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같이 싸우는 이들이 있어서 할 만합니다 (G. 김수정 변호사)
책읽아웃 - 김하나의 측면돌파 (167회) 『아주 오래된 유죄』
패소의 부담을 생각하면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지만 같이 그런 걸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동료들이 있고 ‘지면 또 하지, 뭐. 우리가 맨날 이기나? 주로 지잖아?’(웃음) 하면서 같이 싸우는 분들이 있으니까 할 만합니다. (2020.12.24)
성범죄 처벌법을 만드는 국회도, 수사기관도, 법원도 대부분 남성이 주도하고 있다. 일부 여성이 있다고 해도 남성들이 다져놓은 선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은 ‘가장’인, 혹은 ‘가장이 되어야 할’ 남성들의 성범죄를 ‘일탈행위’로 치부하고 우대 조치한다. 불법 영상을 촬영한 남성들이 교사 및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로 처벌이 감경(벌금형에 심지어 기소유예) 혹은 면제되는 것을 보라. ‘웰컴투비디오’ 사건에서 손정우에 대한 양형 참작 사유도, 결혼하여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법원이 성범죄자들의 취업을 금지한 직업군에 있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오히려 법을 무력화하기도 한다. 성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가족 부양이, 가장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 나갈 남성들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략) 가장의 책임이란, 가장이 되어야 할 성인 남자가 짊어진 책임이란 이렇게 무거운 것이어서 웬만한 성폭력은 성폭력이 아니고, 성폭력이라고 해도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만 지운다.
김수정 변호사의 책 『아주 오래된 유죄』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오늘 모신 분은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싸우는 변호사입니다. 호주제 및 낙태죄 위헌 소송의 대리인으로 활동하셨고, 20여 년간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와 이주 여성 등을 위해 법률 지원을 해오셨어요. 그 시간들 속에서 기록한 ‘여성 인권 투쟁기’를 담아 책 『아주 오래된 유죄』를 쓰셨습니다. 김수정 변호사님입니다.
김하나 : 제가 이 (게스트) 소개를 읽었을 때 ‘아, 너무 거창한데? 나 그런 사람 아닌데?’라고 하셨어요(웃음). 『아주 오래된 유죄』의 소개를 보면 “두 딸의 모자란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월급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수정 : 맞습니다. 그게 팩트예요(웃음).
김하나 : 그 앞에 보면 “법무법인 지향 구성원 변호사”라고 되어 있는데, 구성원 변호사라는 건 어떤 건가요?
김수정 : 쉽게 말하면 사장 격인데요(웃음)...
김하나 : 파트너인 거죠?
김수정 : 네.
김하나 :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요?
김수정 : 그런데 사장인데 거의 월급쟁이로 살고 있어서(웃음)... 그냥 작은 회사에 여러 명의 사장이 있고요. 그 중에 한 명입니다.
김하나 : 그러면 몇몇 뜻이 맞는 분들과 ‘법무법인 지향’을 같이 만드셨군요.
김수정 : 네. 각자가 10년 넘게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서로 활동이나 생각이 맞는 친구들이 돈도 같이 벌면서 추구하는 바도 같이 해보자는 취지로 만든 게 저희 ‘법무법인 지향’입니다.
김하나 : 싸우지 않고 잘들 지내고 계신가요?
김수정 : 일단은 크게 싸울 만큼 파이가 크지 않아서 싸우면 안 돼요(웃음). 그리고 다들 서로의 활동을 지지해주기 때문에 즐겁게 잘 지내고 있고, 그분들 덕분에 책도 쓰고 또 책에 나오는 사건들도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굉장히 고마워하는 친구들이죠.
김하나 : 그러면 이 사건이 너무 풀어내기 어렵다, 혹은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 부딪히기는 해야 될 사건인 것 같다, 그럴 때는 동료들에게 많이 조언도 구하고 서로 힘을 합치기도 하시나요?
김수정 : 같이 사무실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게 바로 그런 점이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 더 한 발 나아가서 많은 지원과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요. 제 책에도 나와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56년 만의 미투,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사건’인데요. 그 사건 같은 경우도 처음에 ‘여성의전화’에서 저한테 판결문을 보여주면서 재심할 수 있겠냐고 했는데, 판결문밖에 없는 거예요. 재심 사건을 하려고 하면 수사 기록이 다 있어야 되거든요. 수사 기록 중에 혹시 재심 개시 사유로 삼을 만한 사유들이 있는지를 봐야 되는데 수사 기록도 없고, 저희가 1년 넘게 기록을 뒤졌는데 보통 56년 전 사건은 간첩단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이 아니면 기록 자체가 없어요. 판결문만 가지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저희 사무실에 재심을 많이 하시는 동료 변호사가 있어요.
김하나 : 재심이라는 게 이미 판결이 났던 걸 다시 끄집어내서...
김수정 : ‘개시 사유’라는 게 있어요. 개시가 돼야 재판을 받아볼 수 있는 건데 개시 사유가 없으면 재판 자체를 할 수가 없어요. 기록이 있어야 그걸 뒤져볼 수가 있는데 판결문과 할머니의 말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제 눈에는 판결문 자체에 너무 문제가 많아서 수사 기록이 없더라도 판결문에서 보여지는 판사의 위법한 재판 진행으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또 저희 사무실에 재심을 많이 하시는 변호사님이 계시거든요, 이상희 변호사라고. 그 친구가 ‘언니가 그런 의문을 가졌다면 우리 무조건 해보자’고 하면서, ‘그러면 (피해자가) 56년 만에 어렵게 결심하고 나오신 분인데, 우리가 여성의전화와 협력해서 어떻게든 해보자’고 해서 시작된 사건이에요. 이번 주 금요일에 개시 재판이 있는데 저희가 거의 맨땅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뤘어요. 결론은 안 나왔지만. 판결문 다섯 장에서 시작한 이 사건이 지금 엄청나게 살이 붙었고, 하다 보니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로운 증거도 찾았어요. 비록 기록은 못 찾았지만. 그래서 지금 단정할 수는 없는데 많이 희망적으로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김하나 : 지금은 새로 밝혀진 것들도 참 많이 있죠? 그들(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사실 사귀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어떤 남자가 조금 같이 가달라고(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가다가 갑자기 키스를 하기 시작했는데 방어의 목적으로 혀를 물었고 그래서 (혀) 절단 사건이 일어났는데. 나중에 내용들을 알고 보니까 정말 기가 막히더라고요.
김수정 : 제가 기록이 없음에도 재판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던 내용은 뭐였냐면, 피해자를 탓하는 거거든요. 처녀가 처음 만난 낯선 남자를 따라간 걸 탓하고 있고. 그 다음에 ‘처녀였음이 증명됐다’ 이런 내용이 판결문에 있어요. ‘감정을 해서 처녀라는 걸 밝혔다면 도대체 어떤 감정을 했지? 이런 감정을 했다면 재판이 위법한 것 아닌가?’ 재판이 위법하면 재심 개시 사유가 되거든요. 그런 주장은 사실 지금까지 법정에서 해볼 수 없었던 주장인데, 그거에 제가 좀 꽂혀서 그 부분을 파헤쳐보고 싶어서 ‘이건 아무리 기록이 없어도 포기하기 어려운 사건이다’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지금 저랑 동료, 후배 변호사들까지 7명이 같이하고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재심 개시 사유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들도 확보를 했고. 그래서 지금 처음보다는 많이 신나게 하고 있어요.
김하나 : 그렇군요. 그것뿐만 아니라 사건의 디테일들이, 다시 찾아와서 (피해자와) 차라리 혼인을 하라고 한다든가...
김수정 : 그것보다는 이 가해자가 집에 찾아와서 칼을 들고 위협하고 그래서 특수주거침입으로 기소가 됐고 강간은 아예 기소도 안 됐어요. (피해자인) 할머니가 중상해죄로 기소가 돼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법정에서 같은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강간 미수의 피해자인 할머니는 구속되어서 재판을 받고 가해자는 오히려 석방되어서 재판을 받고. 결혼을 강요한다든가, ‘그런 일 당했으니 결혼 못 하는 거 아니냐, (피해자와) 결혼해라’, 경찰들부터 결혼하라고 강요하고... 사실은 그런 일이 제가 변호사 된 초기에도 있었어요. (피해자의) 부모들이 오히려 미성년자 딸을 강간한 20대 청년에게 자녀가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합의해주고, 이런 일들이 불과 20년 전에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법정에서도 판사가 ‘그래서 결혼은 안 할 겁니까?’ 이렇게 물어보고, 변호사도 ‘제가 한 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검찰도 이야기하고... 자꾸만 결혼을 권유하고 강요한 것도 다 위법한 수사이고 위법한 재판 진행이라는 것도 저희가 법리적으로 다투고 있거든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중요한 쟁점들이 있어서, 재심 개시가 되면 성폭력 사건에서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재심 개시 사건에서도 엄청난 법리적인,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 같습니다.
김하나 : 법률이라는 게 사회에서 가장 흔들리지 말아야 될 부분이기도 하고 아주 보수적으로 바뀌는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의 새롭게 바뀐 선례를 남기는 것 자체가 정말 신중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선례를 남기는 것도 쉽지가 않고. (변호사님이) 없는 길을 만들어보자면서 해 오신 것들이 엄청나게 쟁쟁한 것들이 많잖아요. 호주제 폐지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낙태죄 폐지에 대한 것들도 그렇고, 정말 다양한 곳에서 없는 길을 많이 만들어 오셨는데요. 그것을 계속 해나가실 때 힘든 점도 너무너무 많겠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때의 쾌감도 어마어마하겠어요.
김수정 : 그 맛에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생각보다는 힘들기도 하고 항상 가슴 졸이고, 선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한번 패소하면 그게 선례로 남아서 다시 시작하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준비 기간이 굉장히 길어요. 왜냐하면 패소의 부담이 너무 크고, 특히 헌법재판소에 가서 판결 받을 때는 한 번 합헌 판결 나오면 다시 위헌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 또 한 10년 가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엄청난 준비와 고민과 승패까지 따져가면서 하는데요. 그래도 괜찮은 건, 책에도 썼지만, 항상 함께하는 동료들과 싸우려고 하는 의뢰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패소의 부담을 생각하면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지만 같이 그런 걸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동료들이 있고 ‘지면 또 하지, 뭐. 우리가 맨날 이기나? 주로 지잖아?’(웃음) 하면서 같이 싸우는 분들이 있으니까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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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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