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크리스토프 갈파르를 소개합니다
문과생으로서 장담하는데, 정말 쉬운 책이다 『우주, 시간, 그 너머』 크리스토프 갈파르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Galfard author photo (c) Astrid di Crollalanza
과학은 우리를 상상하고 꿈꾸게 한다. 그 꿈과 상상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하게 해준다. 만약 30년이나 40년쯤 전의 내가 블랙홀 같은 곳에 떨어져 현재의 서울에 뿅 하고 나타난다면, 내 눈에 비친 2017년의 세상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SF 세상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다들 들여다보고 있는 저 네모난 판은 뭐지? 길을 걸으면서 통화가 가능하다고? 은행에 가지 않아도 송금이 가능해? 허!
별로 길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을 바꿔놓은 과거의 꿈과 상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인공지능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지 아무도 모르고, 3D 프린터는 조만간 사람의 장기까지 만들어낼 태세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다음 진화단계가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우리 모두 기계 몸을 얻어 영원히 살겠다는 꿈을 꾸게 될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정말로 철이처럼 저 별들 사이를 누비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지도 모른다. 기계 몸이든 아니든, 그 옛날 배 한 척에 몸을 의지하고 대양을 탐험하러 나섰던 사람들의 본을 따라 우주선을 타고 저 광활한 우주를 여행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인기를 끌었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작은 우주선이 어두운 우주를 떠가는 장면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우주선이 상징하는 고독과 용기 때문에. (여담이지만 그 영화 자막에 ‘수평선’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저 오역을 수정해주고 싶다는 번역가의 직업병 때문에 손이 움찔거렸다. 정확한 번역은 블랙홀에 다가갔을 때 다시는 돌아 나올 수 없는 경계선을 뜻하는 ‘사건의 지평선’ 또는 ‘지평선’이다. 『우주, 시간, 그 너머』에도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처음 방송되었을 때부터 무작정 우주가 좋았다. 남들은 전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해 내가 얄팍한 지식이나마 갖게 되었다는 우월감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가서 다른 하늘을 보고 싶었다. 시간여행도 해보고 싶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또 <스타 트렉>에 빠져서 다시 우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1990년대 중반)에는 여러 케이블 채널에서 다양한 <스타 트렉> 시리즈들을 재방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 잘 맞추면 하루에 다섯 편까지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좋던지~~. 심지어 기말 페이퍼를 쓰다가도 시간 맞춰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이런 팬심(?)이 더 깊은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져 제목에 ‘우주’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들도 여러 권 사서 읽었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스티븐 호킹의 책을 읽은 것은 물론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고등학교 때 이과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책들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과시하고 싶은 욕구도 한 몫 하기는 했다. 그래도 책을 읽어 얻은 지식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지금도 대학에서 문과 공부를 한 사람치고는 과학에 대해 지식이 꽤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내가 멍청한 탓이 아니었던 거다
이런 과거 때문에 나는 『우주, 시간, 그 너머』를 번역하는 동안 마치 옛사랑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 이건 옛날에 어디서 읽은 내용인데.’ ‘와, 그때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계속 반가워하고 감탄하며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즐거웠다. 게다가 그 쉬운 문장이라니. 마치 중학생을 앞에 앉혀두고 차근차근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지 않은가. 스티븐 호킹 교수 밑에서 제대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이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칼 세이건의 문장이 우아하고 유려하다면(그가 책 『코스모스』에서 케플러를 설명한 글만큼 감동적인 문장을 나는 아직 과학서에서 보지 못 했다), 크리스토프 갈파르의 문장은 쉽고 장난스럽다.
그런데 갈파르는 단순히 쉬운 문장을 구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 해도 괜찮다고 독자들을 몇 번이나 다독거린다. 특히 양자세계를 다룰 때는, 독자들이 자기 말을 명확히 이해한다면 오히려 자기 설명이 잘못된 것이라며 독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음, 그래, 다른 책에서 비슷한 내용을 몇 번이나 읽었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내가 멍청한 탓이 아니었던 거다.
솔직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만 해도 그렇다. 상자 속 고양이가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 있다는데 상식적으로만 따지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죽었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산 거지 어떻게 죽었으면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이쯤 되면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아니, 과학 연구를 깊이 파고들다 보면 실제로 철학의 경계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애당초 고대 그리스에서도 철학자가 곧 과학자였으니, 만류귀종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런 과학을 은근히 무시하고 멀리하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과학책도, SF 소설도 모두 아동용으로만 치부된다. 요즘은 이른바 ‘덕후’들을 재조명하는 분위기라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나처럼 적지 않은 나이에 SF 장르와 우주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특이한 사람이라는 반응이 돌아올 때가 많다. 오래 전 한 유명 시인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우주여행의 꿈을 이야기했을 때도 돌아온 반응은 “아직도 소녀군요”였다. 우주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하찮음이나 SF 장르에 드러나는 현대문명에 대한 성찰 같은 묵직한 주제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런 가벼운 반응이라니. 그래서 공룡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차마 덧붙이지 못 하고 속에만 담아두고 있다, 흑흑.
이제는 몰라서, 어려워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서 과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가 조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언급한 인공지능과 3D 프린터의 경우처럼, 또 우리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여러 문명의 이기들처럼 과학은 우리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먹고 사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주나 양자세계 연구는 여전히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동문이나 GPS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GPS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자동문은 『우주, 시간, 그 너머』에도 소개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를 이용한 것이다(아인슈타인은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상대성이론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방정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과학지식이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과학책이 너무 어려워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라면, 『우주, 시간, 그 너머』를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과학책을 많이 읽어본 문과생으로서 장담하는데, 정말 쉬운 책이다.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형태가 아니라 소설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다.
갈파르는 지금까지 인류가 우주를 연구한 성과를 이 책에 모두 담았다고 말했다. 지금도 우주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니, 갈파르 본인이 지적한 것처럼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는 가까운 미래에 틀린 것으로 판명되어 폐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다 해서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주, 시간, 그 너머』에 담긴 것은 이 우주에 아직까지는 고독하게 존재하고 있는 인류의 발자취다. 언젠가는 우리의 고독을 덜어줄 외계 생명체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한창 떠들어대는 평행우주니 끈 이론이니 하는 것들이 죄다 틀렸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이론들이 모두 옳아서 누구나 자유로이 우주를 오갈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는 두려우면서도 짜릿한 곳이다. 우리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굳이 구분하려 들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있고, 꿈 꿀 수 있는 마음이 있고, 냉철한 계산을 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와 낯선 기호로만 이루어진 복잡한 방정식 속에 기적을 울리며 우주를 달리는 <은하철도 999>의 낭만과 꿈이 있다. 그리고 『우주, 시간, 그 너머』는 방정식 없이도 그 꿈을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진심으로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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