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소설가 서장원, 문득 삶을 되돌아보는 순간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해도 주변 인물이 눈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이 다시 쓰인 이야기예요. (2022.03.07)
서점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집을 펼친 것이 계기였다. 집으로 달려와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고 그 때부터 소설에 빠졌다. 서장원의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그의 첫 소설집이지만, 7년 넘게 소설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온 흔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의 인생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곤 했다. 문득 무언가를 놓친 것 같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는 순간, 서장원의 이야기는 늘 그곳에 있다.
스물세 살부터 꾸준히 소설을 써왔다고요.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고, 처음으로 소설이 이렇게 멋진 거구나 느꼈어요. 그즈음 소설 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됐죠. 등단을 거의 포기하고 있을 무렵, 수상 소식을 들었어요. 원래 등단 날짜를 타투로 새겨야지 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잊히면 타투를 볼 때마다 슬플 것 같아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웃음)
첫 책이 나왔어요. 각별한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매일 독자들의 후기를 찾아봐요. 다음 작품을 빨리 읽고 싶다는 반응을 들으면 행복하죠. 정말 열심히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의 말’에 쓴 두 가지 원칙이 인상적이었어요. 소설 속에서 누구도 미워하고 정죄하지 말자, 인물들이 불행한 상황에 있다면 힘이 될 누군가를 곁에 있게 해주자.
『무진기행』 ‘작가의 말’에서 김승옥 소설가가 한 말이 기억나는데요.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소설가는 소설 안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요. 잘못을 저지른 인물이 있으면 벌을 줄 수 있고요. 그렇다고 소설가가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마음대로 하면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자고 생각했고요.
그래서인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다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제 소설은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해도 주변 인물이 눈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이 다시 쓰인 이야기예요. 「주례」는 정년 퇴임한 교사 경목이 주인공이지만, 원래는 제자 용주의 이야기에서 시작했고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죽은 연인에 대한 사연을 지닌 레즈비언 동창 민주가 주인공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설을 쓰는 작가가 새로 등장하게 됐어요.
「이인용 게임」은 읽을 때마다 다른 인물이 눈에 밟히는 소설이었어요. 처음에는 복수를 하는 노영과 ‘나’의 마음을 생각하며 읽었지만, 이들에게 상처를 준 인물들도 아들을 잃은 사람들이죠. 그렇게 보면, 여기에 온전한 ‘2인용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이 소설에는 악인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노영과 ‘나’, 그리고 노영의 어머니와 줄리아 모두 이해 가능한 인물로 그리고 싶었거든요. 2인용 게임 자체가 불안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같아요. 둘이 있어야 게임이 가능하니까 한 명이라도 빠지면 흔들리게 되죠. 거기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이에요. 쓰면서 작가로서 성장한 것 같다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내가 왜 소설을 계속 쓰고 있을까’ 묻게 됐어요. 누구나 자신이 겪은 일이 다 이해되지는 않잖아요. 지나온 일이지만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고, 과거의 사람이 그 순간에 어떻게 나를 생각했는지 끝까지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소설 쓰기는 그 일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이 인물들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죠. 그렇지만 그 사건이 폭발하거나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아요.
사실 저는 결말이 뚜렷한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소설을 쓰면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소설을 쓰게 되더라고요.(웃음) 제 소설의 인물들은 트라우마가 될 만큼 충격적인 일을 겪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살면서 누구나 마주칠 수 있는 소소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죠. 그런데 문득 과거의 한 순간을 돌아보다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걸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중장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지나온 사람들은 큰 문제에 부딪칠 때 쉽게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그 영향도 있는 것 같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인물을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사실 잘 안 해요. 인물들이 이 풍경을 어떻게 바라볼까, 과거에는 뭘 했을까 자주 떠올려보는 편이죠.
「프랑스 영화처럼」은 산뜻하게 읽힌 소설이에요. ‘나’와 유재 앞에는 차별적인 현실이 있지만, 소설은 두 사람을 “솜과 천으로 만들어진 한없이 푹신한 세계”로 데려 놓아요. ‘바라는 세계’를 쓴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는데요.
다른 소설들은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 썼는데, 「프랑스 영화처럼」은 한번에 빠르게 써 내려갔어요.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사건이 입력돼서 출력하는 것처럼 바로 썼는데, 쓰고 나니 마음이 나아졌던 기억이 나요.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지닌 편견과 관계의 균열도 감지돼요. 특히 「해피 투게더」는 등장인물 간의 관계 때문에 쓰는 동안 결말이 바뀌기도 했다고요.
「해피 투게더」는 원래 화자가 게이였는데, 나중에 트랜스젠더로 바뀌었어요. 성 정체성이 변화하면서 친구 해주와의 관계도 달라졌죠. 처음에는 제목에 더 어울리게, 주인공과 친구 부부가 함께 영화를 보면서 끝나는 결말이었거든요. 그런데 설정이 바뀌면서 둘 사이에 작용하는 권력의 차이를 생각하게 됐어요. ‘나’와 해주는 긴 시간 함께한 친구지만 그만큼 서운함도 쌓이는 관계죠. 해주가 아무리 악의 없이 행동하더라도 ‘나’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이 되니까요. 트랜스젠더인 주인공과 기혼자 시스젠더 여성인 해주가 마냥 웃으면서 마무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연히 결말도 바뀌었죠.
어떤 욕망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요. 처음으로 쓴 소설은 어떤 주제였나요?
노년의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이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잘못 내려서 길을 물어보는데, 낯선 남자가 다가와서 엄마라고 부르면서 집에 데려가 감금을 해요. 그리고 어머니 대접을 하는 거죠. 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봤는데, 결국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외부에서 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때, 스스로 생각하는 정체성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의 소설과 다른 형태지만, 처음에는 그런 주제를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평소에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가 궁금했어요.
공포 영화를 좋아해요. 스스로도 왜 그렇게 자극적인 콘텐츠를 좋아하지 싶은 면이 있는데(웃음) 특히 영화 <미드소마>를 만든 아리 에스터 감독을 좋아합니다. 필립 로스의 소설도 좋아해요. 항상 자신이 잘 모르는 화자에 대해 쓰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본인은 유대계 미국인이지만, 흑인 가정에서 자라나 백인으로 패싱될 수 있는 사람이나, 딸이 폭탄 테러를 일으킨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요. 그런데도 늘 직접 겪어본 일처럼 생생하거든요. 저는 작가가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는 것 자체가 큰 도전 같고요.
앤드류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다고요.
앤드류 포터의 소설도 과거를 회상하며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걸 떠올리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특히 「코네티컷」을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주인공이 어머니가 젊은 시절 레즈비언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당시에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어머니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죠. 그렇게 과거의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가 재밌어요. 제 소설에도 그런 구조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고요.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신다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보육원에서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두 여자의 이야기인데요. 한 인물이 장애가 있어서 시설에서 생활해야 했던 인물이라, 요즘 장애와 몸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어요. 공포와 스릴러를 워낙 좋아하니 장르물도 써보고 싶지만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웃음)
*서장원 1990년에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전공 전문사를 졸업했다.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해가 지기 전에」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K-픽션 스물아홉 번째 작품 『해피 투게더』 등의 앤솔러지에 참여했고, 소설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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