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패션큐레이터 김홍기 “남이 시킨 대로 하면, 인생이 바뀔까?”

삶을 한뼘 더 넓히고 싶다면, 나만의 멘토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지금 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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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큐레이터가 쓴 책이니 옷 입는 법에 관한 내용이겠지, 하고 추측한다면 그 예상은 틀렸다. 그렇다고 이전에 나온 『하하 미술관』 처럼 따뜻한 에세이도 아니다. 전작처럼 미술 작품을 소재로 한 글이라는 점은 똑같으나, 글이 따뜻하지는 않다. 힐링이 범람하는 이 시대, 더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옛 가운을 입을 때는 내가 옷의 주인이었는데, 새 옷과 함께 나는 옷의 노예가 되었구나. 모든 환경이 자신의 우아한 기품에 맞추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오만한 진홍빛 가운이여. 황금 양털을 보호하던 용도 나보다는 걱정이 덜했을 터. 세상의 모든 염려가 나를 둘러싼다. 저주 있으라, 진홍색 물을 들여 보통의 물건에 가격을 얹어 받는 이여.-『댄디, 오늘을 살다』 60쪽.
여기서 잠시 퀴즈! 저 글이 쓰인 시대는 언제일까? 답을 찾기 위해 글이 가리키는 장면을 분석해 보자. 한 사람이 새 가운을 샀다. 새 옷을 사면 응당 기뻐해야 할 텐데, 화자는 기뻐하는 감정보다는 우려가 앞선다. 주체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시선 때문에 소비를 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변형으로 물건의 가격을 높인 상술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도 나타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위 글을 쓴 사람은 18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사상가 디드로다. 디드로는 1769년에 『나의 오래된 침실 가운을 떠나보내며』 에서 소비 문명을 고찰했다. 새 가운을 사면서 느낀 감정을 토로하며, 그는 ‘가난은 자유를 가져다주지만 부는 장애를 가져다준다’라고 썼다. 자본이 주도하는 소비사회에서 자본에 휩쓸려가지 않고 저항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최윤정, 「Pop Kids #40」

『댄디, 오늘을 살다』 에도 소비욕망에 압도되지 않고 주체를 세우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책을 쓴 김홍기는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하하 미술관』 등을 쓴 집필가이자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를 비롯해 여러 책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패션 큐레이터가 쓴 책이니 옷 입는 법에 관한 내용이겠지, 하고 추측한다면 그 예상은 틀렸다. 그렇다고 이전에 나온 『하하 미술관』 처럼 따뜻한 에세이도 아니다. 전작처럼 미술 작품을 소재로 한 글이라는 점은 똑같으나, 글이 따뜻하지는 않다. 힐링이 범람하는 이 시대, 더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세상과 맞장 뜬 정신적 귀족, 댄디

패션 큐레이터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 책이 패션에 관한 책이라 짐작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현대 한국 미술 작품을 보고 현대 사회를 조망한 책이다. 책을 쓴 계기가 궁금하다.

원래는 패션 에세이를 쓰려고 했다. 그렇다고 요즘 뜨는 핫 아이템, 뭘 입으면 빛나 보이는지, 이런 내용은 아니고. 굳이 말을 붙이자면, 패션의 인문학 정도의 느낌이었다. 패션에도 철학이 있다. 철학은 다른 말로 태도인데, 한 벌의 옷을 입는 사람의 태도가 어느 시대마다 있었다. 개인적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관심이 많다. 이 시대가 바로 백화점이 생기고 쇼핑을 하기 시작하던 때로, 오늘날과 다를 게 없다. 현대 소비문화를 반성하고 보완하려면 이런 문화가 처음 태어났을 때를 봐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19세기의 그림을 소재로 써야겠으나 그렇게 하면 글이 재미 없겠더라. 그것보다는 오히려 현대적인 작가의 그림 속에서 댄디라는 이념을, 생각의 틀을, 태도를 추출해낼 수 있다면 오히려 더 매력적일 것 같았다.

책 제목에 쓴 ‘댄디’라는 말은 개념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진다. ‘댄디’는 어떤 의미인가?

지금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는 1,800년대에도 이미 유행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신분질서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경쟁했다. 이때 나온 자기계발서를 보면 밤에 어떤 장갑을 껴야 하고, 수트 입을 때 어떤 단추를 써야 하고, 수염을 어떻게 기를지 이런 게 세세하게 나온다. 지금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이런 자기계발의 시대, 소비 광풍의 시대에 저항한 사람이 있었다. 정신의 귀족됨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의 태도가 댄디다.
댄디란 패션에서 멋진 옷차림, 맵시 있는 스타일을 뜻합니다. 이 댄디란 말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회적 질서와 이에 상응하는 스타일에 대한 독특한 형태의 저항’이란 깊은 뜻이 담겨 있답니다. (중략) 그들은 특유의 우아함으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속에서도 정신의 귀족이 되는 법을 만들어 냅니다. 우아함은 ‘심혈을 기울여 선택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우아한 삶이란 곧 동사적 삶입니다.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 자신의 외양과 정신을 가꾸는 일,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바꾸고 이를 연대하는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댄디의 필요조건이랍니다. (5~6쪽)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 소재를 한정한 이유가 있나.

『샤넬, 미술관에 가다』 를 쓰긴 했으나, 서양명화를 소재로 글 쓰는 게 싫어졌다. 이런 책이 세상에 너무 많이 나오는 것도 싫었고. 또 하나 이유는 이렇다. 우리사회에는 서양 명화로 설명하면 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있다. 우리 나라 화가를 잘 모르는데, 그 이유가 한국 미술 수준이 낮아서 알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정신 승리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태도가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국 작가의 작품만으로 글을 썼다. 『하하 미술관』 도 그랬고 『댄디, 오늘을 살다』 도 마찬가지다.


힐링만으로 현실이 바뀌나

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 주요 테마인 책 같았다. 읽어 보니 아니더라.

요즘 잘 될 거다, 괜찮다, 이런 류의 힐링 메시지가 많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올라가기에 유리천장이 공고하지 않나. 기득권의 저항도 강하고. 저항해도 아큐처럼 정신승리에 그칠 때가 많다. 18세기에도 자기계발서에서 이렇게 입어라, 저렇게 행동하라고 했지만 그걸 지나치게 따를 필요가 없다. 적당하게 만족하고 내 몸에 맞는 옷을 입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힐링, 하면서 다른 사람에 기댄다. TV 프로그램 같은 데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더라. 소위 '멘토'라는 사람들이 말해주는 대로 따라 하면 인생이 바뀔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고 용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힐링과 거리가 멀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과거에 세상과 맞장 뜬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었을 뿐이다.

패션에 관한 이야기가 주이지만 성형을 다루기도 했다.

이 나라는 성형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영화관 가 봐라. 성형외과 광고가 보란 듯이 나온다. 나는 성형한 모습이 너무 꼴 보기 싫더라. 우리사회에 성괴(성형괴물)된 사람이 너무 많다. 성형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얼굴의 형상을 따라가는 것인데, 유행은 몇 년만 지나도 바뀐다. 그때 가서도 또 성형할 텐가. 주름 없애려 하는 것도 반대다. 팔자주름 있으면 늙어 보이긴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주름을 없애고 싶지 않다. 내 얼굴은 찰흙이 아니다. 그때 그때마다 바꿀 수 없다. 패션의 기본 미덕과도 다르다. 패션은 못 생긴 부분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예쁜 곳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성형은 못 생긴 부분을 없애려 한다.

패션의 기본 미덕이 예쁜 곳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옷을 잘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벌의 옷에 집착하지 않고 옷장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일관성. 두 번째로, 계절마다 방점을 찍는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우선 상황에 맞게 입을 수 있는 베이직을 갖춰야 한다. 베이직을 갖추고 그 시즌에 맞게 적절히 다양한 소품을 이용하면 된다. 소품을 명품백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샤넬 클러치가 예쁜 건 나도 알지만 예쁘다고 다 살 수 없지 않겠나. 안 비싼 소품으로도 자신의 멋을 낼 수 있다. 패션이 발전한 나라일수록 스타일리스트가 쓴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스타일리스트가 권하는 건 정형화된 문법일 텐데, 언어에 랑그와 빠롤이 있듯 옷 입기도 랑그와 빠롤이 결합한 행위다. 잘 결합하려면 스타일리스트의 조언보다는 나 스스로가 내 자신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옷을 잘 입는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관성 중에서도 시즌별로 약간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파격 같은 건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파격은 거창한 게 아니다. 지금 이 현재를 긍정하는 게 파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긍정주의자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뜨고 있는 걸 알아내고 몸으로 느껴보고 감싸라고 권하고 감싼 사람끼리 뭉쳐서 이 시간대를 긍정하고, 용기 내서 살아가는 행위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브랜드가 떴다면 그 브랜드로 우르르 몰린다. 상업주의에 매몰됐다. 유행의 희생자가 아니라 유행을 즐겨야 한다.


김현정, 「내숭, 투혼」


이해란 나 자신을 내려놓고 위를 보는 것

『하하 미술관』 도 그렇고 『댄디, 오늘을 살다』 도 미술 작품을 보고 쓴 글이다. 한편으로는 알렝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은 예술 감상에 관한 책이다. 옷을 입을 때도 필요하겠지만,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주체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작품을 봐야 하나?

『영혼의 미술관』 은 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기능을 치유, 자기 확장 등으로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새롭지는 않다. 미술 작품을 보고 느끼다 보면 자동으로 내 자신이 확장된다고 느껴진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그림 한 장을 읽어도 내 나름대로 읽는다. 그걸 글로 쓰자면 작가가 그림을 그린 의도,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생각하고 공부하게 된다. 그렇다고 여기에 너무 꽉 메이면 나와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과는 적이 된다. 세상에 의외로 자신 안에 갇힌 사람이 많다. 내 것만 답이 아니고, 물론 저 사람도 답이 아니다. 하나의 표상이 다양한 의미로 다양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미술 작품이다. 이해가 언더스탠드(understand) 아니겠나. 왜 낮아지겠나. 이해는 나 자신을 내려놓고 위를 보는 것이다. 감상도 똑같다.

유투브에 2시간 30분짜리 강의를 통째로 올리고 있다. 공짜로 올리긴 아까운 콘텐츠 아닌가?

패션큐레이터? 말이 예쁘지 나 혼자다. 외롭게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갈 생각은 없고, 대중을 많이 만나고 싶다. 그래서 강의를 무상으로 올렸다. 좋은 강의를 온 힘을 다해 웹상에 깔면 가장 긴장하는 집단은 대학 교수다. 요즘은 세계의 유명한 학자 강의를 해외 직구하듯 구할 수 있다. 아직도 70년대, 80년대 노트로 강의하는 교수가 있는데, 학생들이 더 많이 안다. 이게 나쁜가? 우리 학계도 바뀌어야 한다. 공부 안 하면서 학문으로 돈 벌면 안 된다. 나는 굽었던 걸 바로 펼 뿐이다.

한편으로 번역도 꾸준히 했지 않나?

주로 외국 책을 본다. ~의 역사,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는데 이런 책을 찾다 보면 한국에 번역된 책이 그리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원서를 보게 된다. 지금 베이컨의 『수상록』 을 읽는데, 1970년대 번역된 뒤로 제대로 번역된 정본이 없다. 사실 번역이 돈은 안 되는데 시간은 많이 걸린다. 저자로서 책을 내면 인터뷰 기회라도 얻지, 번역은 백날 해 봤자 뭐가 있겠나. 그럼에도 좋은 책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번역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번역하는 사람에게 투자도 하고, 좋은 번역서가 나왔을 때 밀어줬으면 좋겠다.

『댄디, 오늘을 살다』 에서 인용하는 학자나 작가를 보면,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을 것 같다. 채널예스 독자를 위해 추천 부탁한다.

아쉽게도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을 추천하라면 『마에스트로의 리허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에 관한 이야기다. 한 분야를 오래 했던 사람의 삶이 자기계발서 이상의 메시지를 준다. 굳이 자기계발서를 읽을 필요가 없다. 가령 말을 안 듣는데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지휘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기는 CEO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반 대중을 사로잡으려는 문필가에도 해당하는 문제다. 연극 연출도 마찬가지고. 특정한 장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통한다.

* 기사에 수록한 작품은 『댄디, 오늘을 살다』에서 다룬 그림입니다.


[추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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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디, 오늘을 살다 김홍기 저 | 아트북스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 지도 벌써 몇 년째다. 삶의 피로가 쌓이면서 ‘행복’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에 대한 갈망도 커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주위들 둘러보면 불행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건들만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서점에는 ‘위로’와 ‘힐링’을 키워드로 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방증일 테다. 지은이는 이제 위로의 말들로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상처가 깊어졌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지은이는 19세기에 등장한 ‘댄디’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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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손민규(인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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