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권누리 시인, 좋아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여름
『한여름 손잡기』
좋아하기 때문에 더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권누리의 시는 기꺼이 희미해지는 이들의 손을 잡는다. (2022.04.06)
『한여름 손잡기』를 읽으며 투명한 햇살 아래 선 소녀를 떠올렸다. 강한 빛에도 지지 않고 한여름의 감정을 손에 쥔 소녀.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시적 화자처럼, 권누리 시인은 인터뷰 내내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말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권누리의 시는 기꺼이 희미해지는 이들의 손을 잡는다.
투명한 빛과 초록의 이미지가 선명한 시집이었어요. 표지의 그림처럼요.
그림은 직접 고른 거예요. 제목 없이 표지에 그림을 가득 채우는 건, 봄날의책 시집의 특징인데요. 평소에도 봄날의책 출판사를 좋아해서 꼭 여기서 시집을 내고 싶었어요. 디자인도 아름답고, 제가 좋아하는 배수아 작가님의 번역서가 나오기도 했고요.
첫 시집이잖아요. 어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시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어떻게 다양한 감정을 독자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하트*어택」에는 ‘사랑에는 제법 재능이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죠. 시를 쓴 사람도 다정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어요.
친구들이 “넌 정말 사랑을 잘 한다”는 말을 많이 해줘요.(웃음) 최근에 “얘들아, 어떡하지 나 지금 마음에 사랑이 없어.”라고 했더니, 다들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원래 다양한 감정을 멈추지 않는 편이에요. 쉽게 사랑을 시작해서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마음을 쏟아붓고 후회하지 않아서일 수 있겠죠.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늘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는 아무도 죽지 마.”라고 썼죠.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와 ‘시인의 말’을 쓰는 시인은 아무래도 다르고 분리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시인의 말’만큼은 ‘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하고 고백하는 느낌으로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했어요.
시집에서 ‘여름’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계절을 특히 좋아하나요?
무언가를 너무 싫어해서 오히려 좋아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여름이 딱 그래요. 너무 싫고 너무 좋아서 자주 쓰게 돼요. 제가 여름에 태어나기도 했고요. 글을 쓸 때, 저의 출생이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할 때가 많아요. 그렇다 보니 여름 이야기가 자주 나온 것 같아요.
시 곳곳에 머무는 환한 ‘빛’의 존재도 인상적이었어요.
제 시에서 ‘빛’은 중요한 단어예요. 이 시집에 묶인 시들 대부분을 2019년과 2020년에 썼는데, 최근에 청소를 하다가 당시에 남겨둔 메모를 발견했어요. 제가 이렇게 썼더라고요. “지금까지 사람들이 어둠과 밤의 막막함에 대해서 많이 말해왔다. 그래서 요즘 빛이 일종의 대체재가 되기 시작한 건 아닐까? 그럼 나는 빛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 의문에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사랑하는」에서 빛에 대해 직접적으로 쓴 대목이 있어요. ‘모든 빛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모든 빛이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사람들이 빛을 싫어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자신들이 보고 싶은 빛을 좋은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게 이상하고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을 정리하면서 썼어요.
사람, 인간, 인류, 신이 등장하는 시들도 눈에 들어왔어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싶은 상상력 같기도 했고, 종말을 떠올리는 아포칼립스적 세계관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청소년기에 그런 고민을 자주 떠올렸어요. ‘나만 살고 다 죽는 것, 나만 죽고 다 사는 것. 둘 중 뭐가 나을까? 어떤 것이 덜 슬플까?’ 거기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제 안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단어가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데요. 무심코 “저 사람 좋다”와 “저 인간 왜 저러지”라고 말할 때 각각의 어감이 다르잖아요. 그렇게 인간과 사람이 쓰인 문장을 각각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쓰고 싶었어요.
신이 나와서 종교적인 느낌도 들더라고요.
종교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워요. 믿음이 가는 확실한 존재가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어떤 잘못이나 문제를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신의 탓을 하는 식으로라도 덜 힘들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에요. 제 시에 나오는 신이 유능한 존재는 아니에요. 불완전하고 대책없고 슬프고 이상하고, 사람처럼 느껴지죠.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신을 많이 떠올리는 것 같아요.
‘우리’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서 만들어지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됐어요.
‘우리’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고민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많이 쓰는 편이에요.(웃음) 누구도 빼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으니까 작은 단위의 공동체를 향해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쓰는 것 같아요. 실제로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얘들아,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좋다’하는 마음으로 쓴 시도 있고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이 그려지더라고요.
제가 ‘우리’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쓴 시들이 많아요. 특히 퀴어 공동체나 퀴어 문학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에 속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트위터에 “내 시가 퀴어하게 읽히지 않는다면, 퀴어하게 읽힌다면 이유가 뭘까 종종 생각한다”고 남긴 것을 봤어요.
등단작 「내비게이션 미래」를 발표하고 재미있는 감상을 많이 들었어요. 여성들의 연대로 보는 분도 있고, 동거하는 커플 이야기로 읽는 분도 있더라고요.
‘언니’가 등장하니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도로시’라는 캐릭터도 등장하고요.
도로시는 제게 굉장히 좋은 주인공 같은 느낌이죠. 도로시를 발견한 과정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수목원 같은 풍경에서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한 거예요. 귀엽게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 같은 사람인데,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거죠. 그때 문득 ‘아, 쟤가 도로시구나.’ 깨닫게 됐어요. 도로시는 너무 사랑해서, 함께 미래를 보고 싶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런 존재들이 오래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작가님은 소설도 창작하고 있는데요. 테테, 낸내, 요한나 등 한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친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이름들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다고요.
시와 소설에서 이름을 짓는 일이 조금 다른데요. ‘퀴어소설’ 하면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는데, ‘퀴어시’로 묶이는 작품은 뭐가 있을까 아직까지는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쓸 때는 ‘도로시', ‘리타'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여성’으로 느껴지는 인물을 연상할 수 있게끔 짓고 있어요. 물론 그 화자들은 ‘여성’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죠. 한편, 소설에서는 인물의 성별에 대한 이해나 판단을 교란하거나 전복하는 데에 집중해요. 어느 쪽이든 독자들이 다양하게 읽을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요.
한 인터뷰에서 취미가 ‘아이돌 덕질’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시인님에게 아이돌은 어떤 존재인가요?
아이돌은 제가 실컷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예요. 물론 아이돌 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싼 논의나 노동, 젠더 이슈, 청소년 인권 등의 문제도 함께 떠오르죠. 그렇지만 분명한 건, 성장 과정에서 아이돌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왔다는 거예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아이돌을 향한 사랑은 마음껏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사랑을 쏟고 그 에너지로 또 다른 사랑을 이어가는, 건강한 사랑의 선순환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아이돌을 오래 좋아하다 보니, 팬덤 커뮤니티에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어요. 취미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이 차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거든요. 같은 대상을 사랑하고 표현하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아요.
몇 편의 시는 좋아하는 아이돌에 영향을 받아 썼다고요.
「주정」에 ‘우리의 초록빛 비 내리는 한낮의 길’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인 ‘초록비’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가끔 지치고 힘들 때, 혼자 노래방에서 부르곤 하거든요. 또, 「소유」에서 ‘끝에서부터 쓰러지고 있는 나의 중간을 재빠르게 쳐내는 일’이라는 구절은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들이 도미노를 만드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도미노 조각을 열심히 세우고 있는데 거의 완성할 때쯤 전부 쓰러뜨릴 위기가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한 멤버가 넘어지는 도미노 부분을 손으로 날려서 남은 것을 무사히 살려 내요. 당시 제가 시간을 들여 쌓아온 관계와 취향이 한꺼번에 무너지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이걸 끊어준다면 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용기를 얻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사람을 웃기고 싶어 하는 사람, 광대의 삶을 자처하는 사람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내성적인 성향이지만, 사람을 웃기고는 뿌듯해하는 사람들. 그런 주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시를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하나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 시집이 아니더라도 시를 읽다보면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하는 순간에 부딪치곤 하잖아요. 그런데 시집은 정답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이 받아들이는 대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저 이 시집의 단어에서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 화자가 사랑하고 있구나, 죽고 싶구나, 슬프구나 여러가지 감정이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아요.
*권누리 대구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공주를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쓰고 싶다. 시집 『한여름 손잡기』를 썼다. 시와 소설을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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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사랑’의 시집 이 시집은 옷장 문을 열고 나와, 빛을 향해, 사랑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기록이다. 시인 권누리는 투명도가 높은 눈부신 언어로, 크리스털 유리잔에, 스테인드글라스에, 프리즘에 닿는 찬란하고 어지러운 빛을 다정하게 담아낸다. 사랑을 사수하기 위해서 다정을 발휘하는 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