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녹색 펜 교사·사전 덕후, 이병철이 전하는 모국어로 쓴 자서전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이병철 작가 인터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자기가 필요로 하는 한 낱말만 보지 말고 뜻풀이에 나오는 다른 말들을 끝말 이어가기 하듯이 자꾸 찾아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2021.05.14)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루하루 매 순간 언어로 사유하고, 소통하고, 관계 맺는다. 어머니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내 어머니가 쓰셨고, 그분 어머니, 또 그분 어머니가 쓰셨던 말, 그러다가 나한테까지 전해진 우리말”, 모국어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이는 없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곧 모국어가 그 운명이며, 모국어를 함께 부여받고 사용하는 우리들은 운명 공동체다.

기자들에게 ‘녹색 펜 교사’라 불렸던, 언론사 교정 교열 일을 30여 년간 해왔던, 이병철은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를 통해 모국어가 처한 편안치 못한 상황을 애달픈 마음을 담아 전한다. ‘앙꼬あんこ빵, 곰보빵, 빠다butter빵’으로 상징되는, “일본어를 내치지 못하고 영어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우리말조차 바르게 쓰지 못했던” 그 시절, 저자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 언어 환경을 통해 우선 우리말 유년기를 되돌아본다. 두 번째 글 묶음에서는 자칭 ‘네거티브 인생’이라 했던, 언론사 교정 교열 현장에서 마주했던 우리말과 글을 최전선에서 지키고 다듬어왔던 경험들을 들려준다. 



글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동안 한글맞춤법이 바뀌기도 해서 여러 사전을 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어휘와 사전적 뜻풀이가 제게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작가님이 국어사전을 보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을 몇 가지나,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현재 가지고 계신 사전이 몇 가지이며, 가장 오래된 사전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필요로 하는 한 낱말만 보지 말고 뜻풀이에 나오는 다른 말들을 끝말 이어가기 하듯이 자꾸 찾아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국어사전은 <조선어사전>(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년, 조선어학회) <국어대사전>(1961년, 이희승, 민중서림) <국어대사전>(1991년, 김민수 외, 금성출판사) <우리말 큰사전>(1992년, 한글학회, 어문각) <표준국어대사전>(1999년, 국립국어연구원, 동아출판)입니다. 그밖에 제가 소장한 국어 관련 사전은 다음 열네 가지입니다.

<우리말 역순사전>(유재원) <우리말 분류 사전>(남영신) <새로운 우리말 분류 대사전>(남영신) <우리말 갈래사전>(박용수) <유의어·반의어 사전>(김광해) <우리말 활용 사전>(조항범) <쉬운말 사전>(한글학회) <한겨레 말모이>(장승욱) <뉘앙스 풀이를 겸한 우리말 사전>(임홍빈) <사전에 없는 토박이말 2400>(최기호) <우리말 상소리 사전>(정태륭) <주색잡기 속담사전>(송재선) <현대 북한말 소사전>(조선일보) <詩語辭典>(김재홍)

조르주 페렉은 소설 『실종 La disparition』에서 알파벳 e를 빼고 글을 썼습니다. 의도는 다르지만, 작가님은 우리가 글쓰기에서 정말 많이 사용하는 ‘~의’라는 조사를 쓰지 않고 글을 쓰셨습니다. 꽤 힘들었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셨나요?

우리말을 살려 쓰자거나 외국어 사용을 자제하자고 할 때 거론되는 것은 ‘어휘’입니다. 그런데 일본말 ‘벤또’를 우리말 ‘도시락’이 밀어냈듯이 어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문, 즉 문장이 일본식인 것은 아무리 애써도 극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국력과 문화로 일본을 앞지를 단계에 왔고, 그 점이 우리에게 큰 희망과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학자·작가·기자는 일본어 노の 용법을 그대로 가져온 조사 ‘~의’를 남발해 우리말 부사와 동사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명사 위주 문장’을 써댑니다. 심지어 국어학자까지도. 이렇게 글 문화가 일본에 예속된 채로 진정한 극일은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의’는 예전부터 우리도 써왔지만, 지금처럼 오·남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이 책에서 가장 공들여 쓴 부분도  ‘~의’를 어찌하오리까 ①②③④입니다. 그것을 이론으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글을 지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아예 책 전체에 ‘~의’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글을 인용한 것은 제외)

‘그냥’이 우리말 ‘그’와 한자 ‘양’(모양 양樣)을 합친 말임을 알고 나서 어원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는데, 책에서 다루지 않은 말 중에 어원이 흥미로운 것이 또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자에서 비롯되었거나 한자와 결합한 우리말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간난艱難)  경마(←견마牽馬)  김치(←김채← 딤?←침채沈菜)  나중(←내종乃終)  뒤탈(←뒤 탈?)  사또(←사도使道)  새경(←사경私耕)  새참(←사이 참站)  수육(←숙육熟肉)  스승·스님(←사승師僧)  아리땁다(아려雅麗 답다)  언제(어느 제際)  임금(←인군人君)  제법(←저 의 법法)  조용하다(←종용從容 하다)  종아리(종踵 아리)  ※ 노다지(← no touch: 금광에서 금맥을 발견한 한국인 광부에게 서양인이 외친 말에서 비롯됨)

김수영은 1966년 한 수필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부싯돌, 벼룻돌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로 적시했습니다. 이병철 작가님께서 꼽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는 무엇입니까?

‘가장 아름답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말들을 꼽겠습니다.

고즈넉하다, 곱다, 그냥, 그윽하다, 눈망울, 모름지기, 술, 쏜살같이, 아기씨, 애면글면, 여울, 예다(‘가다’), 올곧다, 하염없이, 한결같다, 흘러가다. 그리고 접두사 ‘풋’ ‘첫’.

퇴임 후 후배 기자들이 쓴 글에서 작가님이 <시사저널>의 ‘녹색 펜 교사’였다고 표현되었습니다. 녹색 펜을 들고 꼼꼼히 교정·교열을 보는 모습이 상상되는데, 기자에게 중요한 것 혹은 훈련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균형 감각과 글쓰기입니다. 초년 기자는 자칫 정의감에 사로잡히기 쉬운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냉철함을 지녀야 공정한 기사를 쓰게 됩니다. 또, 기자는 취재에 제일 신경을 쓰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보도 기사만 쓰다가 퇴직하면, 기자란 한때 그가 거쳤던 직업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언론인은 칼럼이나 논설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 여론을 선도하는 오피니언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기자가 언론인이 되려면 글을 잘 써야 합니다. 자기가 지닌 통찰력을 바르고 튼튼하고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자기 글을 끊임없이 퇴고하는 것이 가장 튼실한 방법입니다. 거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글’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셨습니다. 작가님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충동이랄까, 제가 읽고 싶은데 그런 책이 없으면 제가 씁니다. 술술 풀릴 때는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아주 드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쓰는 글이란 쓰고 나면 만족한 적이 거의 없는, 참으로 괴로운 노동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는 직전에 쓰신 『수집가의 철학』과는 주제가 전혀 다른 책입니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쓸 계획이세요?

세상에서 제일 내밀한 공간인 내 서재를 소재로 삼아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 이를테면 책 그림 사진 음악 사귐 따위를 풀어내면서 살아온 날을 정리할까 합니다.


“국어사전 페티시라고요?”국어 관련 사전을 두 줄로 쌓고도 우리말에 관심을 가진 사람치고는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이병철 작가. 그가 펼쳐든 책은 1920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사전>이다.



*이병철

서울이 고향인 이병철은 휘문고등학교와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기자와 글쓰기를 업으로 삼다가 2008년 세계 최초 휴대전화 박물관을 열었다. 현재 여주시립 폰박물관World First & Only Mobile Museum THE PHONE 관장이다.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는 독자로 하여금 모국어가 처한 현실에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도록 일상에서 겪는 어휘 문제를 미셀러니에 담았다. 또한 다른 책이 거의 다루지 않는 구문構文은 통계와 예문을 인용한 에세이로 다루었다.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이병철 저
        
천년의상상
      



추천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