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이 절필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직업적 글쓰기’를 접는단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 또는 어떤 직업을 포기하든 누군가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물론 아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내가 그의 맛깔스러운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 때문일 터이니. 그의 이기심이 변덕을 부린다 해서 그를 탓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적잖이 불편하다. 당대에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삶의 크나큰 축복 가운데 하나로 여겨왔던 독자로서 느끼는 다분히 이기적인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밝힌 절필의 이유(또는 그로 하여금 절필에 이르게 한 정황)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면서도 덩달아 ‘직업적 글쓰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구차스러운 내 처지가 새삼 일깨워졌던 탓이 크다. 그의 말처럼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한 것인가 보다. 다름 아닌 바로 그 말에 깊이 동의하면서도 그 글로 인해 내 삶은 한 치도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물며 그의 글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누군가가 그의 글을 읽건 읽지 않건 달라질 건 별반 없을 터이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조차 무력하기 짝이 없는 글이라는 물건이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가 30년 동안 글쓰기라는 직업을 유지하다가 이제 와서 굳이 절필을 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글이란 본디 그런 것인데 그것을 이제 와서 절감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글이 본디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즈음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그 구체적인 계기를 넘겨짚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가 “결정적인 건 그냥 귀차니즘이에요. … 이것저것 핑계를 댔지만 어쨌든 글쓰기 싫은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라고 말했다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따위가 있을 리 없지만)가 없는 한 그냥 그렇게 이해하는 것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없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글이 과연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쓸모있는 물건인가 따위의 각자의 내면적 믿음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글이 얼마나 유력하다고 믿는지와 무관하게 ‘글쓰기’라는 직업(또는 적어도 비판적 사유를 본령으로 하는 산문가)의 사회적 가치가 축소되고 있다는 현실적 정황이다.
이러한 정황은 그가 소개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는 술친구의 자조에서도 분명하게 포착된다. ‘안철수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우선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라는 자기 평가에서 드러나듯, 수십만 부의 바람몰이를 할 수 있는 ‘흥행성’을 염두에 둔 것일 게다. 적어도 글쓰기가 그의 ‘직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원고료 수입에 생계를 기대야 하는 처지가 점점 더 힘에 부친다는 비관적 전망이 엿보인다. 그의 글에 호의적인 ‘소수의 독자’로서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다수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품의 퇴출을 당연시하는 냉엄한 시장 논리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은 세상에서 하루하루의 삶이 점점 더 고통으로 치닫는 건 유독 글쟁이들만 겪는 일도 아닐뿐더러 글쟁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측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안철수 같은 사람’은 단지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사퇴하긴 했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으며, ‘현실적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보다는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에 훨씬 가깝다.(만일 고종석의 바램대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라도 했다면, 중하급 관료나 의원 보좌관과는 아예 상대도 안 되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됐을 것이다.) 그가 글이 무력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글이라는 물건이 본디 지니고 있는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 개입하는 ‘실질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 ‘책상물림’들의 글이 무력하다는 고백인 셈이고, 나아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또는 그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에 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직업적인 글쓰기’를 접은 뒤에도, 파워트위터리안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그 어느 때보다 발랄하게,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글쓰기를 지속하고 있는 것도 그 하나의 방증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이 새로운 글쓰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새삼스레 기대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활자매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역동성을 지닌 이 매체를 통해 이전보다는 좀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실질적인 힘’에 다가가려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가 토로한 ‘글의 무력함’은 한국 사회에서 (그의 정신이 딛고 서 있는) ‘자유주의’(좀더 정확히는 ‘근대적 자의식’)의 입지가 협소하다는 사정을 빼놓고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백낙청처럼 거창하게 ‘분단체제의 극복’ 같은 거대담론을 펼친 적이 없다. 그는 오히려 ‘유토피아의 기획이 포기된 세상’, ‘혁명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라, 반동에 대한 경계와 조화에 대한 배려가 미만한 세상’, ‘기쁨을 키우는 세상은 아닐지라도 슬픔을 더는 세상’을 소망해왔다. 그리고 그런 소망에조차 (실은 그의 글이 아니라) 한국 사회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왜 없애야 하는지 제가 이미 다 얘기했잖아요. 보안법 사건이 또 터지면 주인공이 달라지니 다른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결국 제가 하는 얘기는 똑같거든요.”라는 그의 말은, 적어도 ‘비판적 사유’를 본령으로 하는 산문에 주력해온 이 시대의 글쟁이들에게라면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 가령 ‘지역차별’에 집요하게 천착하며 ‘지겹도록’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던 강준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는 만일 고종석의 절필이라는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석에 관한 한, 이미 오래 전에 썼던
『국어의 풍경들』 서평이나
『서얼단상』 서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성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실과의 긴장을 놓친 채 ‘관념유희’로 도망치지 않는 한, 사유의 공간은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는 현실의 테두리를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무리 많은 글을 써내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무력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현실의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여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을 ‘직업적’인 본분으로 삼아야 할 지식인이 제대로 ‘밥값’을 못 하고 있다는 무력감이기도 하다. 현실과 아무런 긴장도 일으키지 않는 ‘관념유희’를 마치 사유의 확장인 양 분칠하는 것은 물론 직업윤리를 배반하는 사기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이 요지부동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똑같은 논지의 글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만 바꿔 내놓는 것도 (경제적 대가가 따르는 한)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다. 그런 글로도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사람이 이미 확보한 사회문화적 지위의 후광효과 덕일 게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에게 호의적인 독자가 날로 ‘소수’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며, 따라서 현실적인 권력과는 무관하게 독자로 하여금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게’ 하는 글 자체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흔히 오해하듯이 ‘비판적 사유’가 지식인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기에 지식인의 쓸모가 사라진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사유’의 쓸모에 인색해진 대중들이 지식인을 시장에서 퇴출시킨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사회 전반에 ‘비판적 사유’가 넘쳐날수록 더 많은, 더 다양한 지식인이 더 의미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지식인을 백안시하며 누구도 지식인일 수 없는 세상은 야만일 뿐이며, ‘사유의 힘’을 존중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이 지식인일 수 있는 세상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다. 고종석의 절필은 한국 사회가 야만으로 치닫고 있다는 한 징후이고, 또한 그의 ‘직업적이지 않은’ 새로운 글쓰기는 그에 맞서 ‘사유의 공간’을 한 뼘이라도 지켜내려는 안간힘이다.
그러니 깔끔하게 정제된 그의 글을 더 읽고 싶은 독자라면, 막연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절필을 번복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의 ‘비판적 사유’가 새로운 지평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현실의 역동성’을 되살려내는 노력에 연대해야 한다. “그야말로 돈 때문이 아니라 ‘이 말은 꼭 하고 죽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그때는 쓰겠죠.”라는 그의 말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런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앞서의 비유로 말하자면, ‘국가보안법’에 대한 그의 견해가 궁금하다면 그가 지금껏 써온 글들을 다시 읽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사라진 세상에서라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본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또 다른 ‘할 말’이 무궁무진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면 일단 국가보안법부터 폐지시킬 일이다.(어떻게? 투표로! 사회적 압력으로!)
나아가 그의 글에 호의적인 독자가 더이상 ‘소수’가 아닐 수 있도록, 다시 비유하자면 국가보안법 폐지가 현실의 ‘먹고사니즘’과는 동떨어진 ‘책상물림의 잘난 척’이 아니라 민주 사회의 주권자라면 마땅히 지녀야할 ‘상식’일 수 있도록, 나부터, 내 주변부터, 나와 일상적인 관계망으로 얽혀 있는 모든 사람에까지, 현실과 치열하게 긴장하는 글들을 찾아 읽고 서로 권하고 함께 토론하고,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사유의 공간’을 확장해 나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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