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 『작별들 순간들』 인터뷰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저자 인터뷰
작가는 자신이 '정원에 속한 사람'이 되어갔으며 그것은 자신의 글쓰기의 성분과 정신, 철학을 모두 포함한 글쓰기의 양태가 오두막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2023.02.15)
배수아 작가는 베를린 인근 한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을 15년 가까이 오갔다. 처음에는 시차를 두고, 그러나 점점 더 오래 그곳에 머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되었다. 자신에게 중요해지리라 짐작하지 못한 채 중요해지는 장소가 있다. 특히, 배수아 작가는 한국에 체류할 때는 번역을, 독일 오두막에 머물 때는 본인의 작품을 쓰는 식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에 이곳은 더욱 특별해진다. 작가는 자신이 '정원에 속한 사람'이 되어갔으며 그것은 자신의 글쓰기의 성분과 정신, 철학을 모두 포함한 글쓰기의 양태가 오두막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더불어 『작별들 순간들』은 특정 장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었음으로 인해 쓸 수밖에 없는 글'이라고도 한다.
이 서면 인터뷰도 정원 딸린 오두막에서 진행되고 있을까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12월에 정원을 떠나서 베를린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2월 초반에 강추위가 한 번 오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정원의 펌프를 잠가야 했어요. 그래서 겨울의 대부분을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머무는 내내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정원을 그리워하는 대화를 나눕니다.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오거나 혹은 드물게 햇살이 환한 날에는 오늘 정원과 근처의 호수, 숲을 산책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을 꺼내는 식이지요. 이러다 아마도 언젠가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오직 숲을 산책하기 위해서 정원 오두막으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을 통과하며 맞는 새해는 어쩐지 이전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 팬데믹이 작가님께 어떤 시간이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팬데믹은 저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이상하게도 징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하필이면 여행중이던 모로코에서 봉쇄령에 갇히는 바람에 석 달 동안이나 어려움을 겪었어요. 세계의 공항이 폐쇄된 동안 집이 아닌 곳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집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때처럼 '집에 있다'는 느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팬데믹 기간은 '글쓰는 자'로서 나 자신에게는 무척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히도 그 시기에 저는 그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한 셈이니까요. 그것은 글을 쓰는 장소, 『작별들 순간들』에 나오는 정원 오두막입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매년 여름과 가을이면 정원 오두막에서 글을 써오기는 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외부와의 연결점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로 예상치 못한 장기 체류를 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이 장소가 내게 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원이 그러한 성질을 가진 유일한 장소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발견한 최초의 장소인 것은 맞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팬데믹 첫해에 정원에서 보낸 겨울입니다.
평소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해 겨울 우리는 절대로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방 장치가 없는 정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해 겨울은 2월까지 강추위가 없어서 우리는 살아남았어요. 앞으로도 내가 어디에 있든, 어느 한 장소에서 비로소 집을 발견했다는 고요한 환희의 느낌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로 인해 집을 발견한다는 느낌은 소유와는 무관함을 깨달았어요. 물론, 여기서 집이란 다른 무엇보다 글쓰는 공간, 글의 영혼으로서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이후 8년 만의 산문집입니다. <주간 문학동네>에 '순간들 기록 없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이지요. 테마를 두고 연재하고 책으로 묶기까지, 어떠셨는지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표면적인 계기는 작년 <문학동네> 강윤정 편집자님의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정원 오두막에 머물면서 잡지에 연재할 소설을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그 소설은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글이고,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여행에 대한 글이며, 하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집에 대한 글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매일 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우리의 대화에는 항상 이런 문장이 들어갔습니다.
"정원에서의 글쓰는 삶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너무도 특별하다. 정원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떨까. 우리는 언젠가 정원에 대한 글을 쓰게 될까. 하지만 정원에 대한 글이라니, 우리는 정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글을 쓸 뿐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정원에서의 글쓰기에 관한 글'이 되겠군."
이런 식이었죠. 팬데믹 이후 우리가 정원 오두막에 칩거하다시피 살게 된 이후로 거의 매일 이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산문 연재 제안을 받은 거였죠. 그래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승낙의 답변을 보내기도 전에, 그대로 바로 첫번째 문장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글은 당연히 '정원 산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정원을 가꾸거나 가드닝을 전혀 하지 않고, 뭔가를 심거나 기르지도 않습니다. 야채와 과일은 슈퍼마켓과 근처 농가 상점에서 사먹어요. 꽃이나 화분을 사서 길러보려고는 했지만 모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원 산문'은 정원 가꾸기나 농부의 일, 시골의 목가적인 삶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 글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오직, 내가 정원에서 읽은 책과 쓰고 있던 소설입니다. 소설의 제목은 '속삭임 우묵한 정원'이었어요. 소설에는 정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정원을 제목에 품고 있는 거죠. 나는 「속삭임 우묵한 정원」을 쓰면서, 그때그때 소설이 파생시키는 포에틱한 단상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 자리에서 타자기의 종이를 바꾸어, 즉석에서 산문으로 번역하여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정원에서 쓰던 소설과 병행하여 탄생한, '글쓰기가 불러일으킨 글쓰기'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챕터의 분량의 제법 긴데요. 매 챕터를 구상하고 집필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글은 단 한 줄도 미리 구상되지 않았습니다. 계획이나 설계가 없었습니다. 이 글은 과거를 회상하지 않으며 최대한 즉흥적이고 비통제적인 방식으로 오직 유일한 '지금-여기'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 연재가 어떤 형태가 될지, 다음 챕터에서 어떤 내용을 쓰게 될지는 나 자신도 전혀 몰랐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곁에 놓인 책의 페이지를 무작위로 펼치고 거기 나타난 그날 하루 최초의 어휘와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 산문을 이루는 글쓰기가 무작위적 운명의 날개 아래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압니다. 원래 내 독서는 아무런 목적이 없지만, 이곳에서 나는 특히 목적이나 지향점 없는 읽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읽기'는 정원에서 내게 일어나게 될 감각의 사건들, 그리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누게 될 대화와 함께 이 산문의 주요 요소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글의 내용이나 구성을 구축하고 이어나가기 위한 구조적 틀이 아니라 파편적인 순간의 감각을 환하게 깨워주는 단편들로 이루어집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절반쯤은 실제의 인물이면서, 절반은 이 산문의 연극적인 즉흥성을 위해서 고안된 장치입니다. 또한, 그는 글과 문학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정원과 오두막의 사람, 농부와 사냥꾼의 언어로 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산문의 화자인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이면서 글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정원이란 장소로 이끈 자이기도 합니다. 그와의 대화를 미리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도 다음 글에 무엇이 등장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전 질문에서 답했듯이 이 글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의 산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이 산문의 선취된 레퍼런스이며 자연스럽게 이 산문에 포함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출간 후 독자들께 보내는 영상 메시지에서 '정원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조금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한국과 독일 두 나라를 오가며 지냈던 것, 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요.
어디엔가 속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느끼게 된 것은 곧 글을 쓰는 장소를 찾았다는 의미와 같아요. 물론, 나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동안 글을 써왔습니다. 이곳과 저곳에서, 한국과 독일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요.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의 언어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나의 '헤맴'은 반드시 발견하기 위함은 아니었어요. 나는 길 자체를 나의 글쓰기로 생각했습니다. 정원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글쓰기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건들도 겪었습니다.
이곳은 거의 폐쇄된 우주이기 때문에, 그런 체험들은 대도시에서보다 훨씬 더 운명적인 느낌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정원을 떠나게 되겠지만, 내가 최초로 어느 공간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글과 정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정원이 내 글의 장소가 되었기에 내가 『작별들 순간들』을 쓴 건 아니에요. 도리어 반대로, 이곳에서 내가 『작별들 순간들』을 씀으로 인하여 정원은 내 글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곳에 속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과한 접속, 접촉의 세계가 그립지는 않다 해도, 그 세계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불안할 땐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정원에서의 내 생활이 운둔자처럼 보이는 것은 외부와 격리된 장소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한 원인인 듯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완벽한 이방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언어도 소속도 없어요. 이곳에서 나는 휴대 전화를 없앴습니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원래 나는 외부와의 소통 방식에서, 대화의 인간보다는 편지의 인간입니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마찬가지였어요. 몇몇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나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실제로 그런 편지들 중 일부가 이 산문집에 포함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정원이란 공간에서 살아도 불편을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작별들 순간들』을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모쪼록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바랍니다!
*배수아 소설가이자 번역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독특하다. 이화여대 화학과에 입학한 배수아는 국어 과목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는 자의식으로 인해 소설을 쓰게 됐다.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 잡지 <소설과 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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