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날 특집] 출판사 대표 10인의 ‘나만 읽기 아까운 책’
독서가 뜸했던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이 책’
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재는 불안하다. 다른 길은 없을까.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4월 23일 ‘세계 책의 날’을 맞아 <채널예스>에서 출판인들에게 책 추천을 받았습니다.
199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제정된 ‘세계 책의 날’은 왜 4월 23일까.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 축제일인 '세인트 조지의 날(St. George's Day)'에서 유래된 날짜로, 4월 23일은 셰익스피어(1616년), 세르반테스(1616년)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책의 날’이 다가오면 출판계와 미디어는 잠깐 떠들썩하다. ‘책의 날’이니까 자연스레 “책 좀 읽자”고 부추기는데,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무슨 책?”이라며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하여 <채널예스>가 준비했다. 어렵고 딱딱한 책이 아닌, 잠깐 동안 책을 멀리 했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출판사 대표’ 10인에게 추천 받았다. 조건은 본인이 반드시 재밌게 읽은 책 중에 타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 10명의 출판사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척 기꺼이 책을 추천했다.
림태주(행성B 대표)
『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저, 삼인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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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나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하늘은 시, 혹은 시인을 말한다. 우물 속에 있는 이는 솜씨 좋은 비평가인데 자신을 겸양하여 낮췄다. 시를, 그 시를 쓴 시인을 호출해 시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도록 시의 전모를 밝히려고 애쓴 시평집이다. 어려운 책일 거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에세이처럼 술술 읽힌다. 읽고 나면 ‘시적인 삶’에 대해, ‘극단적인 어떤 것’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나는 무엇보다 문장이 좋아서 이 책을 곁에 두고 있다.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이런 서슬 푸른 문장을 책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해 둔 이는 황현산 선생이다.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레드 로자』 케이트 에번스 저, 산처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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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버소출판사판 만화책을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왔다. 놀라운 생동감! 아름다운 책은 역시 사는 맛이지. 읽는 건 그 다음 문제. 100여 년 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대기를 만화책으로 읽는다, 이건 당대의 축복이다. 왜 지금 다시 로자일까. 여전히 우리에겐 저항해야 할 야만성의 불합리한 사회적 벽들이 있으므로. 로자의 말들에 단 상세한 주석까지 포함한, 탁월한 시각적 이미지로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한 최적의 텍스트다. 원서 영자 타이포가 한글 타이포로 바뀌면 어떨지 궁금했는데, 번역본에서도 그 아름다움은 하나도 변색되지 않았으니 역시 너무나 좋은 것! 호로록호로록 봄날 오후 색 고운 장미차 한잔 마시듯 읽어도 좋다. 반드시 다시 읽고 싶을 테니깐.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이토 히로시 저, 메멘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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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현재는 불안하다. 다른 길은 없을까.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저위험 저수익 모델로 전투적 경쟁 사회에서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법’을 제안한다. ‘가늘고 길게’라는 말에 나는 꽂혔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장을 그만둔 후 5년간 7개의 직업을 새로 만들어 게릴라식으로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분투한 경험이 빼곡히 담겨있다. 마치 ‘이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조금 안심했다. 우리가 죽을 만큼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는 평범한 삶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성미옥(생각속의집 대표)
『마음의 사생활』 김병수 저, 인물과사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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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를 써본 이들은 안다. 그 안에 진짜 '나'란 인간은 없음을.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나를 쏟아 붓고 밀려드는 그 씁쓸함을. 그래도 의지력 하나만은 '짱'이라고 자위하지 않았던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 주변을 둘러보면 의지력 하나로 버티어온 사람들의 피로감을 쉽게 목도하게 된다. 자아 고갈. 세상의 기준에 따라가느라 정작 자신의 속마음은 꾹꾹 누르며 살아온 대가는 참혹하다. 저자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다 보면 정신적인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는데, 그러다가 자아고갈 상태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러니 의지력에 대한 자신감을 내려놓을 수밖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쥐어짜지 말고 마음에 휴식을 주자. 때로는 마음에도 사생활이 필요하다.
조성웅(유유 대표)
『지금 우리는 자연으로 간다』 리처드 루브 저, 목수책방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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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황폐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어릴 적 살던 시골의 자연을 떠올린다. 맑은 시냇물, 반짝이는 햇살, 살랑대는 바람, 싱그러운 나무와 풀 냄새. 그저 그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가 근거를 대라고 핀잔을 주면 나는 정말 기분이 나아졌다면서 우물쭈물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됐다. 자연은 실제로 정신을 치유하는 힘을 가졌다고. 자연을 통해 삶을 회복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을 읽다가 그냥 지나쳤던 풀, 꽃, 나무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귀한 경험은 덤이다.
정민영(아트북스 대표)
『모네가 사랑한 정원』 데브라 맨코프 저, 중앙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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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다."「인상: 해돋이」(1872)로 인상주의의 문을 연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중년의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코 정원이었다. 1890년에 마련한 지베르니의 집에 정원을 꾸미고, 엡트 강 지류에서 물을 끌어와서 수련이 가득한 연못을 조성한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듯 양귀비, 모란, 장미, 붓꽃, 아이리스 등을 심었다. 연못에는 수련을 키우고, 일본식의 다리를 놓았다. 모네의 지극한 양육에 힘입어 정원은 아름답게 변했다. 모네는 여기서 30여 년간 예술적 영감을 충전하며, 무려 250여 점의 수련을 그린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모네의 정원은 그 자체로 빼어난 회화작품이었다. 모네는 정원을 만들었지만 정원은 그의 작품세계를 바꿔놓았다. 지베르니 정원은 모네의 자화상이다. 그곳에 가고 싶다.
황은희(수오서재 대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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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에 대해 "걔는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 결혼식을 올린다든가, 혼인신고를 한다든가, 아이가 아빠 성을 따른다든가 하는 일들에 대해 친구는 '선택의 문제'라 생각했다. 친한데 나와는 다른, 그 친구의 특성을 나는 "걔는 페미니스트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나는? 그렇다. 한 번도 나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하고 선택하는 일'에 게을렀을 뿐 성인이 된 후 페미니스트가 아닌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딸아이를 낳고는 더더욱. '문제'라 생각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다행히 이 작은 책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될 수 있다고. 스웨덴에서는 청소년 성평등 교육 필독서란다. 나는 갓 엄마아빠가 된 내 친구들에게 권한다.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자고,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조금 더 자유로워진 아이들의 세상을 만들자고.
박재호(생각정원 대표)
『그의 슬픔과 기쁨』정혜윤 저, 후마니타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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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의 참사로 더욱 잔인한 달이 된 4월. 어김없이 봄도 함께 찾아왔다. 온갖 생명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도 우리는 여전히 '생존'만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슬픔과 두려움의 이유인 동시에 윤리와 공감과 연민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 정혜윤 PD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책 『그의 슬픔과 기쁨』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앞에 놓인 개인의 깊은 슬픔과 희망을 담아냈다. 이 봄, 상실감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의 손을 내밀면 어떨까. 지금 우리에게는 '함께' 살기를 원하는 타인이 필요하다.
오연조(페이퍼스토리 대표)
『다시, 봄』 장영희 저, 샘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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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리는 이 아침, 장영희의 『다시,봄』 을 다시 읽는다. 2009년 봄에 우리 곁을 떠난 장영희 선생님과 김점선 화가의 그림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봄꽃 같은 책이다. 열두 달 계절과 관련된 영미시를 소개하고 있는 이 시집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봄은 한 해의 시작이요, 아침은 하루의 시작, 새로운 시작은 희망을 말합니다"라는 마음 글을 읽으면서 청순한 푸르름의 계절 5월을 생각한다. 『다시,봄』에는 달마다 새로운 감성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들로 가득하다. 고전 명시들이지만 쉽게 읽을 수 있고, 책 읽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도 눈으로 가슴으로 읽을 수 있는 희망과 위로의 봄 편지 같아서 더 좋다. 뛰어가는 사람에게 잠깐 숨을 돌리게 하는 게 시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이 책으로 충분하다. 그리운 분!
김명숙(나무발전소 대표)
『소년이 온다』 한강 저,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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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이야기다. 광주를 다뤘으나 뭔가를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증언함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서 애도하고 응시하려 한다. 화자들의 내면에 집중한 고백체라 굉장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또 장이 바뀔 때마다 여린 꽃잎 같은 인물들의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까닭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의 고통에 물들어 어떤 처연한 감정에 다다를 수 있다. 나들이 하기 딱 좋은 이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권한다. 책장을 덮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거기에 있다. 한국은 광주 이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 훼손되어서 뼈와 근육, 염색체에 침착 되어서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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