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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호, 닉 드르나소의 데뷔작 『베벌리』 번역 후기

『베벌리』, 『사브리나』 번역가 박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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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은 번역할 수 있는 글자 수가 제한돼 있어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게 도전이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2020.12.29)


『베벌리『사브리나』로 맨부커상 50년 역사상 최초로 그래픽 노블로 후보작에 오르며 그 문학성을 입증받은 작가 닉 드르나소의 데뷔작이다. 고전문학부터 SF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미권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소개하고 있는 번역가이자 에세이 작가인 박산호는 2019년과 2020년에 국내 출간된 닉 드르나소의 작품을 모두 번역했다. 현대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불안감, 부조리함, 허무함을 포착하는 날선 감수성과 정치적 메시지가 짙게 담긴 닉 드르나소의 작품을, 박산호는 누구보다 깊숙이 탐험하고 잘 다듬어진 우리말로 전하고 있다.



닉 드르나소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그래픽 노블 번역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닉 드르나소의 작품은 『사브리나』로 먼저 만났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스릴러 소설을 많이 번역했던 저로서도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한 사람이 목숨을 빼앗기는 과정과 그 유가족이 겪는 상황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번역하면서 굉장히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은 활자만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 과정이 더 리얼하게 드러나서 상상력이 더 극심히 자극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래픽 노블은 번역할 수 있는 글자 수가 제한돼 있어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게 도전이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가장 공감이 되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겠어요?

「가장 슬픈 이야기」는 (아마도 이웃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사소한 일상을 시시콜콜 공유하는 중년 여성이 등장해요.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를 하던 그 여성은 우편함을 확인하다가 자신이 새로 방영될 시트콤의 사전 모니터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뻐하죠. 여성은 딸과 함께 시트콤을 본 다음 기대감에 들떠 설문 조사 질문지를 펼쳐봅니다. 하지만 질문은 온통 시트콤 중간중간에 끼어든 광고에 대한 호감도 조사뿐이었죠. 그 순간 여성은 이 사회에서 자신이 오직 소비자로서 한정되어 존재할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여성은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라는 익숙한 정체성으로 되돌아갑니다. 엄마가 사소한 일로 기대와 실망 사이를 오가는 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딸이 혼자서 남아 우는 모습에 특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현대사회가 여러모로 우리를 소외시키는 문화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딩」은 어렸을 때 절친한 친구로 많은 추억을 공유했지만 시간이 흘러 남보다 못한 사이로 변해버린 두 여자아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의 삶은 서로 비슷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른들의 삶이 달라지면서 아이들의 삶도 달라져버렸습니다. 나와 너무 닮았던 친구와의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는 데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질투는 누구나 한 번씩 정도를 달리하며 경험해봤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이런 경제적 계급 차와 인간관계의 역학을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인 저 또한 그 시선에 크게 공감했고요. 

두 책의 서로 다른 매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브리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모습을 다루면서 동시에 ‘사브리나’의 죽음을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대중의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 잠재된 광기를 미세하게 드러냈다면, 『베벌리』는 그 광기를 좀 더 노골적으로 부각시킨 면이 다르죠. 전 『베벌리』가 어느 면에서 더 섬뜩하다고 느꼈어요. 『베벌리』의 10대나 어른 들의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읽고 감상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되고, 그렇게 우리 안의 악마성을 길들이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기도 하겠죠. 

『베벌리와 『사브리나』를 연결하는 접점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겠어요?

전 「꼬마 왕」에 나오는 타일러가 사브리나를 죽인 살인범인 ‘티미 얀시’의 어릴 적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타일러는 성과 살인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걸 어른들이 일찍 발견해서 상담이나 치료로 해결했더라면 ‘티미 얀시’ 같은 어른으로 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타일러의 부모는 극단적으로 말이 없고 마음 아픈 기색이 보이는 타일러를 그저 감싸고 위로하려 들 뿐 이유를 묻거나 치료할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여행지의 풍경을 관망하는 것처럼 아이의 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그걸 반복해서 환기시켜주고 싶은 걸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의 병들어서 곪아가는 부분을 직시하지 못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이죠.

꼭 독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거 알면 정말 재밌는데’ 싶었던 포인트가 있으셨나요?

『베벌리』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에서 「잔디 둔덕」이 그런 예였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살’과 살을 왕따하는 10대 아이들은 지극히 미국적인 뉘앙스를 담아 말하고 있어서, 단순히 대사를 번역해서만은 표현할 수 없는 특유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걸 독자들에게 좀 더 생생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2018)에 이어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2020)까지 작가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직접 쓴 작품으로 독자를 만나는 것과 번역으로 독자를 만나는 것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요?

직접 쓰는 건 아무래도 책임감이 매우 크죠. 내가 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독자들이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뭔가를 얻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나무에게 미안할 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쓰거든요. 번역은 그보다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리고 덜 외롭죠. 번역하다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상상 속에서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 부분을 풀어가려 애쓰기도 하고요. 반면 직접 쓸 때는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자유롭기도 하고. 각각 장단점과 매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한 해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책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한 줄이 크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위로를 여러분이 꼭 찾아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힘든 시간을 꼭 이겨내사갈 바랍니다. 이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시길 기도할게요. 




*박산호

번역가이자 작가. 중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배운 영어에 유달리 흥미를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외국 작가가 쓴 두꺼운 책을 늘 끼고 다니는 문학소녀였다. 이때부터 ‘영어’와 ‘책’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양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영국 브루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회화와 토익 강사를 거쳐 영상 번역가로 일하다가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가 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의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딸 릴리, 고양이 송이와 함께 알콩달콩, 아주 가끔 우당탕탕 살고 있다. 최근에 강아지 해피를 새 식구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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