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왼손에 책인지 노트인지 모를 두꺼운 책자를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 70세 노인 김병수는 전직 수의사. 30년 동안 살인을 해오다 25년 전, 살인을 멈췄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교한 살인 일지를 쓰기 위해 문화센터 시 창작 수업을 듣는 주인공 김병수는 “살인은 생각보다 번다하고 구질구질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p.38)
스스로 ‘천재적인 살인자’라고 칭하는 김병수. 아니, 그동안 저지른 모든 살인의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천부적인 살인자가 맞을지 모른다. 금강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읊는 김병수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손녀 뻘로 보이는 딸 은희와 함께 살며, 동네에 나타난 연쇄살인범 ‘박주태’가 은희를 죽일 것이라 확신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예의주시한다. 맹목이 일상이 되어 버린 김병수는 딸을 살리기 위해 매 순간을 기록하기로 한다. 수험생들이 오답노트를 쓰듯, 딸을 구하기 위한 또 다른 완벽한 살인을 상상하며 일기를 쓴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기록들은 어쩌면 누구를 죽이고 살리기 위함에 아닌, 알츠하이머 환자 김병수 자신이 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나는 악마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혹은 그 둘 다인가.” (p.33)
『살인자의 기억법』의 화자는 김병수다.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 김병수의 담담한 어조는 팍팍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고 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글귀를 기억하고 미당의 시 「신부」를 해석하는 일흔의 김병수는 망각 속에서 혼돈한다. 독자들은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김병수의 일기를 읽으며, 정독과 오독을 반복한다. 작가가 틀림없이 모든 문장에 의미를 담았을 것이라 확신하며, 결말의 반전을 향해 각기 다른 시속으로 질주한다.
『살인자의 기억법』 첫 장을 열었을 때, 김영하의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떠올랐다. 타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자살안내인의 이야기. 살인을 자행하진 않지만 그는 2차적 살인자였을지 몰랐다. 두 작품은 모두 죽음을 다루는 동시에 ‘기억’을 주요 텍스트로 사용했다. 완벽한 살인을 위해 살인일지를 적는 김병수와 자살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기록해주는 작가.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서서, 또는 뒤에 서서 증언을 한다. 누구 하나 보지 못하더라도 기록의 쾌감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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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과거는 생생하게 보존하면서 미래는 한사코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내게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다.”(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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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김병수는 미래를 위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기록한다. 과거의 기록, 역사를 적는 것이 아니라, 내일 잊으면 안 될 것들을 기록하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것이다. 오직 김병수가 기억하고자 하는 건, 딸 은희를 살리기 위해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는 것뿐이다. 의사는 김병수에게 알츠하이머를 진단하며 “단기 기억이나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병수에게 최근의 기억은 25년 전 살인의 기억이 아니라, 은희와 박주태에 대한 기억이다. 김병수는 자신에게 첫 살인의 대상이 된 아버지에 대한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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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무지에게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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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했지만, 김병수는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라고 인지한다. 이 얼마나, 속 편한 말인가. 끝내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과거, 살인의 기억을 알츠하이머로 인해 잊게 된다는 것. 살인자에게는 축복이 아닌가. 소설은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쉴 틈을 주려고 하지만, 빠른 속도감을 무시할 수 없다. 문장의 여백을 맞닥뜨리며, 어제의 김병수를 상기하지만 내일의 김병수가 궁금할 따름이다. 오락가락하는 김병수의 기억력은 독자들을 혼미하게 만든다. 김병수가 자신의 또렷한 의식을 증명하려고 애를 쓸수록 독자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의 독백을 읽어갈 수밖에 없다. 이윽고 결말에 다다르면, 작가가 무심하게 흘려 놓은 듯한 반전이 독자들의 눈치를 살핀다. 반전은 분명한 기실인데, 이상하게도 놀랍거나 뜨악한 느낌이 없다.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김병수처럼 미래를 위한 기억을 저장해놓은 마냥, 심상한 기분이다.
김영하 작가는 오래 전부터 기억에 대한 관심을 작품 속에 표출해왔다. 이유인즉, 작가에게는 10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그 이전의 기억을 잃은 과거가 있다.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유년기를 추억하는 일은 즐거운 일. 그것이 힘겨운 기억일지언정 지나보면 추억이 될 법한 일들이 더 많은 법이다. 김영하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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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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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 김병수는 30년 동안 저지른 살인 행위는 생생하게 기억해내지만, 최근에 저지른 일들은 까맣게 잊었다. 김병수에게 과연 알츠하이머는 축복인 것인가, 재앙인가. 분명한 것은 그가 거대한 우주의 한 점에 고립됐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처벌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라 확신했던 그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파괴된 기억들 속에서 사라진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잊고 싶고, 상기하고 싶은 기억들이 존재하지만, 망각의 존재로서만은 살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됐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화자였다. 김영하 작가는 대단한 모험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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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 문학동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김영하다. 올해로 데뷔한 지 19년. 하지만 그는 독보적인 스타일로 여전히 가장 젊은 작가다. 그의 소설은 잔잔한 일상에 ‘파격’과 ‘도발’을 불어넣어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딸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잠언들, 돌발적인 유머와 위트,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이번 소설에서 김영하는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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