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특집] 행운아였다고 생각해요 - 번역가 김현우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0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운이 좋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수시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일을 두 가지나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나의 경계를 넓혀주는 문장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2020.10.13)



김현우의 ‘본캐’ 탐색을 위해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김연수의 열하일기>를 봤다.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할 때마다 길 위의 사람들이 『열하일기』 속 문장을 낭송했다. 그러나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낭송 전, 혹은 후에 그들이 한 행동이나 말이었다. “괜찮아요?” 하고 묻거나 가래침을 뱉어 목청을 돋우던. “거기까지가 그 사람이니까요.” 다큐멘터리 PD 김현우와 번역가 김현우, 둘 중 무엇이 ‘부캐’인지는 말하기 힘들다. 대학원 시절부터 번역을 했고, EBS에 입사해서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행운아』『G』『A가 X에게』를 비롯해 다수의 존 버거 책을 번역했으며 니콜 크라우스와 리베카 솔닛의 대표작도 그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출간됐다. 그사이 EBS ‘다큐 프라임’ <성장통>, <생명, 40억 년의 비밀>, <학교의 고백> 등을 연출했다. 스스로는 누차 “두 개의 트랙을 달리는 일”이라고 밝혔으나, 두 트랙은 때때로 상대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았을까? “존 버거의 『행운아』에 “풍경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썼죠. “종종 풍경은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커튼처럼 보인다. 그 뒤에서 사람들의 투쟁, 성취, 그리고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그런 커튼….” 이런 문장이 머릿속에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부캐’인지와 무관한 김현우도 있다. 





번역가를 바라보는 보통의 시선은 ‘홀로 책의 감옥에 갇혀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닐까요? 반면 다큐멘터리 PD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요. 김현우는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일까요? 

‘무엇을 할 때 더 편한가?’라는 질문이라면 아무래도 전자입니다. 번역가로 일할 때는 온전히 개인으로 작업하므로 좋지 않은 결과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도 저 혼자 받아들이면 되죠. 하지만 PD로 일할 때는 사람들을 친밀하게만 대할 수 없는 상황도 생깁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모든 사람과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 PD의 일이니까요. 

‘부캐’ 트렌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20년 가까이 두 개의 트랙을 달리면서 터득한 기술도 있을 것 같고요. 

제 경우에는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 텐데, 한 가지 모습을 주로 꺼내 쓰게 되죠. 물론 그 도구가 반드시 직업일 필요는 없지만, 해보니 나를 보다 온전히 사용할 수 있더군요. 기술은 딱히 없고요.(웃음) 좋은 점은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내가 고민한다고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다른 쪽 작업에 몰두합니다. 문제를 ‘잠시 잊는’ 것이죠. 

<김연수의 열하일기>를 보면서 문득문득 번역가 김현우가 느껴지기도 했어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이건 번역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거나, 반대로 번역을 하면서 ‘이건 내가 PD가 아니라면 나오지 않았을 문장이다’라고 의식해본 적은 없습니다. 제 다큐멘터리에서 문학적 요소가 느껴진다면, 그건 순전히 독서에 사용한 시간 덕일 겁니다. 다만 2018년에 방송한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혼자 하는 작업에‘도’ 익숙한 김현우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기획부터 완성까지 제 뜻대로 한 작업이었어요. 

번역으로 진입하는 루틴이 있을까요? 번역가 김현우의 작업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요? 

주말의 거실이 제 번역 작업장입니다. 지루하다 싶으면 동네 카페에 가서 두어 시간 작업하고 돌아와서 다시 거실 책상에 앉습니다. 주말로 해결이 안 될 때는 휴가를 내고 몰아서 작업합니다. 이럴 때는 집을 떠나 지방으로 갑니다. 주문을 거는 거죠. ‘나는 일하러 온 거야’ 하고. 

지금까지 두 개의 트랙을 병행한 이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번역의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알아본 것’을 전하는 즐거움이 아닐까요? 실은 얼마 전 다른 잡지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때 든 생각이 ‘번역은 연주다’였어요.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마다 ‘알아본 것’이 다르고 저마다 다른 연주를 하죠. 번역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최근 작업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존 버거 사후에 나오게 된 두 작품(소설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와 『결혼식 가는 길』) 모두 이미 한국어판이 있는 상황에서 작업했습니다. 

곧 출간될 『결혼식 가는 길』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영국에서 어학 연수하던 시절 ‘신간’ 『To the Wedding』을 만났죠. 몇 해 후에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됐는데 제목이 『결혼을 위하여』이더군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결혼식 가는 길』로 고쳐 달았습니다. 

아직 출간 전입니다. 번역가의 추천사를 먼저 들을 수 있을까요? 

연인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청혼하는 신랑이 있고, 그 남자의 진심을 알아보고 함께 질병에 맞서는 신부가 있습니다. 살면서 절망스러운 일과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고, 그 조건을 그대로 안은 채 충실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일. 그것이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는 소설입니다. 

두 개의 트랙에서 일해온 시간은 행복했나요? 

운이 좋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수시로 나를 돌아봐야 하는 일을 두 가지나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나의 경계를 넓혀주는 문장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런 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죠.


 

결혼식 가는 길
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저 | 김현우 역
열화당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정다운, 문일완

  • 행운아 <존 버거>,<장 모르> 저/<김현우> 역

    8,820원(2% + 1%)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 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저/<김현우> 역

    16,000원(0% + 0%)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시인 김겨울의 첫 시집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왔던 김겨울 작가가 시인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본래 시인일지도 모르겠다. 김겨울 시인은 우화라는 이야기의 형태를 빌려, 담대하게 불가해한 인생의 의미와 슬픔이 가져다주는 힘을 노래한다. 다 읽고 나면, 이 시인의 노래를 가만히 서서 듣고 싶어질 것이다.

수사학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

‘설득을 위한 기술'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수사학.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28가지 대화법을 담았다. 대화와 설득에 번번이 실패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싸우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사가 귀찮은 사람이라면 필독

무기력. 전 세계를 뒤덮은 감정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 3년이 결정적이었다. 매킨지 조사로는 세계 직장인 42%가 무기력한데 한국은 51퍼센트로 높은 편이었다. 희망은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가 무기력을 극복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어린이들이 던지는 유쾌한 한 방

궁금한 건 뭐든지 파헤치는 '왜왜왜 동아리' 제대로 사고쳤다?! 반려견 실종 사건을 파헤치던 동아리 아이들, 어른들이 이익을 위해 선택한 일들이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후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세상을 바꿔나가는 개성 넘치고 활기찬 아이들의 반짝이는 이야기를 담았다.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