삶에서 나의 얼굴도 타인의 얼굴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이상, <오감도시제일호>)가 함께 모여 있으며 또한 구분되지도 않는 이상의 ‘이상한’ 시는 오전 8시 열차 역사에서 씌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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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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