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건축가, 디자이너가 되다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 한주희 저자 인터뷰
어제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오늘 혹은 내일 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과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에 분명 이유가 있듯이, 마음이 가는 일도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2022.07.22)
간단한 인사말조차 하지 못했던 유학생에서 파리의 유명 건축 회사에 입사한 건축가, 정규 의상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지만, 퇴근 후 밤낮으로 미싱을 돌리며 2019년 SS20 파리 패션위크에 참여한 의상 디자이너, 그리고 모듈형 지갑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디자인 브랜드를 론칭한 사업가가 되기까지... 떠오른 아이디어는 일단 실행하며 과감한 도전을 이어온 한주희의 첫 번째 에세이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무일푼 유학생의 화려한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 주변의 평범한 누군가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낸 과정을 담은 성장기에 가깝다. '도전은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 여기며, 피하기에 급급했던 한주희 저자가 강렬한 열정을 되살리는 과정을 따라 읽다 보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잊고 살았던 꿈과 열정이 되살아난다.
첫 책,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를 출간하셨어요. 이번 책을 통해 작가님을 처음 뵙는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를 출간한 한주희입니다. 즐길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 ‘해본 일’보다 ‘해보고 싶은 일’에 도전했어요. 취미인지 일인지 구분하지 않고 가슴 뛰는 일을 하다 보니 건축, 패션, 글쓰기까지 다양한 창작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관찰하고 즐기는 사람처럼요. 겹겹이 쌓인 경험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투영될지,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돌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생소한 언어와 문화에 부딪히며 삶의 변화를 맞이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랑스에 가기로 마음먹으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프랑스에 가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지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피의 수단으로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아요. 인생에 리셋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생에 큰 변화는 찾아오지는 않았어요. 환경이 바뀌고 언어가 달라졌을 뿐, 저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중심 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느낌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이제 살만하다’라고 느껴지는 시점이 오긴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9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아요. 프랑스에 가기 전과 후에 제일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제가 누구인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회피보다는 '정면 돌파'가 제 인생의 키워드가 되었죠.
프랑스의 다양한 집을 전전하며 작업을 이어오신 경험도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하녀 방’으로 불리는 작은 공간에서 준비한 건축 공모전으로 대상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당시에 어떤 과정으로 건축 공모전을 준비하시게 되었나요?
계급 사회의 잔재인 ‘하녀 방’은 지붕 밑 자투리 장소를 말합니다. 제가 구했던 하녀 방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천장의 반은 지붕면을 따라 사선으로 되어 있어 두 발로 설 수 있는 공간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지붕면에 있는 작은 창 하나로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도시 풍경을 보려면 의자 위에 올라서야 가능했어요. 마음대로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만으로 쌓였던 것 같아요. 마침 칠레의 사막 한가운데에 천체 박물관을 제안하는 공모전이 있었고, 퇴근 후 공모전에 참여하기 위해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건물 안과 밖 어딘가에 눕거나 앉거나 걸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별이 수 놓인 하늘을 감상하면 어떨까'라고 상상했어요. 그래서 사막 한가운데 놓인 원형 인공 오아시스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밖을 보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하늘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공간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불만을 긍정적으로 전환시켜서 수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프랑스의 유명 건축 회사 '장 누벨 건축 회사'에 이력서를 넣을 때, 건축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의상 포트폴리오를 첨부해 당당히 합격하셨어요. 어떻게 건축이 아닌 의상 포트폴리오를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기로 결심하셨나요?
옷을 처음 만들 때 만해도 건축과 의상을 연관 짓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상 제작이 건축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취미나 관심사도 나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비슷한 경력의 프랑스인 건축가와 경쟁한다면 제 경력은 큰 이점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경력에 비해 나이가 많고, 외국인이라는 점이 걱정스러웠거든요. 실제로 50여 군데 이상 지원서를 보냈지만, 면접을 보자고 하는 곳은 단 두 곳이었어요. 차별화 전략이 모두에게는 아니어도 누군가의 시선을 끌었고, 결국 '장 누벨 건축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에서 우비를 재해석해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 일화가 나옵니다. 왜 하필 ‘우비’에서 착안해 옷을 만들기로 결심하셨나요?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나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프랑스에서 겪었던 문화 충격 중 하나가 우산이었어요. 이슬비도 아닌 꽤 굵은 빗줄기가 떨어져도 길거리에서 우산을 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비를 맞으며 걷거나 우비를 입은 사람을 찾기가 더 쉬웠어요. 덩달아 ‘나도 우산을 쓰지 말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비닐 소재를 좋아해서 ‘우비’를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민 끝에 입고 나간 옷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자유분방한 패션 스타일을 갖추거나 실험적인 소재와 디자인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어요. 패션위크 시즌에는 일부러 더 과감하게 옷을 입기도 하니까요. 디자인이 독특한 옷을 입을수록 사람들의 반응은 더 좋았어요. 길에서, 상점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이 익숙해질 정도로 의상은 대화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나중에는 옷을 만들면 일부러 입고 나가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정도였으니까요.
파리 건축가, 의상 디자이너, 디자인 브랜드 론칭까지 작가님을 수식하는 이력들이 무척이나 다채롭습니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여러 분야에 뛰어들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저를 수식하는 이력이 많아졌네요. 그래서 제 직업을 말해야 할 때 잠시 머뭇거릴 때가 있어요. 저 자신조차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의 내리기가 어렵더라고요. 도전도 처음이 어렵지 계속하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크게 다치지 않게 맨땅에 잘 헤딩하는 방법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도 맨땅에 헤딩하면 많이 아프고, 어렵게 쌓아놓은 일을 두고 다른 일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아파야지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도 느껴지더라고요. 정체하는 삶이 주는 안락함보다 도전하면서 얻게 되는 풍부한 경험이 더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해보고 싶은 분야가 생기면, 우선 해보고 결정하자는 습관이 있어요. 가슴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려면 직접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시간이나 체력의 제약도 있고, 금전적인 문제도 있다 보니 모두 다 할 수는 없지만, 계속하게 되는 일은 꾸준히 하려고 해요.
마지막으로 그동안 작가님이 고민해오신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은’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책이 출간된 지금 아이는 세 단어 이상을 조합하며 말을 하고 있어요. 아이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눈에 띄어요. 그런데 어른이 된 저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외국에서 오래 체류하며 건축가로 일하고 패션위크에 참여해보고, 한국에서 지난 삶을 담은 책을 출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제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오늘 혹은 내일 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과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에 분명 이유가 있듯이, 마음이 가는 일도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것이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한 어른이 되고 싶고, 제 아이에게 엄마도 성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요.
*한주희 200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말라케 국립건축학교 건축석사 졸업과 동시에 데소 건축사무소에 입사, 이후 장 누벨 건축 및 디자인회사로 옮겨 건축가로서 커리어를 쌓았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직접 디자인하기 시작하면서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도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건축가로 보장받은 미래를 포기하고, 패션회사를 창업하며 취미에 불과했던 의상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의상과 관련한 정규 교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미싱 앞에서 수많은 밤낮을 보낸 뒤 2019년 SS20 파리 패션위크에 참가했다. 현재는 한국에서 디자인 브랜드 ‘디렉(DERECC)’을 론칭해 지갑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며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몰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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