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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해피 패밀리』는 내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다”

고종석이 바라보는 특별한 지점, 고종석이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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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글쟁이 생활을 마감하는 책이죠. 책을 정신의 자식이라 말하는 상투적 표현을 빌려온다면, 『해피 패밀리』는 제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나마 일종의 과격한 일탈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잊을 수 없는 책이 될 겁니다.

고종석이 바라보는 특별한 지점,
고종석이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을 그는 내켜하지 않겠지만, 그의 바이오그라피를 들여다보며 몇 가지 상상을 해본다. 그가 만약 『엘리아의 제야』가 동인문학상 심사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의 원고 청탁과 인터뷰 요청 등을 거부해 오지 않았다면?(고종석은 2000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안티조선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조선일보와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그의 입장은 『서얼단상』의 <조선일보 문제 재론>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아무런 소속 없이, 아무런 소속이 없어서 고정 수입도 없이, 그나마 약간의 돈을 벌어다줄 글쓰기마저 하지 않겠다고 절필을 선언한 채, 하지만 아무런 소속이 없어서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그야말로 신나게 자신이 생각하는 옳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었을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저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에만 기대서 세상을 판단하는” 그 지점을 위하여, 고종석은 어쩌면 “모 아니면 도” 중 하나를 부단히 선택해왔는지도 모른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라고 고종석이 창조한 『해피 패밀리』의 한민형이라는 인물은 말하지만, 고종석이라는 이 탁월한 언어학자이자,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는 ‘글이 사람’일 수도 있는 그 지점을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이 인터뷰는 아마도 새로 쓰여진 글로 만든 책으로서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될 『해피 패밀리』를 출간을 계기로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너와 내가 깊이 소통하고 연대하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상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필자의 질문에 대하여, 어쩌면 그는 “사랑”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거라, 아니 그렇게 대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일지라도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의 답변은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였다. 실망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를 더 신뢰하게 된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 둘레의 세계를 정교하게 표현”하여, “큰 왜곡 없이 담”기 위해 그는 더 애를 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진실화”되기 위해, “완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마 모른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이 글마저도 말이다.




“누이들에 대한 제 감정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결핍으로서의 애정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리움이요.”


누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에서 누이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종석의 여자들』에서, 최진실의 죽음을 유난히 애도한 것도 최진실이 ‘만인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해피 패밀리』도 이야기의 주요 동력이 한민형과 누이들간의 애정이다.

누이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예전에 어떤 문학평론가가 제 소설들과 에세이들을 읽고 나서 고종석에게는 ‘누이콤플렉스’가 있다고 쓴 적이 있어요. 원래 그 말은 돌아가신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이 초기 고은 시인의 작품들을 두고 한 말인데, 제가 알기론 고은 시인에겐 누이가 없습니다. 그 분의 시에만 등장하는 상상 속의 누이들이죠. 제겐 실제로 누이들이 있습니다. 손아랫누이들만 셋이에요. 사산한 손윗누이가 하나 있었다고 부모님께 들었는데, 어쩌면 그 얼굴도 모르는 누이에게 그리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손아랫누이들과도 어려서부터 정이 도타웠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친가쪽으로나 외가쪽으로나 사촌누이들도 많아요. 한 번 헤아려볼 게요. 음, 사촌누이가 열일곱 사람이나 되는군요. 지금이야 서로 왕래가 별로 없지만, 어려선 자주 어울렸지요. 말하자면 저는 누이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셈입니다. 그이들 모두와 사이가 좋기도 했고요. 고백하기 쑥스럽지만, 사촌누이들 가운덴 어려서 제가 애틋한 감정을 가졌던 이도 있어요. 물론 그 누이들은 이제 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지요. 어려서 누이들과 나눴던 좋은 추억이 세상의 모든 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제 소설 속 누이들 가운데 제 실제 누이들에게서 모델을 그대로 취한 캐릭터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 누이들의 어떤 부분이 어떤 캐릭터들에게 슬그머니 흘러들어갔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까, 제게 그렇게 누이가 많지만, 소설 속의 누이들은 세상에 없는 누이들입니다. 결국 고은 시인이 시 속에서 그린 누이들과 마찬가지죠. 그 누이들에 대한 제 감정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결핍으로서의 애정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리움이요. 낭만주의의 연료가 되는 그리움 말입니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러니까 제 소설 속의 누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누이들이거나, 먼 과거 속에서 희미한 잔상만을 드러내고 있는 누이들이죠.

자살이라는 죽음의 특별한 방식 때문에 내가 얼이 빠진 것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신문지면을 탔던 유명인들의 자살을 나는 덤덤히 스쳐 넘겼으니까. 그러면 최진실은 내게 다른 자살자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곰곰 생각 끝에 나는 그 다름을 찾아냈다. 최진실은, 다른 자살자들과 달리, 내 가족이었다. 내 안쓰러운 누이였다.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었다기보다 ‘만인의 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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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우리 푸른 별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은, 동물은, 식물은 원래 하나였고, 서로 이어져 있다,라는 입장 또는 자세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작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저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었죠. 한때 저는 대단한 휴머니스트였어요. 뭐, 진짜로 대단한 휴머니스트라기보다 휴머니스트 코스프레를 했다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제3세계에서 노예노동을 하고 굶어죽고 총맞아 죽는 어린이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동네의 길고양이들이나 반려동물들에게 정을 주는 사람들을 경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갈 형편이 어차피 안 되는 이상, 골목길에서 먹이를 찾아헤매는 고양이들한테, 또 제 집 근처 양재천변의 잡초들한테 정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나한테 이런 관점을 가르쳐준 이는 가까운 친구인 시인 황인숙인데, 그 친구가 참 고맙더군요. 저는 이제 지구생태계에서 인류가 특별한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죠. 인류가 특별한 종이기는 하죠. 지배적 종이니까요. 그러나 인류가 우리 푸른 별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구 전체의 역사에 견주면, 인류의 탄생과 멸종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겁니다. 어떤 천재지변이나 마지막 대(大)전쟁이 일어나 혹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태양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지구에는 생명체들이 남겠죠. 그 생명체들은 크게 보면 인류의 식구들이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먼 과거의 어떤 단백질덩어리로부터 우리 인류와 함께 진화해 왔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제 인류의 멸종이라는 걸 그리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아닌 생명체들도 우리 인류의 식구니까요. 그 식구들이 다 멸종해 지구가 죽은 별이 되는 날도 언젠간 오겠죠. 그렇지만 그게 무슨 큰 일이겠어요? 그 까마득한 옛날 이 행성에 생명체라는 게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엄청난 기적인데요.

“응, 따지고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식구지.”
“그게 무슨 말이야?”
“위로 위로 올라가보면 조상이 똑같을 테니까.”
“단군 할아버지 말하는 거야?”
“단군 할아버지도 그렇고, 또 더 위로 위로 올라가면 세상 사람들 모두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을 거 아냐?”
‘응,그렇구나. 사람들은 모두 식구구나. 그럼 저기 경비 할아버지도 식구고 만둣집 아줌마도 식구고 응, 응, 다 식구네?“
“그렇지.”
“유치원 선생님도 식구고 은미도 식구고 봄이도 율이도 식구네?”
나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만이 아니란다. 원숭이, 고양이, 개, 사자, 참새, 꽁치, 소나무, 대나무, 장미꽃 이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식구란다.”




나는 쾌락주의자

한민형에 대해 동생 민주가 ”허무의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허무주의자”라고 묘사하는 문장이 있다. ‘허무의 제스처’는 무엇이며, ‘진짜 허무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작가는 스스로를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허무의 제스처는 허무주의자인 척하는 거고 허무주의자는 허무주의자인 거지 달리 뭐가 있겠어요? 제게 허무주의적 기질이 꽤 있기는 하지만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허무주의자라면,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교우관계나 가족에 대해서도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겠죠. 저는 그렇진 않거든요. 그런 한편, 그런 세속적 관심사가 다 허망해보이는 순간들이 자주 있긴 해요. 그럴 땐 허무주의자에 가까워지죠. 허무주의자는 쾌락주의자를 겸하기 쉬운데, 제가 쾌락주의자거든요. 술이든 담배든 맛난 음식이든 예술작품이든 책이든 놀이이든 바다풍경이든 저녁노을이든, 그것들이 주는 쾌락의 유혹에 잘 저항하지 못합니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의 독백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못미치기도 하고, 원망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 그것이 우리들이 사는 모습일 것이다. 본인의 생각과 마음을 타인에게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도, 또 타인이 나에게 표현한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내가 깊이 소통하고 연대하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상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가 불가능하기때문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들(individuals)이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부르는 거죠.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완결된 독립체라는 뜻이고, 완결된 독립체가 또다른 완결된 독립체들과 온전히 합체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완전한 소통과 연대를 향해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겠죠. ‘리미트, x, 화살표, 완전, x’인 상태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의 완전함이 불가능한 건 소위 이기적 유전자 탓이기도 하겠지만, 언어의 불완전성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 언어는, 자연언어든 손짓 발짓 표정 같은 몸언어(body language)든, 불연속적이죠. 반면에 자신과 타인들, 곧 인간을 포함하는 객관세계는 연속적이죠. 그러니 불연속적인 언어로 연속적인 세계를 고스란히 재현해낼 수는 애초부터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은 또 그 언어를 되도록 정교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죠. 문인들도 그렇고 학자들도 그렇고 공연예술가들도 그렇고요.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을 또 인용하자면, 그분 말씀 중에 “진실이란 결국 진실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이라는 것도 완전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작가는 본인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문장으로, 글로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온전히 담을 수 없지요. 방금 말씀드린 언어의 불연속성, 불완전성 때문에요. 그렇지만 되도록 제 둘레의 세계를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애는 씁니다. 그러다보면 고스란히 담을 수는 없어도, 큰 왜곡 없이 담을 수는 있지요. 이건 사실 쓰는 사람 문제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언어의 세계 재현능력이 불충분하니까,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도 어떤 텍스트를 대할 때 꼼꼼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오독을 피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 텍스트가 세상에 과연 많은가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합니다.


“모든 글은 위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라고 한민형은 말한다. 글이 사람을 100% 반영하지 못한다, 라는 말은 필자나 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아니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예를 들어 노동자나 소수자를 옹호하는 글을 자주 발표하며 진보주의자로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정작 자신은 돈과 권력을 지닌 사회의 기득권층이고, 가끔 청탁을 받기도 하며 자기 아이들은 조기 유학을 보내거나 특목고를 보내는 모습. 이 경우에 작가는, 그 사람은 노동자나 소수자를 옹호하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글이 사람을 반영하진 않으니, 독자들은 이 부분을 염두하며 글(메시지)만 취하라고 얘기하는 것인가?

그건 일차적으로 한민형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죠. 그건 또 한민형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제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저 자신이 문필가들을 포함한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질문자께서는 방금 어떤 사람의 글과 행위의 괴리만을 말씀하셨는데, 더 근원적 괴리는 글과 생각 사이에 있어요. 우리는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지요. 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누구를 파멸시키고 싶다는 생각, 세상이 금지하고 있는 연애에 빠져서 누구와 자고 싶다는 생각, 무언가를 훔치고 싶다는 생각. 그러니까 사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누구나 자주 할 겁니다. 이건 인간이 상상력을 지닌 동물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뇌는 온갖 깨끗하고 고귀한 생각들만큼이나 온갖 더럽고 비천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더럽고 비천한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건 고사하고 글로 쓰지도 못해요. 사실은 입밖에 내지도 못하죠.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이성적 판단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글은 위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는 없지요. 어쨌든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신이 판단한 원칙들을 내세우며 남들과 어설프게나마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자기 본능이나 생각이나 행동과 유리된 글을 절대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글이라는 것의 그런 자기미화적 성격을 고려해서 독자들이 그 메시지만 취하라는 겁니다.

책 만드는 게 일이다보니, 저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러면서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 고작 서른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사람이라는 종(種)에 대한 신뢰가 점점 옅어진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이유와 목적이라? 그런 건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금기라고 여겨지는 것 중 하나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이 소재를 다루고자 한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제가 소설이라는 데 발을 담근 얼마 뒤부터 꼭 써보고 싶은 게 둘 있었어요. 하나는 로베르트 무질 식의 극단적 관념소설이에요. 무질의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세 해 전에 낸 『독고준』이 그런 관념소설이죠. 서사보다는 관념의 줄타기에 더 관심을 보이는 소설. 거기엔 저 자신의 아주 위태롭고 고립된 정치적 입장이 반영돼 있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저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에만 기대서 세상을 판단하는 캐릭터의 머리속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선 그런 사람들을 회색인이라고, 다소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부르죠. 저는 스스로 회색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회색인의 초상이 『독고준』입니다. 사실 그 소설 자체가 최인훈 선생님의 『회색인』과 이어지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소위 문명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사랑 얘기를, 그러니까 금지된 사랑 얘기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게 『해피 패밀리』죠. 그러니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소설쓰기에 대해 욕심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얘긴 다 했거든요. 이유와 목적이라?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거구요. 그냥 제 내면의 욕망이었겠죠.

또 이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것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아무튼 이건 단편으론 쓰기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장편거리로 남겨둔 겁니다. 단편으로 썼다면, 이런 추리소설 형식을 취하긴 어려웠겠죠. 사실 『해피 패밀리』에는 다분히 추리소설적 성격이 있잖아요.


“어쩌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자의 모습”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루기가 어려웠던 인물이 누구인가? 왜 어려웠는가?

한민희라는 인물이에요. 이 사람에게 일종의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을 부여해야만 했으니까요. 소설 속 다른 캐릭터들은 죄다 제 나름대로 일관성을 띠고 있는데, 한민희는 그렇지 않죠. 퇴폐성과 순정을 함께 지닌 여자죠. 사실 제가 일부러 그런 성격을 한민희에게 부여하기도 했고요. 어쩌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도 이 소설의 인물들 가운데 한민희에게 가장 정이 갑니다.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민희는 여러 형태의 위험한, 그러니까 세상에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현실 속의 사람들은 대개 한민희처럼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성격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질 않아요. 그러니까 한민희는 가장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성의 현실성이라고 말해도 되겠죠.

유럽 신화의 요정 같은 아이. 탐미 속에 윤리를 감추고, 윤리 속에 탐미를 숨기던 아이. 천사의 육체에, 사시미의 와사비처럼 악마의 쏘는 맛을 살짝 묻히고 다녔던 아이. 그 쏘는 맛 때문에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눈물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과 숨탄것들을 위해 아껴둡시다.”

트위터 등을 통해 작가는 자기 연민이 없음을 종종 밝히곤 한다. 역으로 자기 연민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경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자기 연민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흉한 연민이 자기연민이죠. 자기연민은 자존감의 대척에 있는, 아주 비루한 자기애이기 때문이에요. 연민이 향할 자리는 자기 바깥의 인간 세상이나 온갖 숨탄것들이지 자기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엔 자기연민을 지닌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그런 자기연민은 대개 팔자타령으로 드러나는데, 설령 팔자라는 게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걸 바꿀 수 없다면, 자기연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팔자라는 건 ‘바꿀 수 없다’는 걸 전제하는 건데요. 이와 비슷하게, 저는 자기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도 흉하다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남들을 위해, 정말 불행한 사람들과 숨탄것들을 위해 아껴둡시다. 물론 남들을 위한 눈물이라는 것도 그 남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흘리는 거겠지요. 우리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동일시의 대상이 포악한 권력자라면, 그러니까 사실상 흉악범죄자라고 할 수 있는 권력자라면, 아주 보기 흉할 것 같아요. 김일성을 위한 눈물, 히로히토를 위한 눈물, 박정희를 위한 눈물 같은 거요. 우리가 과거에 봐온 눈물들이죠. 그 사람들이 죽었을 때 말입니다.

민형 형에게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있다. 꼭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꼭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숨탄것들에 대해서 말이다....세상과 숨탄것들에 대한 그의 연민이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자기 연민이 거의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 같다. 그의 연민은 오로지 그의 몸 바깥으로만 향한다.

“어떤 상처는 저를 자살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했지요.”

한진규는 사법시험에도, 행정고시에도 합격하지 못해 “내 인생이 항상 뭔가 모자라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마, 이런 식의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아마 대부분이지 않을까? 작가는 어떠한가.

자격지심이라는 말은 정확한 것 같지 않군요. 제 경우, 삶이 그리 평탄치는 못했던 터라 이런저런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고등학교에서 떨려나 어린 낭인 생활을 하기도 했고, 대학엘 아주 어렵사리 들어가기도 했고,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기도 했고, 집안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기도 하고요. 또 좀 끔찍하고 대단히 사적이어서 이 자리에서 밝힐 순 없지만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준 경험들을 적잖이 했습니다. 어떤 상처는 저를 자살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했지요. 그런 상처들 중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고요. 그렇지만 바로 그 상처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제가 아무런 상처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그 상처 덕분에 제가 불행한 사람들의, 그러니까 상처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그런 상처들의 근원에는 또 제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는 귀찮고요, 그냥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만약에 전라도 사람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약한 것들에 대해 연민을, 연대감을, 사랑을, 존중심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그 점에서 저는 제가 전라도 사람인 걸 다행스럽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민형을 저 자신과 포개지는 말아주세요.”

서현주의 밝음, 튼튼한 낙관주의, 불가사의한 생기가 한민형을 서현주에게로 이끌었다. 실제로 작가는 밝고, 낙관적인 사람에게 끌리는가?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민형을 저 자신과 포개지는 말아주세요. 제 자신의 일부분이 그 캐릭터에 투사돼 있기는 하겠지만, 저는 그런 무책임한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한민형이 본인에게 한 질문이다.
 작가가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네, 있습니다. 다섯손가락을 다 접을 수 있겠는데요.


작가의 마지막 소설, 아니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고 한단다. 정말 그럴까? 만약 작가가 글이라는 것을 다시 쓰게 된다면 어떤 경우일까?

다시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서 답변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해피 패밀리』는 제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습니다.”

작가에게 『해피 패밀리』는 어떤 책인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따지고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글쟁이 생활을 마감하는 책이죠. 책을 정신의 자식이라 말하는 상투적 표현을 빌려온다면, 『해피 패밀리』는 제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나마 일종의 과격한 일탈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잊을 수 없는 책이 될 겁니다.


『감염된 언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독창적인 언어관 때문

마지막으로 작가가 꼽은 작가의 대표작(3권에서 5권 정도)과 그 책의 소개를 부탁한다.

글쎄, 뭔가를 선택한다는 건 다른 것들을 배제한다는 뜻이죠. 세 권을 뽑으라면, 거기 선택되지 못한 책들이 서운해할 것 같군요. 그래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씀 드릴게요. 첫째, 『감염된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제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그 책이 드러내는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언어관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학자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주류 언어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견해들이 많이 개진돼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군요. 이 책은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돼 있어요. 둘째,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책이 있어요. 한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 쉰 권을 리뷰한 책인데, 이 책에 묶인 텍스트들 역시 시인들에 대한 대다수 문학비평가들의 합의된 평가를 많이 거스르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정지용 시인이나 고은 시인이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머지 한 자리는 저의 다른 책들 전부를 위해 남겨둡시다. 그 책들 모두가 후보작이 되도록. 그래야 그 책들이 서운함을 덜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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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고종석 저 | 문학동네
고종석의 신작 소설, 세 번째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친근하고 가깝다 여겨온 ‘가족’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날카롭고 서늘하게 파헤친다. 소설은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민형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아들이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인 아버지 한진규, 고등학교 역사교사이자 어머니인 민경화, 한민형의 처이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서현주, 한민형의 동생인 한영미와 한민주, 대학 후배인 이정석, 장모인 강희숙, 딸 한지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민형의 누나 한민희까지 모두 화자로 나서 각자의 사연과 감정 들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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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희

독서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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