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특집] 아무튼, 부캐가 필요해 - 『경찰관속으로』 원도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0월호
회사에서 무력감이 들 때 작가 원도를 떠올리며 시름을 덜어요. 반대로 글이 안 써질 땐 본업으로서의 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요. (2020.10.14)
지난해 몇몇 신뢰할 만한 북리뷰어로부터 올해의 에세이로 이 책을 꼽겠다는 얘길 들은 일이 있다. 『경찰관속으로』. 현직 경찰관 신분의 작가가 사건 현장에서 겪는 현실적 고민과 정서적 내면을 생생하게 담아낸 에세이집인데 명치가 자주 아팠다는 독후감이 함께 딸려왔다. 얼마 전 같은 작가의 두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아무튼, 언니』. 첫 번째 책의 부제인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의 수신인들을 지면 위로 불러 올리고, 그들과의 우정과 연대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의 확장’을 써 내려간 책이다. 작가의 이름은 원도.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 그는 현재 일선 파출소가 아닌 과학수사팀 현장감식요원으로 활약 중이다. 24시간 당직도 서고, 강력 사건이 터지면 하루를 꼬박 눈 한 번 못 붙이고 현장에 매달리기도 하는 일이다. 현직 경찰이 작가라는 ‘부캐’를 꿈꾼 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작가를 목표로 하지 않을까요?” 거대한 허들로 느껴지는 등단 과정과 기성 출판의 문은 우연히 접한 독립 출판으로 사뿐히 뛰어넘었다. 걱정이 많아 시작하기 전에는 억겁을 흘려보내지만, 막상 손을 대면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캐릭터의 힘이 작동한 덕분이다.
독립 출판 워크숍을 듣기 위해 오가는 경로가 서울에서 체코 프라하에 가닿는 시간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힘든 과정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요?
경찰 조직에 입사할 때 나름 꿈이 컸는데, 당시엔 모든 게 무너진 상태였어요. 우연히 워크숍 홍보 문구를 읽고 다 죽게 생겼는데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10분 고민하고 신청했어요. 야간 근무 끝나고 한숨도 못 자고 간 날도 많고, 음식이라곤 수업 직전 카페에서 사 먹는 아이스 초코라테가 전부였어요. 그런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절박함이었던 것 같아요. 절박하게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했으니까요.
‘원도’라는 부캐명이자 필명은 어떻게 작명한 건가요?
원래 작가로 활동하면 쓰려고 지어놓은 이름이 따로 있어요. 습작도 대부분 소설이라 당연히 소설을 쓸 줄 알았거든요. 첫 책을 에세이로 내는데, 미리 지어놓은 이름하곤 안 맞겠다 싶어 급하게 지은 이름이 원도예요. 원래 사람 성씨 중에 ‘원’씨와 ‘도’씨를 좋아해서 붙인 건데, 사전을 검색했더니 ‘학문이나 재주가 높은 경지에 오름’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앞으로는 의도해서 지은 이름인 척, 그렇게 설명하려는 중이에요.(웃음)
‘본캐’의 필드라고 할 수 있는 사건 현장 이야기를 가감 없이 묘사하던데, 글로 옮기는 예비 과정이 있나요?
다루고 싶은 특정 키워드를 메모하기도 하지만, 돌연 떠오르는 한두 줄의 문장에 더 많이 의존해요. 그 문장들을 확장시키는 게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이죠. 『아무튼, 언니』가 특히 그랬는데, 모든 챕터가 한 줄의 문장에서 시작됐어요.
가감 없이 묘사한 현장의 무게가 책 무게의 수천 배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현장의 고통을 글로 옮길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어떤 건가요?
고통을 나열하되 피해자의 고통에만 초점을 두지 않을 것. 괴롭더라도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찾아 나설 것. 고통을 단절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 또 현장을 묘사한답시고 너무 적나라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을 것.
『경찰관속으로』, 『아무튼, 언니』를 읽는 독자에게 작가로서 기대하는 독후감이 있을까요?
경찰을 한 명의 ‘직장인’으로 봐주는 것. 경찰이라는 회사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독후감. 또 세상에 다양하고도 멋진 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영향을 받아 나도 어떤 결심을 했다는 독후감을 기다립니다.
‘000 경찰관’으로 불리는 게 아닌, ‘원도 작가’로 불릴 때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터라 더욱 남다를 것 같은데요.
첫 책을 낸 이후진프레스를 통해 알게 된 작가님들과 필명을 부르고, 나이 상관없이 존대하고, 누구와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책 이야기를 잔뜩 나누는데, 이때 받는 에너지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막연히 작가를 목표하던 시절엔 책만 내면 모든 게 바뀔 거라 생각했어요. 일상이 쉽게 변할 거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죠. 대신 동시에 모든 게 변하더라고요. 작가인 저를 지지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고, 회사에서 무력감이 들 때 작가 원도를 떠올리며 시름을 덜어요. 반대로 글이 안 써질 땐 본업으로서의 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요. 정말 좋은 순환이에요. 주변 동료들에게도 작가든 뭐든 상관없으니 뭐라도 하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녀요. 날것의 현장을 수습하는 경찰관이 가지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니까요.
느닷없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은 혹은 떠오르는 언니는 누구일까요?
『아무튼, 언니』에 등장하는 대장 언니요. 이 답변을 쓰는 날이 제 생일인데, 언니가 애인과 함께 쓰는 용도의 입욕제를 선물로 보냈어요. 만나서 물어보려고요. 나랑 같이 쓰자는 뜻으로 보낸 거냐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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