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진, 재난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점거당한 집』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예술이 재난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예술이 모든 슬픔을 대신해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슬픔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의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최수진 소설가가 그랬듯이요. (2024.09.20)
『점거당한 집』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은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이면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2031년에 원전사고가 발생했고, 그 여파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인물들은 광주와 용인, 경주 등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 2030년대와 2040년대에 걸쳐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그들에게는 재난 이후의 사회를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고, 세상을 대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투쟁의 현장을 기록하는 이가 있고(「길 위의 희망」), 예술로 균열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고(「점거당한 집」), 타인의 삶과 문학을 기억하려는 이가 있다(「금일의 경주」). 그들의 이야기는 ‘재난을 겪은 사회에서 시민과 예술과 기록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질문을 남긴다.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인 『점거당한 집』은 실재하는 공간과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중첩시켜 기묘한 감각을 일으킨다.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 경주 시내와 근현대사박물관 등 낯익은 장소와 조우하게 된다. 이 만남은 소설 밖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사계절 출판사는 ‘최수진 작가와 떠나는 경주 문학여행’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금일의 경주」에 등장하는 너른벽 서점에서 독자들을 만나 ‘경주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고. 북토크는 10월 3일에 진행될 예정이며,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수상 소감에서 “실은 얼떨떨하고 무서웠다. 뽑히지 않을까 봐 마음의 벽을 높이 세우고 버틴 탓이다”라고 밝히셨어요. 실망하기 싫어서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어요?
네, 맞아요. 그런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친절하게 최종심에 올랐다는 걸 알려주셨거든요. 떨어지면 떨어졌다고도 알려주시던데, 진짜 좋은 것 같아요. 보통은 떨어져도 막연하게 모르다가 발표할 때 알게 되거든요. 사계절 출판사에서 최종심에 올랐다고 이야기 해주셔서 기분은 좋았지만 일단 잊고 있어야 했어요.
당선 연락이 왔을 때도 새 작품을 쓰고 계셨다면서요? 최종심 결과가 궁금해서 마음이 들떴을 것 같은데, 어떻게 계속 쓰셨어요?
회사를 다니기 때문이에요. (웃음) 아시겠지만 회사에 가면 모든 게 리셋 돼요. 그러니까 그런 기대감 때문에 쓰지 못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때 안 쓰면 안 되거든요. 멘탈이 어떤 상태이든 조금은 써야죠.
등단하기까지 작가님이 소설을 써오신 시간들이 궁금해요.
박지리 작가님은 스스로 소설을 쓰셨고, 그래서 굉장히 개성적인 작품들이 있으시잖아요. 저는 그런 편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기도 했고요. 특기자 전형으로 다녔어요. 그래서 소설 자체를 쓴 시간은 좀 오래 됐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린이들 가르치는 일을 겸하는데 주 3~4일 정도 일하고 있어요. 주 5일 직장을 다녔으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웃음)
문창과 학생들은 재학 중에 등단을 하지 못하면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아질 것 같아요.
많죠. 저희 학교 선생님 중에 전성태 소설가님이 계신데, 그 분이 진짜 무서운 개념을 만들어내셨어요. ‘종심이’라는 건데, 최종심에 계속 오르는데 떨어지는 일련의 문창과 학생들을 이르는 말이에요. 사실 저는 종심이도 아니었지만, 졸업할 때쯤에 ‘내가 종심이인가? 종심이가 나의 미래인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어요. (웃음)
취업을 하신 후에도 등단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셨어요?
네. 사실 최근에는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들이 생기기도 했고요. 등단도 등단이지만, 졸업하고 나서는 일단 먹고 사는 게 너무 중요했어요. 먹고 사는 안정감이 어느 정도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학교 밖에 나와서 일을 하면서 제가 예상하지 못하거나 좀처럼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글 쓰고 책 읽는 것 자체는 저한테 너무 중요한 일이어서, 그걸 안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글쓰기에 제 삶을 걸기는 하지만 그걸로 돈을 크게 벌겠다고 생각하면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았고요. 그래서 일단 직장을 찾고 일을 하면서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 남들한테는 재미없어 보여도 스스로 즐거운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에는 등단이 절대적인 길은 아닌 것 같아요.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죠.
맞아요. 20대 때까지는 사실 등단을 의식했어요. 왜냐하면 상금이 있고, (웃음) 어쨌든 인정을 받는 길이라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30대쯤부터는 어떤 길로 가더라도 글을 쓰고 책을 낼 텐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책으로 나오는 건 여러 자원과 자본, 인력이 투입되는 일이잖아요.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하시기 전에도 계속 투고를 하셨어요?
꾸준히 보내지는 않았고 몇 편 보냈는데, 멋지게 떨어졌죠. (웃음)
멋지게 떨어졌다는 말, 진짜 멋있어요!
아니에요, 멋있지는 않고요. (웃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엄청 어린 나이에 작가가 된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제가 그렇게 떨어졌었다는 이야기를 보고 힘을 얻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 프로필에서) 나이를 밝힌 것이기도 하거든요. 20대가 아닌 30대에 다른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22년 여름, 넓고 근사한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부를 기웃거리다가” 이 소설을 처음 떠올렸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으세요?
딱히 공간 감각이 좋지는 않아요. 공간이라고 말하면 범위가 되게 큰데,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에게 ‘집’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잖아요. 만약 안 좋은 집에 산다면 그 결과로 충당해야 되는 비용이 너무 많고요. 작가의 말에 썼듯이 제가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집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는데, 어떤 공간에 있으면 우리가 변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에서 광주, 용인, 경주를 등장시킨 건 의식적으로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을 다니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어요. 다들 서울과 서울이 아닌 지역의 개발 차이는 강하게 느끼고 문제시하지만 쉽게 해결책을 찾기 힘든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저도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광주라는 도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게 강하게 있었어요.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그런 참사에 대해서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조심하고 삼가야 하겠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이야기를 하고 멀어져 버렸을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광주에 대해서 생각하는 아는 바가 있어야 되는 것 같고, 그래서 구체적인 지역을 소개하고 밝혔던 것 같아요.
2022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다녀오신 후에 “살아보고 싶어지는 공간 발견”에 재미를 붙였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와 경주를 탐색하셨다고요.
경주에는 제 외가가 있어서 아기 때부터 다녔는데, 사실 너무 복잡한 마음이 있어서 말을 잘 못 하겠어요. 백남준아트센터는 「점거당한 집」의 배경이기도 한데, 그 소설에 키워드가 참 많아요. 예술과 그 예술로 재현한 공간 자체에 대한, 조금 추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도시와 지역적인 면에 대해서는 많이 조명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살아보고 싶은 공간’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나요? 소설 속에 원전사고도 나오고 시위대도 나오고, 묵직한 주제들이 담겨 있어요.
처음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갔을 때 그곳이 굉장히 커서 ‘이런 곳에서는 한두 명이 살아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면, 거기에 ‘사유의 방’이 있는데 방 하나에 의자만 있어요. 관객이 앉아서 통창을 보면서 사색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그 텅 빈 방의 크기가 제 원룸만 한 거예요. 그런 느낌이 들 때 있잖아요. 공공기관의 엄청 크고 텅 빈, 빛이 잘 들고 뷰가 좋은 공간을 보면서 ‘참...’ 하는 생각이 드는. 그때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런 가벼운 생각이 들다가 실제로 그곳에 구도청(옛 전남도청 건물)이 있으니까, 정말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안 이후에는 가벼운 이야기는 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의도를 했다기보다 그런 역사를 안 이상 책임 있는 이야기를 써야 했고, 그런 마음이 광주 편(「길 위의 희망」)을 쓸 때 있었던 것 같아요. 광주라는 도시에 대해서 잘 쓰고 싶은 책임감이 있었어요.
뒤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시민, 예술, 기록은 재난을 겪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점거당한 집』을 쓰실 때, 작가님도 이 질문을 붙들고 계셨나요?
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무겁게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쓰면서도, 퇴고하면서도,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들이 계속 움직이는 중인데요. 정확히는 ‘재난을 겪은 사회’에서 제가 신경 쓰는 것은, 그런 재난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참사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무뎌지는 일들이 있는 것 같고, 또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나 당장 나의 일상이 버겁기 때문에 피하는 경우들이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아요. 예술이 재난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저는 과장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이 해줄 수 없는 슬픔이 있고, 예술가가 당사자의 마음을 대신해 할 수 있다는 것도 오만한 생각인 것 같아요. 다만 예술은 그것을 조금 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 소설 속에서 예술가들이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예술을 만드는데, 그 자세 같은 것이 제가 생각하는 ‘예술이 해야 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각자가 해야 되는 일을 하되, 결국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와 장소에 묶여 있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자신으로서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한 거죠. 예술가이지만 시민이니까요.
세 소설의 화자 모두 관찰자, 기록자, 외부인이에요. 작가로서 갖고 계신 정체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한가요?
그런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재난에 대해서 작가로서 가진 의식이기도 한데, 우리가 재난을 말할 수 있으려면 약간의 거리감도 있어야 되는 것도 사실이라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너무 큰 고통과 슬픔이 있을 때 말이 잘 안 나오는 상태가 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화자들이 완전히 중심에 있지는 않고 살짝 곁에서 목격한 채로 (글을) 쓰는데요. 참사를 짊어지고 감당하는 당사자로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는 저도 계속 고민해 나가고 있는 지점 같아요.
「길 위의 희망」에는 “왜 다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부터가 이미 짐스러운 문제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어떤 의미일까, 계속 곱씹게 됐습니다.
화자의 말이면서 제 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걸 너무 무겁게 생각해요. 혹은 알기는 하지만 실감하지 않고. 아니면, 이건 정말 고약한 경우인데, 알기 때문에 그걸로 조롱하는 것 같아요. 세상에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짐스럽다’는 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쓴 건데요.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기에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역사를 아는 것이 버거운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요. ‘안다’는 말에도 여러 가지가 포함돼 있는데,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앎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A가 좋아서 B가 나빠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해요. A가 좋으면 B는 자동으로 나빠지는 경우들이 많은데, 역사의 많은 사실들이 그렇지 않잖아요. 역사를 안다는 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알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세운다는 건데, 그건 짐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이 소설은 제가 보기에 절대적인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거고, 허구의 역사이면서 역사를 알아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일종의 안내서일 수도 있어요.
짐스러운 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생각하게 되네요.
짐을 팽개치고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팽개치지 않는 게 소설의 역할인 것 같아요. 그것을 굉장히 자세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짊어진다면 역사서일 텐데, 짐을 약간 흩어놓는 게 소설인 것 같아요. 재미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짐을 짐이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들고 갈 수 없으니까, 조금 흩어놓기도 하고 갖고 놀기도 하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점거당한 집」의 박하니, 박한일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관에 살고 싶어 하는데요. 작가님이 처음 구상하셨던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작품일까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처음 아이디어를 얻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얹어져서 최초의 아이디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요. 거미줄처럼 돼서, 어디가 최초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 그 소설은 세 편 중에서 구조적으로 제일 복잡한데, 아마 ‘책이 정말 많고 더러운 집에 사는’ 것에서 시작됐던 것 같아요.
그런 인물을 떠올리셨군요. 누나 박하니 같은.
네. 정말 뜬금없이 떠올라서 쓰게 됐어요. 그때 대전 이응노미술관에 있었는데, 갑자기 ‘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입부를 썼어요.
남매의 대화가 인상 깊었는데요. 누나 하니가 동생 한일에게 이런 말을 하죠. “그렇게 안에 뭔가 잔뜩 집어넣었다면 반드시 꺼내놓지 않으면 안 돼!” 그러자 한일은 “나처럼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해”라고 답하는데요. 하니는 그런 안일함은 “너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합니다. 둘의 대화가 마치 한 사람의 창작자 안에 있는 두 개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진짜 그런 것 같아요. 제 안에도 그게 있는 것 같고요. 좋은 작가는 좋은 독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는 아니란 말이에요. 그 명제를 생각하며 쓴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하니, 한일 남매의 관계는 일종의 작가와 독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독자가 자신이 못하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를 보기도 하지만, 또 작가는 독자가 없으면 살 수 없단 말이죠. 「점거당한 집」은 코르타사르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는 존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이야기도 엄청 많이 나와요. 다른 것의 외피를 빌린 부분도 있고 실제 공간도 나오고요.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창작도 창작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구병모 작가님이 심사평에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완전하게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 또는 여러 요소들을 플레이팅 하는 거죠. 그 또한 창작자라면 나중에 한일도 예술가가 된 셈이고요. 이 소설 자체도 그렇게 구성된 면이 있어요.
“내 생각에는 도서관이야말로 점거하며 많은 혁명을 시도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라고 작가의 말에 쓰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도서관은 이미 점거를 당한 것 같은데요. 엄청 거창한 건 아니고요. 이미 도서관은 사람들이 많은 걸 하고 있어요. 예를 들자면, 올 여름이 정말 더워서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 갔잖아요. 우리는 생활 속에서 도서관에 가는 독서를 하고 있어요. 냉정하게 말해서 부동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책을 사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점에서도 도서관이 생활 속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죠. 도서관을 점거하자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그 공간을 향유하자는 의미로 한 거예요. 일상에서 꼭 필요한 공간 안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생활에서의 작은 점거일 수 있다는 말이고요.
「점거당한 집」에는 하니, 한일 남매가 미술관에서 쫓겨난 일화가 나오죠. 한일은 다시는 미술관에 들어갈 수 없을까 봐 울고, 하니는 “미술관은 결국 누구한테나 열린 장소”라고 말해요. 그럼에도 한일은 “그치만 우리에게는 열어주지 않으면 어떡해?”라고 묻습니다. 「길 위의 희망」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점거한 시위대가 떠오르는 대목이었어요. 그곳에 누가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는지, 그것을 누가 왜 강제하는지, 질문하게 되죠.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요.
맞아요. 사회적인 합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즘 개인적인 매너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도서관 (자료실에서) 공부를 하지 말라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를 왜 하게 됐는지 알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예를 들면 홈리스들이 지하도로를 점거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건 쉽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지하도로에서 나가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라는 질문도 해봐야 하고, 답이 없다면 그들(홈리스들)이 틀렸다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올 여름에 날씨가 정말 끔찍했는데, 어떤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걸 보고 화내기 전에 한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나 싶어요. 말씀하신 하니와 한일의 경우는 집이 너무 더러우니까 미술관이 좋았던 거였죠.
『점거당한 집』에는 윤아랑 평론가가 쓴 작품 해설도 실려 있는데요. “그러니까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난잡한 장소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요. “오늘날에 필요한 태도란 고유하고 고정된 예술이나 장소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요. 작가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면서 이번 소설을 쓰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것 같아요. 평론가님이 ‘동시대 미술이라는 수단을 왜 택했는지’를 너무 정확히 얘기해 주셨더라고요. 소설이라는 게 난잡하고 여러 형식이 있고, 마찬가지로 현대미술도 최근 회화를 넘어 굉장히 난잡하게 부상하고, 그 두 가지가 결합되는 면이 있다고 짚어주셨는데요. 우리가 소설의 형식과 길이에 대해서 정해놓은 선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틀이 아니어도 기능하는 소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제 소설이 새롭고 낯설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윤아랑 평론가님이 짚어주셨듯이 일종의 소설의 계보라는 게 있다면 그걸 벗어나려는 계보도 항상 있었기 때문에, 제 소설도 그런 벗어나려는 계보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새로운 게 절대 아니고요. 그리고 현대미술이 다양한 장르를 포섭하듯이 소설도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요. 편지나 드라마, 주석, 사진 같은 것을 포섭하는 소설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생각하고 실험을 해보고 싶었는데요. 평론가님이 그런 야심을 잘 짚어주신 것 같아요.
등단하신 후에 ‘이제 작가로서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잘 쓰고 싶고요. 계속 일을 하면서 쓰고 싶어요.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고 하면... 잘 모르겠어요. 너무 평이한 대답일 수 있지만 ‘등단했으니까 끝!’이 아니고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작가가 계속 갱신되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사실은 등단하기 전부터 작가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등단했다고 해서 ‘이제부터 영원히 작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가 될 건지는 미래가 열려 있는 것처럼 저한테 열려 있는 길인 것 같고요. 그건 제가 좀 더 살아보면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어떤 작가가 되겠다’는 다짐은 아니고 ‘어떤 일이 생긴다면 그에 맞춰서 작가로서 할 일을 하겠다’는 열린 마음만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제 마음 속에는 ‘살 만한 작가의 책’이 있고, 부동산과 돈은 한정돼 있으니까 ‘이건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야지’ 생각하는 책이 있어요. (웃음) 그리고 소설을 읽지 않는 환경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그건 진짜 생활의 문제고, 심지어 작가들조차 처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이유들로 저 같으면 처음 책을 낸 작가의 책을 바로 사지는 않고 약간 삼가면서 볼 것 같은데요. (웃음) 원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박지리문학상을 탄 덕분에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책이야’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낯선 작가의 첫 책을 살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나름의 사정으로 책을 집에 들이기 힘들다면 도서관에 신청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는 말씀과, 어떻게 보면 그게 이 책의 정신과도 비슷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도서관에 신청도 해주시고 책도 사주시면 제일 좋고요. (웃음)
* 최수진
1991년생. 울산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살고 있다. 부산, 광주, 속초, 경주에서 살기를 바라며 그곳에서 사는 스스로를 종종 떠올린다. 「점거당한 집 외 2편」으로 제4회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재난과 예술 그리고 지역 사회에 관심이 많으며, 그 속에서 읽고 쓰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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