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력 특집] 괜찮아, 만화가 있잖아!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지금 우리 만화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나고 있을까? 현장에서 만화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말하는 조경숙, 홍난지 평론가와 함께 수다로 풀어봤다. (2023.08.07)
우리들은 자랐다. 책장을 넘기고 스크롤을 내리며 울고 웃었다. 도망갈 이야기가 있었고 꿈꾸던 이름들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아프리카의 바람을 느끼는, 골목길에 앉아 에베레스트산의 공기를 호흡하는 신기도 키웠다. "선달아, 꺼벙아, 까치야, 백호야, 슬비와 푸르매야, 우리들의 장그래 씨 그리고 새로이야..." 덕분에 추억이 넘쳤다. 덕분에 여전히 즐겁다! 컨테이너 가득 만화책을 쌓아놓은 덕후도, 만화 얘기라면 지칠 줄 모르는 평론가도, 할 말이 있고 연필만 쥘 수 있다면 멈추지 않겠다는 만화 작가도, 인생 만화를 곱씹는 만화 편집자와 마케터도, 그리고 숱한 독자들까지. 우리들의 만화력은 계속 연재 중이다. |
지금 우리 만화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나고 있을까? 현장에서 만화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말하는 조경숙, 홍난지 평론가와 함께 수다로 풀어봤다.
만화 특집을 열면서 두 분을 모셨습니다. 만화에 대한 전문적인(?) 수다를 나누는 자리가 될 것 같은데요. 먼저 두 분이 만화에 빠지게 된 계기를 들어볼까요?
홍난지 :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만화도 좋아해서 아버지가 월급날마다 『보물섬』을 사다 주셨어요. 그걸 보면서 친숙해졌는데, 중학생 때 친구가 데려간 만화방에서 이미라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자연스럽게 순정 만화 잡지로 넘어갔죠. 제 용돈으로 <댕기>, <밍크> 같은 잡지를 사서 보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박희정 작가님의 <호텔 아프리카>를 보고 만화 덕후가 되는 '덕통 사고'를 당했어요.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만화학과를 가야겠다는 고민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을 만화와 함께했는데, 세상을 다채롭게 보고 확장하고 이해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집어 드는 게 만화인 것 같아요.
조경숙 : 제게 만화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데요. 사실 초등학생 때는 게임을 엄청 좋아했어요. 부록으로 주는 게임 CD 때문에 <챔프> 같은 잡지를 사곤 했죠. 게임 때문에 만화를 본 거였는데 언젠가부터는 만화가 더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만화 대여점을 다니면서 하시현 작가님의 <프리티>, 천계영 작가님의 <오디션> 같은 걸 빌려 봤어요. 학창 시절 교우 관계가 좋지 않아 힘들었는데 만화 속 세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웹툰으로 넘어오면서는 만화책을 사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고 본격적으로 만화를 공부하기 시작하게 된 거 같아요.
덕분에 지금은 만화 평론을 하고 있고 우연찮게도 두 분 다 웹툰 관련 책을 쓰셨어요. 만화는 좋아하는데 웹툰에 입문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한 가이드가 있다면요?
조경숙 : 『웹툰 내비게이션』을 쓰게 된 계기가 웹툰을 아예 모르던 편집자분이 뭘 봐야 할지 알려달라며 제안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사실, 전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잘 몰랐는데, 어느 날 네이버 웹툰에 들어가 보니까 작품의 섬네일이 300개가 넘더라고요. 진짜 취향에 맞는 걸 찾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섬네일에 압도되어 뭐부터 봐야 할지 모르는 분이라면 독자들이 남긴 감상을 먼저 읽어보고 거기서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아보길 추천해요.
홍난지 : 평소 만화를 안 보는 분이라면 작가의 일상을 다룬 '일상툰'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개그툰' 장르를 먼저 접근해 보면 더 친숙하게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거 같고요. 예전엔 '명랑체', 요즘에는 'SD체'라고 하는 그림체도 처음 보시는 분들이 시작하기 좋을 것 같아요. 만화책은 보지만 웹툰은 잘 안 보게 된다는 분들은 그럼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가 있을 테니 장르를 따라가되, 섬네일에 나온 극화체나 제목도 살펴보고요. 또, 요즘에는 제목에서 스토리텔링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은데, 그걸로 고를 수도 있어요. <적국 황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는 제목만으로도 환생을 다루고 있구나 짐작할 수 있잖아요.
요즘 인기 있는 장르, 인기 있는 서사가 있다면 뭘까요?
조경숙 : 장르적으로는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할 만해요. 하나의 장르가 대세라기보다 전반적으로 다양한 장르가 융성하고 있달까요?
홍난지 : 요즘은 독자에게 사이다 같은 쾌감을 선사하는 일종의 '사이다 서사'가 인기 있는 것 같긴 해요. 사이다 서사는 사실 한 화 안에서 작은 사건이 살짝이라도 해결되고 또 다른 사건이 출발하면서 계속 보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하는데, 스토리적으로 얘기하자면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건 참을 수 없으니, 당장의 만족을 줘야 하고 어려움은 빨리 해결되고 복수는 통쾌할수록 좋아요. 그런 면에서 평생에 걸쳐 헌신하고 희생해서 어떤 세계를 구하는 장대한 스토리는 사이다가 될 수 없죠. 연재가 짧게 한 화씩 이어지다 보니까 독자들 역시 한 주를 답답한 '고구마 상태'로 기다리지 못하고요.
독자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걸까요?
홍난지 : 지금은 10년, 20년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가능성이 닫힌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현재를 즐기며 살거나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아예 재벌집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믿는 거죠.
조경숙 : <마루는 강쥐> 같은 힐링을 주는 작품도 계속 나오고 있어요. <마루는 강쥐>는 키우던 강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다섯 살짜리 동생이 돼서 같이 알콩달콩 지내는 이야기인데, 펀딩도 많이 되고 인기가 많아요. 사이다 서사, 복수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고 그러면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은은하게 찾는 것 같아요. 물론 캐릭터가 귀여워야 하고요!(웃음)
만화계의 핫이슈가 궁금합니다.
조경숙 : 전 세계적인 이슈일 것 같기는 한데, 만화계에도 최근 AI와 관련한 논의가 떠오르고 있어요. 네이버 웹툰 공모전에 AI가 그린 작품을 출품하느냐 마느냐 논란도 있었고요. 비평계도 주목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기술이 어디까지 활용되고 있는지, 그렇다면 인공 지능 기술과 웹툰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 관련 포럼도 열리고요. 아직 긍정이다 부정이다 이런 입장을 정한 건 아니고 현상을 보고 있는 단계인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가요?
조경숙 : 저는 AI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AI로 기존 만화계의 문제가 드러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한 주에 웹툰 기준 70컷을 그려야 한다면 이건 사실 엄청난 노동량이거든요. 그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기술을 도입했던 거고요. 한데 여기에 또 AI까지 도입해서 그런 기준을 맞출 거냐 하는 문제는 좀 더 논의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느 쪽은 인간이 창의력을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정도로 컷 수를 줄이자고 할 수도 있지만, 또 어느 쪽은 그렇다면 과연 독자들이 기다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겠죠. 어떤 입장을 취하기보단 전반적인 흐름 안에서 같이 봐야 할 것 같아요.
홍난지 : AI와 관련한 논의가 아직은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얘기에는 동의해요. 한데 작가님들이나 지망생들이 생각하는 두려움은 기술의 발전이 너무 빠르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 것 같아요. AI 기술이, 팔로잉 하면서 지켜볼 수 있을 만한 속도감이 아닌 거죠. '이 일을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혹은 '나는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같은 마음이 드는 거예요. 사실 창작이라는 게 굉장히 복잡하잖아요. 작가님마다 작법이 다르고 어떤 순서나 원칙이 있다고 하지만 꼭 그대로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요. 창작의 동기도 모호할 때가 많아요. 어떤 하나로 규정해서 AI에게 학습시킬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해요. 전적으로 AI에게 맡기기보다 보조 도구로 사용하지 않을까 싶고요.
조경숙 : 그렇죠. 스토리 영역에서도 만화에 맞춘 각색이라는 게 또 따로 있고 전문 영역이라 AI가 그런 것까지 학습하기에는 아직은 시간이 좀 많이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홍난지 : 작년 10월쯤 이현세 작가님이 사후에도 자신의 화풍으로 만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AI에게 작품을 학습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었잖아요. 일본에서도 2~3년 전에 데즈카 오사무 작가의 작품을 학습시켜서 만들어보라고 시켰는데, 후보정을 많이 해야 했고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만화 쪽도 한국 콘텐츠의 해외 시장 진출과 인기가 화제예요.
홍난지 : 해외 독자들마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요.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웃음) 사실 아시아 지역에서는 과금이 잘 안되는 걸 알고 많이 철수했다고 하더라고요. 환율 차이가 있어서 크게 이익이 되지도 않고 돈을 내고 보는 문화도 아니라서요. 태국 시장만 괜찮은데 남성 캐릭터 간의 연애를 다룬 'BL(Boys Love)물'이 정말 잘 팔린대요. 또, 프랑스는 웹툰으로 소비하기보다 웹툰을 책으로 만들어서 판매할 때 훨씬 더 잘 팔린다고 하고요. 남미 쪽은 보기는 진짜 많이 보는데 , 부분이 불법 유통이고요. 북미 쪽은 예전에 레진코믹스에 연재된 <킬링 스토킹>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미국의 DC코믹스나 마블 코믹스 등에서 만든 슈퍼 히어로물에 편향된 지역이라, 오히려 타깃층이 세분화돼서 고자극의 스릴러나 BL, 소녀 캐릭터의 사랑 이야기인 GL(Girls Love) 이런 것들을 더 과감하게 수용한다는 얘기가 있어요.
조경숙 : 중국은 <내 남편과 결혼해줘>, <여신강림> 같은 사이다 서사, 복수물이 유행하는 것 같고 일본 독자들은 이세계물의 변형된 형태인 <나 혼자만 레벨업>,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은 게임 판타지, 현대 판타지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일본이 원조인 장르이기도 하고 성공한 웹 소설을 웹툰으로 만든 작품이다 보니 투자도 많이 돼서 작화 퀄리티도 좋거든요. 일본에서는 '픽코마'라고 하는 카카오 재팬이 만든 디지털 만화 애플리케이션이 비게임 부문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한다고 하고요.
홍난지 : 사실 국내 시장은 규모가 작아서 수익을 위해선 IP 확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해외로 나가고 영상화에 힘쓰는 것도 웹툰 판매만으로는 수익이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고요. 지금 카카오 웹툰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작품은 영상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한 <승리호> 같은 경우는 아예 각 잡고 그렇게 나온 작품이에요.
영상화된 작품 중에 좋았던 작품이 있나요?
조경숙 : 얼마 전 드라마로 방영했던 <사내 맞선>은 캐릭터가 웹툰 원작과 아주 잘 맞았는데, 각색 작가가 원작의 재미 요소를 콕콕 집어서 영상으로 잘 옮겨냈더라고요. <좋아하면 울리는>도 좋았어요. 천계영 작가님이 직접 각색한 건 아니지만 많이 참여하셨다고 들었고요. 예를 들어 '하늘에 뜬 하트 링 구름'처럼 만화적인 표현을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는 연출이 좋았어요. 홍난지 <이태원 클라쓰>는 작가님이 직접 드라마 대본을 썼어요. 그래서인지 캐릭터가 무너지지 않고 잘 구현이 됐어요. 워낙 원작이 재미있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두 분의 인생 만화를 소개해 주신다면?
조경숙 : 저는 <도토리 문화센터>로 준비해 왔습니다.(웃음) 난다 작가님의 웹툰이고 아직 연재 중인데 문화 센터를 없애기 위해 회원들을 매수하려던 주인공이 이곳의 노년 여성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평소 중년이나 노년 여성들은 왜 게임이나 만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세대의 인생을 따라가더라고요. 분명 주변에 존재하는 삶인데 보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라 그 부분이 좋았어요. 캐릭터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고 충분히 있을 법한 입체적인 캐릭터라 좋았고요.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한 살 한 살 나이 들면서 곁에 두고 곱씹어야 할 진짜 인생 만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난지 : 저는 <순정 히포크라테스>를 꼽을게요. 이 시대를 살면서 겪는 다양한 관계의 문제를 공감하고 돌아볼 수 있는 만화인데, 주인공 사해가 가부장적인 할머니가 밉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답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온전히 내 생각일까? 이 시대가 주입하고 공유한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할머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했고 그게 더 편한 삶이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할머니를 이해한다."
대충 이런 대사였는데 갈등하고 미워하는 관계에서 서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어서 참 공감이 되더라고요.
*조경숙 만화 평론가. 개발자로 일하면서 기술을 기반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후드티 입은 여자는 어디든 간다"고 말하는 '후드티 애호가'의 정체성으로 『아무튼, 후드티』도 펴냈다. 『웹툰 내비게이션』을 함께 쓴 만화 평론가 동료들과 함께 합정만화연구학회를 꾸려 연구하고 글을 쓴다. *홍난지 만화 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웹툰 창작과 스토리 작법서인 『웹툰 스쿨』, 『웹툰 퍼포먼스와 독자의 즐거움』, 『이말년』 등을 출간했다. 한국만화가협회 만화문화연구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웹툰과 만화 콘텐츠의 즐거움을 나누는 유튜브 채널 <재미의 이유>를 운영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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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