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고 말하는 시인, 오은의 여섯 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직업이 아니기에 매일 시를 쓰진 않지만, 우연인 듯 찾아오는 시적인 순간은 매일 발견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 지난 5년간 만난 숱한 감정의 조각들을 모았다. 그는 시집을 앞에 두고 '있었다'와 '없다'가 지닌 상실의 감각을 자주 이야기했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그것들」 중)'이지만, 오은의 시는 우리를 슬픔에만 가두지 않는다.
'잃었다'의 자리에는 '있었다'가 있었다.
_ 시인의 말
불투명하게 시작해 투명하게 가닿는 시
지난 3월, <책읽아웃>에서 시집이 곧 출간된다는 소식을 전하셨죠. 드디어 나왔습니다!
'봄이 가기 전에는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기다렸어요. 막상 시집을 받아 드니 이질감이 드네요. 여러 차례 교정지를 들여다봤지만 물성을 가진 책을 보니 색다른 기분이에요. 지난 5년간 쓴 시들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이 시집을 들여다보는 게 저의 지난 시간을 복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본 것처럼 한동안 열어보지 못했어요.
지금은 시집을 열어보셨어요?
어젯밤에 처음으로 읽었어요. 책을 받은지는 나흘 정도 되었는데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친 거죠.(웃음) 읽고 나니 더 잘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취의 문제가 아니고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최상의 방식이었을까'하는 아쉬움이죠. 그때의 오은은 이렇게 썼지만, 지금의 오은은 다르게 쓸 것 같은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 변화를 읽는 게 아주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2023년의 제가 '과거의 오은은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어요.
오은의 시집답게 이번 표지도 주황색입니다.
주변에서 주황색에 미련을 버리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도 이번에는 하늘색 표지를 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주황색을 선택하게 됐어요. 마치 저의 시그니처 컬러처럼 되어서, 이제 주황색을 보면 제가 떠오른다는 말씀을 해주는 분이 많았거든요. 때로는 그 물건을 지나치지 않고 구입해서 선물해 주거나,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는 친구들도 있고요. '이 사람들이 나의 변절을 달갑게 받아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일곱 번째 시집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한참 고민을 하다가 또 주황을 택하게 될까요?(웃음)
<오은의 옹기종기>의 공식 질문을 시인님께도 드리고 싶어요. 이 시집을 직접 소개해 주신다면요?
시 「그것」에 '수수께끼를 내지도 않았는데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시집이 그런 것 같아요.는 저 스스로에게,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함께 푸는 심정으로 쓴 시집입니다. 대명사는 명사를 대신하는 것이잖아요. 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전라도에서는 어른들이 무언가 생각나지 않으면 다 '거시기'라고 통칭하셨어요.(웃음)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도 고유명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다 한 템포 늦게, 불현듯 떠올라 아쉽고 허무해지는 순간들이 있죠. 그런 시차를 담은 시집이에요.
상실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상실은 너무 커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두 쏟게 되잖아요. 내 인생의 커다란 부분이 없어졌다는 것을 선명히 감각하게 되고요. 반면, 어떤 상실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그 부재를 깨닫곤 해요. 바쁘게 살다 보면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들이 점점 바래 가기도 하고요. 이렇게 찾아온 어떤 상실에 대한 감각으로 쓰인 시집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질문을 맞닥뜨리니 그동안 <책읽아웃>에 출연한 작가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네요. 대답하기가 참 어려운 질문이었군요.(웃음)
시집에 실린 시의 제목이 모두 '그곳', '그것들', '그것', '그들', '우리' 같은 대명사로 지어져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시를 읽으며 수수께끼를 푸는 심정이었어요.
제목과 시의 내용이 딱 맞아떨어질 때 오는 쾌감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제목은 일종의 '가두는 행위'잖아요. '이 사람은 부자야, 이 사람은 두 아이의 엄마야'처럼 누군가를 무엇으로 특정하면, 고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의 제목들을 아예 대명사로 정했죠. '불투명한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독자는 투명하게 시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시에 진입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이게 대명사의 힘인 것 같아요.
'없다'가 동사가 될 때
제목이 독특합니다. 시집 2부에 실린 시 「그」에 등장하는 한 구절 '없음의 대명사'가 제목이 되었어요.
사실 출판사에 처음 원고를 보냈을 때 지은 제목은 '있었다'였어요. 어느 날부터 문장의 종결 어미 '있었다'가 계속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있었다'와 '있다'는 달라요. '있었다'라는 건 어쩌면 '지금은 없다'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죠. '없다'는 상실이 정리된 느낌이지만, '있었다'는 상실의 여운이 남은 느낌이고요. 그런데 제 이전 시집 제목이 였기 때문에, 새로운 제목을 찾아야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원고를 들여다보는데 시 「그」의 한 구절인 '웃음의 대명사'가 눈에 띄더라고요. 보자마자 '아 이거다!' 싶었는데, 또 다른 고민이 생겼어요.
어떤 고민이요?
불친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목을 보면 웃긴 시집을 기대하게 될 텐데, 내용은 그렇지 않잖아요. 어쩌면 독자가 배신감을 느낄 수 있겠더라고요. 사실 '웃음의 대명사'라는 구절은 '찰리 채플린'을 생각하며 썼어요. 찰리 채플린의 익살맞은 행동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지만, 저는 그의 표정이 너무 슬프게 보이거든요. 어쩌면 모든 웃음에는 울음의 성분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슬픔에 침잠되어 있는 장례식장에서도 간간이 웃음이 번지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 웃음 덕분에 슬픔이 아주 넘쳐서 사람들을 휩쓸어 버리지 않고 사흘을 버틸 수 있게 만들고요. 이러한 연유로 '웃음의 대명사'라는 제목이 슬픔을 내포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직관적이지 않은 건 좋은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같은 시에 나오는 다른 구절인 '없음의 대명사’가 제목이 되었죠.
개인적으로 제목이 정말 좋았어요. 시집의 슬픈 정서를 더 극대화하는 느낌이더라고요.
'없음'은 '없다'라는 동사이자 형용사의 명사형이지, 명사로 쓰이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없음의 대명사'라는 문장은 어색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감행했죠. '없다, 있다'는 특이해요. 동사이면서 형용사거든요. 움직임을 뜻하기도 하면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어요. 혹시 '없다'의 동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형용사 '없다’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동사로 '없다'는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없다'에 그런 뜻이 있는 줄 전혀 몰랐어요.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가 갑자기 슬프게 다가오네요.
라는 제목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난항이 있었던 건 '없다'의 두 번째 뜻에 닿기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사전에서 그 의미를 보는 순간 '내가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서 먼 곳을 돌아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첫 번째로 수록된 시는 「그곳」입니다. 꿈속에 아버지가 찾아오신 장면을 말하고 있는데요. 2020년 7월, 트위터에 올리신 글의 일부가 시가 되었어요.
201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종종 추모 공원을 찾아뵈었지만 한 번도 제 꿈에 나타나신 적이 없어요. 아버지를 뵙고 올 때마다 저는 늘 축축해져서 돌아와요. 잘해드린 것보다 못 해 드린 게 마음에 더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날 밤 꿈에 나오셔서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라고 하셨어요. 번뜩 잠에서 깨서 시간을 봤더니 새벽 3시더라고요. '어제는 내가 갔지만, 지금은 오늘이 되었으니까 아빠가 왔다고 말씀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을 메모했죠. 그 꿈을 꾸고 굉장히 벅차올랐어요. 좋음과 슬픔, 복합적인 감정이 응축된 벅차오름이어서 그 감정을 계속 가지고 다녔죠.
「그곳」의 마지막 문장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을 보니 명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밝음, 유쾌함'과는 견줄 수 없는 명랑만의 정서가 있어요.
그 꿈을 꾼 다음 날, 저는 여느 때처럼 강연을 하러 가서 하하호호 떠들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이게 명랑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웃음에서 울음의 성분을 발견한 것처럼, 아무리 슬퍼도 울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담긴 단어가 명랑인 거죠. 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시인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명랑'이라는 단어에서 슬픔을 발견하거나, '없다'라는 단어에서 '있었다'를 환기시키는 것 등이 제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작게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이번 시집에서도 언어의 재미, 단어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시가 많았습니다. 특히, 된소리에 대한 시 「그것들」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편견을 갖게 되면 발음할 때 없던 화도 만들어지게 돼 있어.'라는 문장을 보고 뜨끔하기도 했는데요. 어떤 생각으로 시작된 시인가요?
한때 발음을 명료하게 하고 싶어서 아나운서를 동경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효과'를 '효꽈'라고 발음하는데, 아나운서들은 늘 '효과'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발음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웃음) 그때 된소리가 주는 강력함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사람들이 언제 된소리를 쓸까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강력하게 어필하고 싶을 때인 것 같아요. '눈'이 있지만 '눈깔'이라고 하고, '코'가 있지만 '코빼기'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 단어들을 한참동안 모은 후에 쓴 시예요. 저는 언어적인 모티프가 잡힌 시들은 한 번에 쓰지 않아요. 메모장에 차곡차곡 자료가 쌓인 다음 쓰기 시작하죠.
받아들이면 작은 이야기가 찾아온다
2018년 펴내신 시집 에 실린 에세이에 '울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고 쓰셨죠. 이 시집을 보며 그 문장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화가 '파울 클레'가 "나는 울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생각해 보니 저는 울지 않으려고 시를 쓰는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제 별명은 울보였어요. 그런데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울음을 참게 됐죠. 스스로 그러면 안 된다고 자각했을 수도 있고, 주변의 잔소리 때문일 수도 있을 텐데요. 눈물은 참을 수 있어도, 마음 안의 울분이나 슬픔은 여전히 남아있잖아요. 그것들을 소화하고 싶어서 내가 왜 슬프고 억울한지 써 내려갔던 것 같아요.
물론 글을 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슬픔의 연원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옅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잘 울어요. 그래도 계속 더 유쾌해지고 싶죠. 저는 첫 시집을 낼 때부터 슬픈 것을 슬프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해왔어요. 분명 재미있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상하게 슬픔 같은 것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시를 쓰고 싶죠.
지난 몇 년간 소중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상실을 경험하셨잖아요. 시를 쓰는 게 슬픔을 견디는 데도 도움이 되었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산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흔히 산책을 휴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에게는 일종의 모험이에요. 어제 못 봤던 장면을 오늘 꼭 발견하고 싶어서 긴장을 많이 하고 걷거든요. 슬픔도 그런 것 같아요. 너무 커다란 슬픔이 와있으면 사람들은 꼭 슬픔의 경중을 따지더라고요. '내가 더 슬퍼. 내가 더 아파'라고요.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표현할 수 있고, 이 슬픔이 옅어질 때쯤 또 다른 슬픔이 드러나서 생전 마주한 적 없던 감정을 만나기도 해요. 저는 어떤 감정덩어리들을 갖고 다니다가, 그것이 다른 감정과 만날 때 외면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요. 슬픔에는 어떤 결이 있고, 기쁨에는 얼마나 다양한 색이 있는지 들여다보는 거죠. 나에게 찾아온 감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지난 몇 년간 저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큰일을 겪고 나면 삶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잖아요. 시인님은 어떠신가요? 달라진 삶의 태도가 있으세요?
2009년에 교통사고가 나서 1년 가까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로 인해 생사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있었고, 깨어난다고 해도 전과 같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요. 그 사고와 아버지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좀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단순히 '잘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구나'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물론, 받아들인다는 게 극복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하지만 일단 수용을 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몹시 어렵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받아들이는 게 긍정의 첫 번째 절차라고 생각해요. 자기 부정을 하거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지'라고 세상을 탓하기보다 '이 일을 어떻게 잘 받아들일까'를 고민하면 디테일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더라고요.
이를 테면요?
아빠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떠올리는 건 커다란 질문이에요. 반면, 길을 걷다가 어느 나무를 보고 '저번에 산책할 때 아빠가 저 나무 이름 알려줬는데 뭐였지? 또 까먹었네'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건 작은 디테일이죠. 마치 중요한 순간에는 말하고 싶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떠오르는 것과 비슷해요. 그때 본 나무 이름이 '칠엽수'였어요. 이파리가 7개라서 칠엽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아버지 덕분에 알게 됐죠. 나에게 온 슬픔을 받아들이고 나니 이렇게 작은 이야기들, 아주 사소한 장면들을 계속 만나게 되더라고요.
5년만에 출간된 시집입니다. 시인님의 시집을 기다린 독자들이 많을 텐데요.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잊다'와 '잃다'의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상실을 의미하고요. '잊어버리다, 잃어버리다'라는 꼴로도 쓰인다는 거죠. '잊다, 잃다'에 '버리다'가 결합되면 상실을 더 크게 만드는 느낌이에요.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을 새로 들여다보고 싶으신 분들께 이 시집이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또, 누구나 살면서 상실에 초연할 수는 없잖아요. 상실과 함께 잘 살고 싶으신 분들께서 이 시집을 읽으면 반응해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스스로를 '웃음의 대명사'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울음의 대명사'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집을 받아 들었어요. 대명사는 어떤 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이잖아요. 독자분들도 자신이 무엇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책장을 덮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은 등단한 순간과 시인이 된 순간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정말이지 열심히 한다.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을 많이 다치기도 했다. 다치는 와중에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삶의 중요한 길목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을 하다가 마주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쓸 때마다 찾아오는 기진맥진함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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