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자 윤태웅 “젊은 친구가 필요한 이유”
『떨리는 게 정상이야』 저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쌓은 경험, 연륜이 언제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잖아요. 현재의 문제에 과거의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어요. (2018. 11. 07)
‘과학은 우기지 않는 거다’, ‘부끄러움은 왜 학생의 몫인가’, ‘교수님 제발 수업 좀 제때…’ 얼핏 보면 학생이 쓴 글의 제목 같으나, 윤태웅 고려대학교 전자공학부 교수가 쓴 첫 과학 에세이 『떨리는 게 정상이야』 의 목차 제목 중 일부다. 담박하고 단정한 글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꼭 좋아할 책. 문과 기질이 농후한 사람이라도 과학적 사고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도 쉬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를 추려본다면 공부, 학교, 세상. 세 주제를 한 단어로 묶어본다면 ‘성찰’이라는 표현이 알맞겠다. 나로부터 시작해 세상을 보고, 세상으로부터 시작해 스스로를 성찰하는 글. 윤태웅이 쓴 69개 글의 공통점이다.
제어공학을 전공한 윤태웅은 과학자로 사는 시간, 선생으로 사는 시간, 시민으로 사는 시간의 범주를 뚜렷하게 나누지 않는다. 공학을 생각하다 학생들을 생각하고, 학교 문제를 고민하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셈이다. “읽기보다 쓰기를 더 많이 하는 처지가 불편했지만”(9쪽) 책을 쓰고 나니, 성찰과 소통의 즐거움이 한결 배가 됐다. 윤태웅 교수는 학생들에게 줄곧 말한다. “진정한 배움(Learning)의 출발점은 의도적 비움(Unlearning)입니다.” 비판을 즐거이 수용하는 태도를 갖고 싶다면, 적어도 꼰대는 되고 싶지 않다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성싶다.
비판할 수 없는 글은 없다
서문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쉽게 읽히면서 깊이도 느껴졌어요. 3년이 걸려 나온 책이라니 후련한 마음이 있었겠습니다.
아마 3년도 더 지난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출판사에게 마음의 빚을 갚은 느낌이에요. 약속을 지켰다는 것보다 빚을 갚은 느낌이 더 있어요. (웃음)
원래 계약한 책 제목은 ‘세상이 실험실이다’였다고요.
공학자로서의 제 이야기가 궁금하셨던 것 같아요. 분류하자면, 이 책은 교양 과학 에세이일 텐데요. 공학, 합리적, 민주주의, 자유 등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글이 많아요. ‘공학자 윤태웅의 공부, 그리고 세상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지만 꼭 공학 이야기만은 아니죠.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한겨레> 지면에 썼던 칼럼 제목을 박래선 에이도스 대표님이 ‘떨리는 게 정상이야’라고 고쳐 주셨어요. 본문에 나온 글귀를 꼭지 제목으로 가져오신 건데, 저는 이 꼭지 제목을 책 제목으로 선택한 거죠.
『떨리는 게 정상이야』 라는 제목만 읽었을 때, 어떤 떨림인지 물음표를 던질 독자도 있을 거예요. 신영복 선생의 서화집에 나오는 지남철(나침반, 指南鐵)의 비유에서 나온 말이죠?
제대로 작동하는 지남철은 바늘 끝이 늘 불안스러워요. 떨고 있기 때문이죠. 반면에 고장 난 지남철의 바늘 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아요. 마치 어느 쪽이 남쪽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듯이요. 저도 학생 땐 흔들림 없이 확신에 가득 차 있던 선배들이 부러웠어요. 뭐가 뭔지 몰라 버벅거리는 제 모습이 불만스러웠죠. 그런데 신영복 선생의 서화집을 보고 나니, 떨리는 게 정상이라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무지에 대한 단순한 위로는 아니에요. 온전한 지남철은 마구잡이로 떠는 게 아니라, 남쪽이라는 구체적인 지향점이 있으니까요. 이런 떨림을 유지하라는 건 정체되지 말라는 요구죠.
공부, 학교, 세상으로 나눠진 목차를 쭉 읽는데, 흥미롭더군요. 짧은 제목의 묘미도 느껴졌고요.
지면에 썼던 글의 제목들을 거의 살렸는데요. 지금의 시점에 맞게 내용을 조금씩 고치긴 했지만 논거와 논지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요. 독자들을 밀어낼 것 같은 제목도 조금 바꿨고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과정’을 강조하신 것이 인상에 남아요. “답 찾기보다 더 중요한 게 문제 만들기”(49쪽)라는 말과도 이어집니다. 저자로서 책을 쓰는 과정은 어땠나요?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궁금합니다.
쓰는 과정에서 특별한 기억보다는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글과 삶이 무관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 크게 동의하기 때문에 자꾸 반성하게 됐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고요.
글을 쓰고 난 뒤, 삶이 따라오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렇죠. 저를 견인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늘 경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글을 쓸 때, 완전히 나와 일치된 글을 썼는지 모르겠지만요.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갖고 있는 글쓰기의 철학일 지도 모르고요. 제어공학도 그래요. 목표와 현실, 이 둘이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는 과정일 수 있는데요. 현실과 목표의 차이를 줄이려고 할 때, 이 행동은 성찰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사람의 행위를 기계적으로 구현했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죠. 이른바 사람이 어떻게 제어하는지 보고, 기계도 저렇게 제어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니까요.
“읽기보다 쓰기를 더 많이 하는 처지가 불편했다”(9쪽)고 말씀하셨어요.
칼럼을 쓴 기간이 ESC 대표 활동을 할 때였어요. 그 전에는 쓰지 않고 읽기만 했다면 완전히 역전됐던 거죠. 안팎으로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읽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처음 겪어 보는 스트레스였어요. 가까운 지인들이 “공부가 꼭 책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공부하는 사람에겐 공부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제 처지가 좀 불편했죠.
책이 나오면 주변에서 온갖 축하와 격려가 쏟아지는데요. 교수님께서 페이스북에 공유한 글을 하나 읽어 보니, 완전히 호평만 담긴 리뷰가 아니었어요. 보통 비판이 들어 있는 글을 저자가 직접 공유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비판을 수용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단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인정하지 않았으면 굳이 공유까진 않았을 텐데요. 제게는 납득이 되는 글이었어요. 그리고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글은 없지 않겠어요? 비현실적인 일이죠.
명쾌하면 좋은 책이다
보통 퇴고는 몇 번 정도 하시나요?
글을 보내야 하는 시점까지 고치는 것 같아요. 읽을 때마다 걸리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퇴고를 계속하는 게 꼭 좋지만은 않아요. 그만 봐야 하는 게 맞죠. 매주 화요일에 칼럼을 보내야 한다면, 주말에 초고를 쓰고 계속 고치는 편이에요.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으실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론 없는 것 같아요.
48쪽(‘교수님 제발 수업 좀 제때’) 에피소드가 생각나는데요. 제발 정해진 종료 시간에 수업을 끝내 달라는 학생이 있었어요. 요즘은 수업 종료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계신가요?
네. (웃음) 알람도 해 뒀어요.
학생이 학과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다음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까지 가려면 이동 시간이 꽤 긴데, 수업 시간이 계속 길어지면서 지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수업에 굉장히 열의가 있는 예의 바른 학생으로 읽혔어요.
요즘 학생들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는데요. 꼭 그렇지 만도 않아요. 아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좀더 거침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요. 물론 각각의 관계, 맥락이 다르고 제가 겪은 일을 일반화할 수는 없을 텐데요.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질문하기는 학생의 특권이니까요.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질문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의가 중요하지만, 예의를 꼭 나이와 연결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외려 논점이 흐려지죠. 예의는 나이를 떠나 서로 지켜야 하는 것이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반말이나 막 하는 거야말로 무례한 일이죠.
학생들에게 ‘수학적, 논리적 사고와 정확한 한국어 문장 쓰기’를 강조하고 있으시다고요. “잘 들리는 글이 잘 읽히는 법”(38쪽), “읽어서 이상하면 고치자! 글은 고치는 거다”(39쪽)라고 쓰셨어요.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고 글이 많이 달라졌죠. 그 전에는 텍스트 대 정보량을 따졌으니까요.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 분과 오래 싸웠어요. 혼자서요. 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쓰지 않을 논리적 근거를 찾다가 접은 거죠. “선생님이 옳습니다”라고 두 손을 들었다고 할까요? 선생님 문장이 되게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 분의 글쓰기 철학에 동의하는 거죠. 이오덕 선생님을 따라 ‘우리글 바로쓰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다 곧 ‘한국어 바로쓰기’라 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어는 외국인도 할 수 있으니까요. 국어 대신 한국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죠. 결국 중요한 건, 말에서 멀어지지 않는 글쓰기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글쓰기 책을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책을 또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또 쓸 필요가 있을까, 또 책으로 묶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공계 글쓰기 책도 찾아보면 꽤 많거든요. 예전에 글쓰기 책을 쓴다고 하면서 생각해 놓은 게 있었는데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에 다 나와 있더라고요. 제가 강조하는 논리적 글쓰기, 이오덕 선생님 이야기도 있고요. 내가 또 한 권의 책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어떤 형태로든 주제가 분명한 것들에 관해서 쓴다면, 쓸 것 같기도 하고요.
독자로서 평소 즐겨 읽는 책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교양 과학, 교양 수학책이 편하게 읽혀요. 예를 들어 역사와 철학도 일반적인 역사나 철학보다는 과학의 역사, 과학의 철학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좋아해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보 위주의 독서를 많이 한 것이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 싶어요. (웃음)
어떤 문장을 선호하시나요?
아무래도 간결한 문장을 좋아합니다. 과한 글, 과잉 표출된 글을 읽을 때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죠.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줘야 하는데, 자신이 생각한 이상을 쓰는 글을 볼 때가 있어요. 이것이 파랗다라는 걸 보여주려면 파란색을 보여주면 되는데, ‘이건 파란색이야’하고 명시해버리는 글은 좋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아요. 문장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문장들을 모아 놓았을 때, 명쾌하면 좋은 책이죠. 멋을 부리려고 하면 멋이 안 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대학에서 제어계측공학과를 선택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전공 선택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거잖아요. (웃음) 당시에는 로봇을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마냥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대보다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가 어두웠던 시절이다 보니 전공에 집중했던 학생들이 많지 않았죠.
과학과 수학이 사유방식으로서 한국사회에 문화로 자리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를 만드셨고, 올해 6월 초대 대표 임기를 마치셨는데요. “과학기술자로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어떤 마음이셨나요?
굳이 말하자면 학교 중심부의 생각과 달랐던 거죠. 연구자는 논문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논문을 써야죠. 하지만 연구의 성과에만 집중하면 왜곡이 생겨요. 교육과 연구가 상호보완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연구가 교육을 왜곡하는 상황도 벌어지는 거예요. 문제제기를 하면 한가로운 이야기로 듣고요.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을 안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요. 이런 저런 시도도 하고 실패도 했다가, 조금은 지친 상태였죠.
흥미로운 건,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꼭 과학기술자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ESC(Engineers & Scientists for Change)는 과학기술자가 아니라 과학기술인 단체를 지향해요. 여기서 과학기술인이란 과학기술에 관해 고민하는 과학기술학자, 저술가, 교수, 문화, 예술, 언론인, 관심 있는 시민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좋은 과학기술자 단체를 꿈꿔왔는데, 과학기술인으로 확장된 건 자연스러운 논리인 것 같아요. ESC는 과학기술의 공공성을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사회의 소통을 추구해요.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의 합리적 사유의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목표예죠. 올해 8월을 기준으로 500여 명이 가입했는데 학생은 21%, 여성은 35%, 오프라인 활동의 여성 참여율은 50% 안팎에 이르고 있어요.
호칭을 부를 때 ‘~님’을 사용한다고요.
저는 ESC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도 ‘어떻게 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학교나 사회나 소통을 잘하는 모습을 많이 못 봤어요. 동의하는 목소리든 아니든 서로 설득하기 어려운 구조일 때가 많아요. 권위적이지 않은,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사례를 만들고 싶었어요. ‘님’으로 부르는 것은 기업이 먼저 시작한 문화인데,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 됐죠. 문제는 기업은 선언하면 할 수 있는데, 사회는 쉽지 않다는 거예요. ESC는 단체의 성명이나 견해를 표명할 때,회원 과반의 응답과 응답자 2/3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해요.
크라우드펀딩위원회에서 첫 펀딩으로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제안했고 성공했어요.
유의미한 결실 중 하나로 생각해요.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서 힘들에 일상을 이어가는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에 시민들의 연대를 끌어낸 사례죠.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것과 우연히 일치한 프로젝트예요.
책 제목으로 쓴 칼럼의 원제가 ‘적어도 꼰대는 되지 말자’였어요. 2시간여 대화를 나눈 인상으로는 교수님은 결코 꼰대가 되지 않으실 것도 같은데요.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찰과 열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성찰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열림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제 생각으로는 젊은 사람을 친구로 볼 수 있다면 꼰대가 되진 않을 것 같아요.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야 하고요. 실제 ESC 활동을 하다 보면,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합니다. 한 그룹에 섞여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이니까요.
젊은 친구들이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요. 꼰대스럽지 않은 어른 곁에는 늘 좋은 젊은 친구들이 모여요.
(웃음) 잘 섞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 있으면, ‘이 사람이 내가 못 보는 걸 보네?’ 그런 걸 느낄 거잖아요. 탁월한 마음으로 애를 써야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저 사람이 나보다 직급이 높아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야’라는 마음가짐도 필요하고요.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의 실력을 쫓아가지 못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요. 너무 부끄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두뇌도 육체의 일부니까요. 당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가 쌓은 경험, 연륜이 언제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잖아요. 현재의 문제에 과거의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이 책이 과학 분야로 분류되었지만 오히려 인문, 사회 계열 전공자들이 많이 읽을 것 같기도 해요. 예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과학과 수학이 꼭 이공계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유방식이자 문화,시민적 역량의 한 부분으로 과학과 수학을 생각하면 좋겠어요. 문사철 같은 인문학(Humanities)과 더불어 과학과 수학은 핵심 교양(liberal arts)의 또 다른 축이에요. 이과 학생들한테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만큼 문과 학생들에게도 과학, 수학적 소양이 필요해요. 과학을 인문학처럼 하는 게 아니라 과학과 인문학을 핵심 교양으로 함께 공부하는 게 답으로 여겨져요.
지금 교수님 수중에 이 책이 딱 한 권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나요?
젊은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썼는데요. 어쩌면 제 또래의 독자가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고 나름의 식견, 선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지만 조금 더 성찰적인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에필로그에도 썼지만, 우리 세대는 청년 친구를 둘 필요가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탈권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떨리는 게 정상이야윤태웅 저 | 에이도스
시민들에게 왜 수학이 필수교양이어야 하는지부터 과학자와 과학자 공동체의 관계,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성소수자 문제 등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공학자의 언어와 생각으로 풀어냈다.
관련태그: 떨리는 게 정상이야, 윤태웅 공학자, 젊은 친구,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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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공학을 가르치는 공학자가 오랜 세월 고민하고 사유해 온 내용을 담은 과학 에세이이자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또 과학 지식과 수학적 사고의 힘은 어디에 있는지, 공학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한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 세상을 바라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