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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의 성공한 덕후] 2019 제주도 여행 (1) - 내가 암이면……어쩌지?

다시 찾아온 ‘성공한 덕후’ 특별 기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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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 김민섭은 말했다. “느슨한 연대를 추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등입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해냈다. (2019.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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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의 커피집 ‘비브레이브’에서 로스터리 커피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3년 전, 갑작스레 백내장이 발발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다. 남들은 5시간 걸린다는 검사가 나만 이상한 게 자꾸 발견된다며 8시간이 걸렸다. 올해 7월 받은 종합 검진도 그랬다. 남들은 3시간만에 끝나고(그 남들 중에는 엄마도 있었다) 집에 가는데 오직 나만 5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가란 허락이 안 떨어졌다. 이 검사를 하고 나도 기다려라, 저 검사를 하고 나면 또 다른 검사를 더 해야겠다 하더니, 5시간 후에야 가까스로 들은 말이 이랬다.

 

“갑상선에 수상한 게 있군요.”

 

나는 이 날 처음 갑상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다. 갑상선이란 건 목의 가장 아랫부분, 쇄골과의 경계더라. 내 갑상선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수상한 혹들, 정확하게는 결절이 있었고, 의사는 이 중 딱 하나를 꼭 집어 가리키며 이게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암이란 단어가 이렇게 쉽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서른여덟 살에 백내장 수술을 할 줄도 몰랐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의사는 바로 ‘간단한’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 ‘간단한’이라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가……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나는 몰랐다. 의사가 말하는 ‘간단한’은 등산하는 스님이 말하는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랑 비슷하다는 사실을.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자주 봤다. 사고가 난 현장, 응급상황에서 의사들이 달려온다. 숨을 못 쉬는 환자들에게 “기도를 확보합니다!” 소리를 지르고는 바늘로 목을 쿡 찔러버린다. 그러면 피시식,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환자가 콜록콜록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 날, 의사가 내게 한 게 딱 저랬다. 주사바늘로 목을 쿡 쑤신 후 사정없이 휘저었다. “간단하다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따지고 싶었지만 말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 가만히 있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나니 찝찝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기분은 이틀 후 제주도로 떠나는 금요일인 7월 12일까지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며 머리 한 구석으로는 계속 같은 생각만 했다.

 

‘내가 암이면……어쩌지?’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도 이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제주도 애월에 사는 차영민 작가 가족과 만나 마침맞게 열린 오일장을 돌면서도, 그곳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나는 머릿속 한 구석으로는 내가 암일 경우에 대비한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하필 이 날 저녁 ‘절망’을 골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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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전통주 ‘고수리술’을 빚는 명인의 손길.

 

 

제주도와 절망사이에서

 

이번 제주도행은 크게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서귀포에서 열리는 장르문학부흥회에 참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연달아 열리는 애월의 작은 서점 디어마이블루 1주년 기념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서귀포에서 열리는 장르문학부흥회는 폴인과 북스피어, 그리고 카일루아가 함께 진행했다. 짐을 푸른 후 회의장으로 가니 가장 먼저 주어진 미션이 카드 뽑기였다. 제주도, 절망, 희망 등등 갖가지 단어가 적힌 카드. 이 중 하나를 고르라는 이야기에 나는 제주도와 절망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절망을 뽑았다. 알고 보니 이 카드는 김탁환, 박상준, 김민섭, 김봉석 등 조장들이 직접 고른 단어들이었다. 각 단어를 고른 이가 조원이 되는 시스템으로, 내가 고른 단어 ‘절망’은 김민섭 조장의 선택이었다. (알고 보니 같이 놓고 고민한 ‘제주도’ 역시 김 조장의 선택이었다)

 

‘절망’ 카드 뒤에 적힌 ‘김민섭’을 보는 순간 나는 말했다.

 

“저, 다시 뽑음 안 되나요!”

 

김민섭 작가는 지난 6월까지 근무한 카페 홈즈의 단골이다. 평소 자주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런 자리에서 같은 조에 앉으면 왠지 민망했다. 그러나 이미 고른 선택을 무를 수는 없었기에 그대로 조를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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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를 늘어놓은 테이블과 이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척하는 김민섭 조장

 

 

구경과 여행 사이에서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 게 자연스런 사람의 마음이리라. 내겐 제주도가 그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주도에 네 번 왔다. 첫 번째는 친구가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서 축하하려고, 두 번째는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들과 함께 제주도를 유랑하려고, 세 번째는 친구가 간다기에 무턱대고 따라왔고, 이번이 네 번째였다. 39세부터 41세까지 고작 3년 사이 4 번이라니 많은 것도 같고, 지난 40년간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횟수가 적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제주도를 만나보려고 이번엔 독특한 패키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문학부흥회’를 선택했다.

 

패키지 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하지만 나는 첫 해외여행을 패키지로 다녀와서 그런가, 그곳에서 인솔자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조금 인식이 다르다. 내 첫 해외여행은 유럽 3개국 일주일 완성! 같은 코스였다.

 

2002년의 일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목적지인 스위스에서 현지 인솔자를 만났다. 이제는 이름도 까먹은 인솔자는 40대 중반의 (아마도) 우리나라 여자였다. 까무잡잡하게 피부를 태우고,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그녀는 한눈에도 멋져 보였고, 연이은 말은 더 멋졌다.

 

그녀는 말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먹어야 합니다.” 내 인생 최초의 에스프레소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들러서 각설탕 두 개를 넣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호텔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던 며칠 사이 언젠가, 그녀는 또 멋진 말을 했다.

“지금 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유럽에 점을 찍고 있다고 생각해라.” 지금 우리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은 구경이지, 여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이런 식으로 어디에 뭐가 있구나, 정도를 익힌 후 배낭여행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다시 한 번 유럽에 오라고 이야기.

 

최근 연신내에 있는 ‘니은서점’에 북토크에 참석했다가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날의 연사는 강병융 작가였다. 강 작가는 그의 책  『도시를 걷는 문장들』  을 소개하며 여행과 구경의 차이점을 논했다. 여행이란 스스로를 찾는 여정이다, 결국 우리가 타지에서 만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그런 여행과 구경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장르문학부흥회라는 패키지를 따라 오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무의식 중에 나 자신을 찾으려 들었으니까.

 

어쩌다보니 오랜 시간 커피를 만들었다. 얼결에 태극당 카페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어영부영 15년 이상을 근무했다.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작했기에 혼자 공부를 했다. 생두를 사다가 집에서 볶아보기도 하고, 유명한 커피집이 있다고 하면 물어물어 찾아가서 맛을 비교하고, 책을 찾아 읽었다. 내 실력이 월등히 늘어나는 기적은 없었다. 오랜 세월 일을 하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커피를 내리는 정도의 능숙함은 생기긴 했지만. 그래서 제주도에서 커피 한 길, 술 한 길을 걸었다는 사람을 만나자니 그저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장르문학부흥회의 강연 역시 이랬다. 박상준의 ‘헬조선을 떠나 우주로!’ 김봉석의 ‘도시괴담, 요괴 혹은 (귀)신’, 김탁환의 ‘자유인에 관한 소고’ 김민섭의 ‘새로운 작가들의 시대’에 갑작스레 추가된 안전가옥 김홍익 대표의 강연까지 연사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선보였다. 다섯 명의 연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한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명인들과 비슷한 꼴이었달까.

 

이번 장르문학부흥회는 그런 명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의 숫자가 상당수 부족했다. 본래 목표했던 백 명에 한참 이르지 못하는 스물네 명의 객만이 함께 했다. 처음에는 어쩌나 싶을 정도의 소수였으나,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다. 장르문학부흥회는 내년에도, 또 내후년에도 계속 되겠지만 이렇듯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의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드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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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부흥회 모집포스터

 

 

느슨한 연대, 우리가 해냈다

 

처음 조를 나누기 위해 골랐던 단어들은 알고 보니 ‘스토리잼’이라는 게임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식은 간단하다. 자신이 고른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라. 그 이야기를 합쳐서, SNS에 공개, 가장 많은 득점을 받은 조에게 상품이 돌아간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든 기분은 ‘귀찮다’였다. 제주도에 쉬려고 왔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더 쉬고 싶어졌다. 내게 쉰다는 건 글을 쓰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논다는 것과 동일어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글을 써야 한다고. 다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노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나만 이럴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김민섭’ 조는 다들 그랬다.

 

조장 김민섭은 말했다. “느슨한 연대를 추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2등입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해냈다. 다른 조들이 아침 일찍 조식을 먹으며 회의를 해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도, 김민섭 조는 그러지 않았다. 적당히 즐기며 각자 시간을 보내자고 한 덕에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적당한 긴장감 덕이었을까, 김민섭 조는 정말 2등을 달성했다. 그래서 나는 박수를 치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느슨한 연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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