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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모른다는 건 바람직한 태도”

『오늘은 잘 모르겠어』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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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흔히 가장 세련된, 고급스러운 형태의 언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시가 세련되고 세련되지 않고를 떠나, 모든 구별이나 위계를 떠나 소리라고 생각한다. 글로 쓰인 것이든 육성이든.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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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

 

3은 안정감을 준다. 의자도 다리가 세 개면 서 있을 수 있고, 승부를 가르려면 삼세판은 해야 한다.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의 세 번째 시집도 안정감을 주지 않을까.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이미 대중과 문단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에서 화자는 안정적으로 자기 기반을 다지기보다, 그저,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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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집중한 시집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보다 더 두툼해졌다.

 

편 수로 치면 첫 시집보다는 적다. 장시나 산문시, 시라고 볼 수 없는 어떤 형식의 것들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시를 모아서 낸다기보다 책을 엮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편지 형식의 시, 사진이 들어간 시가 있다. 다른 형식을 실험하고 싶었나?


조금 장난을 쳤다. 형식을 정하고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을 쓸 때 형식이 결정된다. 글을 쓸 때 상태나 마음이 가는 방식으로 인해 시 같지 않은 글이 나온다. 이미 많은 작가가 시도한 형식이라 실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오히려 만약 실험이라고 한다면 시집에 넣은 것 자체가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새로운 형태의 책을 내겠다기보다, 쓰고 나니 좋은데 어디다 발표하지? 발표할 데가 없네? 그럼 내 시집에 넣어야지 하고 넣었다. (웃음)


시집 제목이 ‘오늘은 잘 모르겠어’다. 화자가 자신 없어진 것 같기도 하다.


모른다는 게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한테는 바람직한 태도다. 모르겠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잘 모르겠어’처럼 불확실성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더하고 싶었다. 그런 태도가 삶에도 적용된다.


‘첫 시집이 세상과 거리를 좀 두고 있었고, 두 번째는 슬픔이 좀 많아졌다’라고 이전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유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 번째 시집이 달라진 게 있나?


사후적으로 생각해 보면 등장인물이 다양해졌다. 물론 가족이나 연인 같은 고정 등장인물들은 있지만, 그 외에 허무의 인물, 실제로 만났던 사람, 말을 약간 한 사람, 영향을 미친 사람, 외국 사람 등 인물들이 많아졌다.


시에 가족이 나오면 가족들 반응은 어떤지?


쿨하게 받아들인다. 첫 시집은 진지하게 정색한 적도 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갈수록 서로 농담도 한다. 가족은 정서적으로 강렬한 경험이나 기억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나 기억이 응축된 일종의 알 같은 거라, 그 알이 깨질 때 확장성이 오히려 강하다. 어떻게 보면 보편성도 있고. 일종의 패턴화가 되면 스스로 재미있기도 있다. 아버지 이야기는 죄송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낭독하면 좋을 법한 시가 꽤 있다. 시집을 펼치면 첫 번째 시 제목이 「들어라」다.


독자들과 만날 때 낭독을 통해 만나기도 하고, 낭독회를 기획하지만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진 않다. 낭독을 즐겨 하게 된 건 사실이다. 어떤 글이든 낭독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글이 소리가 되는 순간, 소리를 통해 만나는 현장이 흥미롭다. 시는 흔히 가장 세련된, 고급스러운 형태의 언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시가 세련되고 세련되지 않고를 떠나, 모든 구별이나 위계를 떠나 소리라고 생각한다. 글로 쓰인 것이든 육성이든.


시인의 말도 ‘잊지 않으리/창밖의 기침 소리’로 시작한다.


인간의 말이 타인에게 다다르는 형식으로 소리를 생각했다. 듣는 사람은 독자이자 청자다. 청자라는 타인을 염두에 두면서 말을 거는 형태의 시들이 나왔을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사후의 의미부여긴 하지만, 묶어 놓고 보니 소리에 집중을 한 면이 보인다. 「혀 없는 것처럼」도 그렇고.


그렇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책이 없었을 때 이야기는 이야기꾼이 듣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근대문학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간체라고 하는 편지글도 계속 나오고. 문학의 기본이나 본질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닐까. 그게 두드러지거나 두드러지지 않거나 할 뿐이다.


천착하는 주제가 있나?


시집을 내면서 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머릿속 디자인은 없다. 책이 알아서 진화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볼 때 회피할 수 없는 주제는 결국 하나다. 일종의 죽음이다. 예전에 첫 시집 냈을 때도 김소연 시인이 ‘너는 왜 죽음, 죽음 하니?’ 해서 내가 죽음에 관해 많이 쓰는구나 느꼈다. (웃음) 어떤 글을 쓰든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깔려 있다. 죽음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기록이 나의 시쓰기가 아닐까 한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다룬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은 쉼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을 빌려 쓴 시다. 원시의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라는 마지막 연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이 되었다.


쉼보르스카 시인의 단어에는 분노의 맷돌에 갈린 흔적이 없다고 쓴 적이 있다. 그분이 유머도 있고 표현이 온건한 편이다. 그래서 그 분을 두고 증오하시는 분 같지는 않다고 썼는데, 나는 조금 증오가 있는 것 같다. 그 시가 내 스타일로 써서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한다. 쉼보르스카 시인이 만약 그 사건을 썼다면 어떻게 나왔을까, 당연히 분노하고 증오하지 않았을까? 스타일의 차이라기보다 맞닥뜨린 사건, 그 시를 촉발한 사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건이 바뀌었다면 오히려 쉼보르스카 시인이 더 격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을 향한 애정이 담긴 「심보르스카를 추억하며」를 재밌게 읽었다. 오마주로 봐도 되나.


그렇다. 쉼보르스카 시인의 시집은 『끝과 시작』밖에 모르고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시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우연찮게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점도 그렇고 해서 생각하다 보니 굳이 ‘심’보르스카로 바꿔서 폴란드 고모님이라고 하는 썰렁한 농담이 떠오르더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 농담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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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잊고 있는지 드러내고 싶다


계속 사회 이슈에 관해 발언하는 시인이다. 스스로 사회적 불합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가?


사회라는 인과적 관계망 안에서 내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미에서 책임감은 있다. 하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결국 ‘우리’다. 이를테면 「스물세번째 인간」에서 스물세번째 인간이 너이자 나라고 하는 것. 「근육의 문제」에서 어느 순간 서로가 계급 밖으로 동시에 도약했다고 하는 것. 책임감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 끔찍한 세계에 다 연루되었고 산 자와 죽은 자는 그러므로 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산다.


다들 그 끔찍한 세계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부채감이 있는 게 아닐까.


살면 기여가 된다. 내가 바람직한 세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 별로 없다. 그냥 사는 거다. 누구나 일상을 살고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기억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잊고 외면한다. 다만 우리가 뭘 잊고 뭘 외면하고 있는지는 드러내고 싶다.


2012년 『지금 여기의 진보』 를 펴낼 때 대선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상황이 좀 바뀌고, 요새는 희망적으로 보나?


전혀. 그때도 정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정권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고, 정권이 바뀌면 조금 더 일상을 살게 하는 힘이나 위로를 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인 문제는 사실 아주 오랫동안 만들어졌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현재 정권에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채용한 인사들이 보인 언행을 보면 진보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회학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실 조직 안에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통 급여를 많이 보는데,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비정규직을 조직에서 대하는 태도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의 관행이나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조직을 이야기하면 보통 군대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터, 기업, 학교, 일상의 조직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조직인가, 그렇게 질문하면 별로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그런 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분위기나 추진력은 조금 생기겠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조직이 바뀌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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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는 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499번째 시집이다. 시인과 시집은 점점 늘어나는데 독자는 그만큼 늘지 않는 것 같다.


예술계라는 게 결국 공급 과잉이고, 생산자 수가 향유자의 수보다 다른 데 비해 높다. 높은 이유가 있을 거다. 이유 중 하나는 등단 매체의 수가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를 생각하면 제도적인 기제가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조금 더 많고 다양한 것 같다. 그거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고, 어쩔수 없다. 잡지나 등단 매체가 많다는 것도 누군가 잡지가 많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씩 만들면 비슷한 생각을 다른 생각이나 집단도 하게 된다.


독립출판 형식의 시집도 부쩍 늘었다.


한국은 제도적 실천이 빠른 속도로 확산한다. 예술계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고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시가 늘어나는 현상이 좋네 나쁘네 해도 그 부침의 흐름이 끊기거나 반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시가 세상에 많이 나온다고 할 때 결국 독자는 특정 출판사와 시인의 평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지가 아니더라도 다른 출판사에서 좋은 시집이 나올 수 있는데, 독자에게는 시를 접하는 채널이 너무 많이 온다.


상대적으로 독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시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여러 노력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어떻게 독자와 만날 수 있을지는 생각하고 있다. 다양한 시인이 만나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독립서점이나 동네서점도 시집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도가 어떻게 될지는 조금 지켜봐야겠다. 내 작업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시의 독자를 실제로 보면 기분이 어떤가?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고 피드백을 주면 재미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저런 질문이 나온다, 그러면 재미있다.


다음 집필 계획이 있나?


이건 지금 그냥 드는 생각이다. 이번 책을 내면서 책을 엮는 재미에 관해 생각했다. 기존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엮으면 어떨까 싶다. 아까 이야기한 제도적인 관행과 구조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만들면 독자와 시인이 만나는 방식도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저 | 문학과지성사
새로운 희망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 심보선이 시 언어로 지은 유예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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