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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스페셜] 함정임 작가가 성석제 선배에게 띄운 편지

성석제라는 신화, 그 재미나는 작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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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성석제라는 이름은 제게 신화로 통합니다. 좀처럼 화들짝 놀라지 않는 선배님도 ‘웬, 신화?’ 하면서 그 깊은 두 눈을 반 박자 여유를 가지고 꿈뻑하며 고개를 갸웃하겠지요. 그러거나말거나, 노드럽 프라이를 흉내내서 제멋대로 일단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집중탐구] 이야기의 달인, 인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 성석제

대표 이야기꾼. 성석제 작가에게는 마치 이름에 성이 따라붙듯, 그를 소개하는 자리마다 따라붙는 수식어다. 소설가는 모두 이야기를 빚는 사람인데, 그중에서도 빼어나게 이야기를 맛있게 짓는다고 하여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를 데뷔 때부터 독차지했다. 유행이 뜨고 지고, 소설도, 새로운 작가의 얼굴도 뜨고 지는 시간 동안 성석제 작가는 꾸준히, 오직 소설가라는 직함 하나로 한 길을 걸어왔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달인인 셈이다. 채널예스 5월의 집중탐구는 성석제 소설가다. 성석제 작가의 인터뷰, 그간에 작품집 리뷰, 함정임 소설가의 편지를 함께 싣는다.


[리뷰]
성석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대표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
[스페셜]
함정임 작가가
성석제 선배에게




석제 선배님께,

정식으로 선배님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쓰는 것이 아마 처음인 듯하군요! 그래서인지, 그동안 선배님과 만나 나누어온 대화와는 다른 어떤 것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불길하다는 것은 평소 하지 않던 고백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즉흥을 사랑하는 저이지만, 마주 보고는 차마 못할 말이 이렇듯 편지라는 형식의 글에서는 두서없이 흘러넘치기 일쑤이지요. 불길한 예감을 거스르지 못할 바에는 순순히 따라가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그러자니 너무 많은 장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몰해서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아, 그렇지요, 이렇게 츨발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성석제라는 이름은 제게 신화로 통합니다. 좀처럼 화들짝 놀라지 않는 선배님도 ‘웬, 신화?’ 하면서 그 깊은 두 눈을 반 박자 여유를 가지고 꿈뻑하며 고개를 갸웃하겠지요. 그러거나말거나, 노드럽 프라이를 흉내내서 제멋대로 일단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공개편지를 쓰려니, 운 떼기가 쉽지 않네요) 선배님도 좋아하실 저 『황금 가지』의 저자 프라이 말입니다. 그에 따르면 신화라는 게 별 것 아니지요. 어떤 이야기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에 맞닥트리는 것이 바로 신화이니까요. 네, 저는 지금 성석제라는 인간, 아니 소설가, 아니 시인을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그러니까 신화의 현장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때는 1986년 5월 30일, 신촌의 이화여대 캠퍼스. 그곳 학생회관 앞 작은 숲에는 한창 불문과 시화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대학 3학년생인 저는 그때 웬 바람이 불었는지 언밸런스 숏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고, 파란색 원피스에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습니다(이 사진은 <<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에 화보 사진으로 실려 있지요).

아, 축제군요. 저는 창작지망생이 아니고, 프랑스시 전공학회를 이끌고 있네요. 그런 연유로 저는 축제 기간 프랑스시 전공자들이 주축이 된 시화전에서 호스트입니다. 갤러리스트처럼 시화전을 주재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으려는 중에, 무엇인가, 낯선 물건이, 거기,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놓고 간 것이 틀림없는 그 물건을 저는 곧바로 집어들지 못하고 상체를 숙여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책인데, 책이되 <문학사상>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한 제호의 책을 처음 본 저는 정체를 파악하려고 표지에 올라와 있는 글자들을 훑어봅니다.

그 글자들 속에 ‘성석제’라는 이름이, 그 옆에는 ‘신인상’이라는 타이틀이, 또 그 옆에는 ‘유리 닦는 사람’이라는 또 다른 타이틀이 안드로메다의 형상으로 박혀 있습니다. 아무리 반짝이는 별이라고 하더라도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대학 3학년 오월, 꽃다운 시절에 만난 안드로메다의 별빛은, 시간의 위력 앞에 빛을 잃고, 저는 그 이름들을 감감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2년 뒤 1988년 초겨울 저물녘, 저는 광화문 근처 적선동 현대빌딩 지하에 있는 던킨도너츠집 테이블에 성석제라는 시인과 마주 앉아 있습니다. 그날을 기억하시나요? 어떤 계시였던지,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날 벤치에 누군가 우연히 놓고 갔던 바로 그 <문학사상>의 기자가 되어 있었고, 선배님은 신인 시인으로 제 필자가 되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국내에 출간된 함정임 작가의 저서들



그 사이, 저 역시 시로 대학문학상을 받아 햇병아리 기자이지만 저도 모르게 예비 시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던킨도넛집에서 선배님을 만난 것은 시 원고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절 기자의 일 중의 하나는 청탁한 시인이나 작가, 즉 필자의 원고를 받는 일이었지요. 세 가지 방식으로 필자는 원고를 기자에게 전달하는데, 하나는 우편으로 보내주는 것이고, 둘째는 그날처럼 직접 잡지사나 근처 찻집에서 건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기자가 직접 필자의 댁이나 직장을 방문하여 받아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방법은 대가나 원로 작가의 경우가 많고, 두 번째 방법은 신인의 경우가 그러하지요. 그날, 선배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첫인상은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점심시간과 퇴근시간 무렵 빌딩의 회전문을 밀고 나가면 빌딩숲 도처에서 만나는 도시의 샐러리맨들과 선배는 어딘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을 저는 입지가 아직은 뚜렷하지 않은 데뷔 3년차 신인 시인의 어리숙한 표정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 시를 청탁해서 직접 건네받던 1988년부터 1996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날 이후 저는 선배님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1990년 광화문의 <문학사상>을 떠나 강남구 포이동으로 막 자리를 잡은 세계사의 <작가세계> 편집장으로 옮겨 갔지요.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데뷔를 하게 되었구요. 소설가이자 계간지 편집자로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그 시기 한번쯤 만날 법도 했는데, 선배님은 소라달팽이처럼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1996년인가요? 한승오, 정영목, 정홍수, 안찬수, 김소진 등이 주축으로 홍대 앞에 강이라는 출판사를 열었을 때,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선배님이 얼굴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이전에 제가 알던 신화 속의 그 분,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저처럼 광화문을 떠났으되 전국을 유랑하는 자유인이었고, 소설가였고, 그리고 바둑의 고수였습니다.

소설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요? 아니 신화의 속성은 그런 것일까요? 한 켜 한 켜 서사의 씨실과 날실이 작동하여 한 판 그럴 듯한 이야기가 그려지기까지 범상하지 않은 삶의 이력을 거느려야 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선배님을 강출판사에서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는 광장에서의 청춘기를 떠나보내고 패잔병처럼 흩어졌다가 거기 강에 모인 사람들이었고, ‘주어진 운명으로서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위풍당당』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그들은(저는 주로 관객의 역할 또는 후원자의 역할로, 주로 먹거리와 차량을 담당했지요) 서로를 부추기며 제 안에 품고 있던 흥을 조금씩 풀어내놓으며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적 삶의 유대를 어깨동무하듯 엮어나가기 시작했지요.

그들과 함께, 더불어 선배님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짠하고도 환했던 시절로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렇게 기억된다는 것은 이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련이 닥쳐와 우리 모두를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의미이겠지요. 조금은 철없고, 조금은 해탈한 듯 익살과 평화가 함께 했던 강출판사, 그 강출판사의 대표 선수 김소진이 『자전거 도둑』으로 위풍당당 첫 테이프를 끊는가 싶더니 갑자기 암으로 쓰러진 사건 말입니다. 그의 삶의 반려이자 소설 동료, 동시에 그의 매니저였던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강 식구들 모두에게 동일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40일 만에, 옆에서 느껍게 웃고 때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치고 그러다가 진지하게 글을 썼던 우리의 동지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02.JPG
문우 정홍수와 부산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문청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 사진 함정임, 2011

놀라운 것은, 세월이 흘러 무한 지옥 같던 당시의 순간들이 언뜻언뜻 되살아날 때면, 그리고 그 시절을 건너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배님이 항상 옆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야 했을 때, 의사로부터 운명의 검사 결과를 받으려고 가슴 조이며 서 있을 때, 결국은 어찌할 수 없이 용인의 산야에 묻어야 했을 때, 그리고 매년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정홍수, 진정석, 안찬수 등 강에서 만난 식구들과 하루 소풍 삼아 그를 찾아갈 때 선배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눈부신 봄 햇살 아래 선배님 특유의 유쾌하고 능청스러운 화법을 저는 얼마나 기렸던지요. 가슴 속 깊이 박힌 천형과도 같은 상처를 그 순간만큼은 말갛게 씻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하거나 지상이거나 소설가의 마음을 위무하는 선배님이야말로 소설가 중의 소설가라고 여기곤 했습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핀 꽃은 또한 어김없이 지기 마련이듯이, 강물은 흐르고 그 흐름처럼 시간은 흘러가버렸지요. 우리의 인생 또한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김소진 이후 강은 IMF 여파로 해체 위기에 있었고, 선배님은 자신의 혈육들(『재미나는 인생』,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아름다운 나날』, 『즐겁게 춤을 추다가』 등등)을 내주어 강의 맥을 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로알드 달이라는 반전의 귀재를 소개하여 한 경지를 이루도록(『맛』,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개조심』 등등) 힘을 실어주셨지요. 편집자로 세상에 첫 발을 디딘 관계로 저는 한 작가의 작품은 그 작가의 기질, 기품, 기량의 파편들로 봅니다. 한 작가의 걸작은 평생 한두 편 생산되는 게 보통인데, 선배님의 경우 선배님의 그 많은 걸작들을 다 합쳐도 ‘인간 성석제라는 작품’에는 견줄 바가 못 된다고, 감히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저를 섭섭하게 생각하실까요?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몇 번 일산의 제 집에서는 몇 몇 문우들과 조촐하게 파티를 벌이곤 했지요. 와인이 귀할 때였고, 좋은 와인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선배님 생각이 났지요. 치즈와 샐러드, 올리브 등속과 제철 요리를 만들어 와인을 마시며 방담을 했는데, 그때마다 중심은 선배님이었습니다. 와인에 대한 해박한 입담과 여행담, 요리담으로 밤은 깊어갔고, 와인 담화에 흠뻑 취하신 선배님은 청아하고 고적한 목소리로 이태리 가곡을 부르곤 했습니다.

저는 가만가만 그러나 부지런히 식탁에 음식을 갈아 놓으며 기형도 시인과 절친이셨고, 둘이 곧잘 듀엣으로 불렀다던 전설의 <두 사람의 척탄병>(슈만)을 청하곤 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시절엔 성악으로 난파음악제에 나갔던 남모르는 기이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선배님의 노래를 누구보다 열청했습니다. 중후하고 박력 있는 남저음의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대학 축제 벤치에서 들여다보던 신인 시인의 이름, 광화문 현대빌딩 지하 던컨도너츠집 테이블에서 바라보던 시인의 얼굴, 강출판사에 새롭게 등장했던 소설가의 모습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님이야말로 제가 문청시절 매혹당했던 기형도와 제 삶과 문학의 반려였던 김소진을 두 손으로 보듬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것이 깜짝 알게 된 사실처럼 저를 놀래켰습니다. 해마다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선배님은 3월 초면 안성으로 벗 기형도를, 4월 말이면 용인으로 또한 벗 김소진을 만나러 가지요.

소설가로 살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기쁨이지만, 좋은 문우, 특히나 소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웅숭 깊고 재미나는 선배님과 함께 문학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지복이지요. 오늘은 5월 30일, 공교롭게도, 선배님을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이네요. 야심한 시각도 아랑곳 않고 호숫가 제 집 창가에서 거기 모인 후배 문우들의 어깨를 도닥이듯 ‘위풍당당’하게 불러주셨던 <두 사람의 척탄병>을 듣고 싶은 아침입니다. 밤이 오기를 기다려 선배님의 신작 소설 『위풍당당』을 동행 삼아 달맞이 언덕의 문탠로드를 거닐어보아야겠습니다. 거기, 바다가 보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아, 노래 부르듯, 소설 한 대목 펼쳐 낭송해야겠습니다. 아, 드보르작의 아리아가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알려줘,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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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정임

咸貞任 90년대 한국문학의 한 줄기를 만들어온 여성작가다.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와 스물여섯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대학에서 프랑스 시와 현대 부조리극에 경도되었고, 거리와 광장보다는 도서관과 지하 소극장을 전전했다. 그때 대학 문학상에 시가 가작으로 뽑히는 바람에 제도권 문학지의 청탁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 문학지의 기자가 되었다. 그 후 계간지 편집장과 출판사 편집부장으로 일하며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문 편집했고, 프랑스 대사관 도서과에 다년간 협력했다. 현재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 창작과 이론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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