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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이민아 “올리버 색스의 환자가 되고 싶다”

『색맹의 섬』, 『깨어남』, 『마음의 눈』을 거쳐 『온 더 무브』까지 번역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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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온 더 무브』가 출간되고 나서 독자들 사이에 언쟁도 있었어요. 동성애나 마약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배반감을 느꼈다고 하고, 오히려 더 팬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번 책은 거의 ‘색스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지난 해 8월 타계한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가 번역 출간됐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자신이 만났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들려주었던 그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색맹의 섬』, 『편두통』 등의 저서를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작가다. 그는 환자들을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우리와 조금 다른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등한 존재’로 바라봤다.

 

색스의 모든 책들은 이러한 ‘눈 맞춤’에서 시작되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그의 재능과 맞물려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뇌 과학과 정신질환의 이론들을 평이한 언어로 풀어내는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고, 병원과 연구실 안에 갇혀있던 어떤 삶에 대해 무지하거나 침묵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온 더 무브』는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약 4개월 전, 세상에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써 온 1000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진술하는 그의 목소리는 덤덤하다. 동성애자로 살아온 삶, 마약중독에 빠졌던 경험 등 ‘파격적인 최초의 고백’을 들려주면서도 시종일관 차분하다.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세상을 향한 날 선 원망은 찾아볼 수 없다. 끝내 감추고 싶었을 법한 이야기들까지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상을 사랑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 색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책은 색스의 삶과 저서들에 대한 이해와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한 때는 모터사이클에 열광했던 스피드광으로, 또 한 때는 인간 힘의 극한에 도전하는 짜릿함에 매료됐던 역도인으로 살면서 한 순간도 지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끊이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 엄청난 에너지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온 더 무브』는 알려준다. 따뜻한 시선으로 환자들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 속에 담아내는 데 바탕이 된 개인적 경험들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온 사실 자체가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다"는 고백을 남긴 채 다른 행성을 향해 떠나간 올리버 색스. 그를 대신해 『온 더 무브』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번역가 이민아였다. 그녀는 『온 더 무브』를 포함해 『색맹의 섬』, 『깨어남』, 『마음의 눈』까지 총 네 권의 색스의 저서를 번역했다. 작가와 번역가라는 독특한 인연으로 색스와 만나온 그녀는 인터뷰 내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책의 안과 밖에서 자신이 만난 색스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를 추억하는 이의 그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다정해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민아 번역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라도 색스의 책을 번역하면 그렇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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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는 색스에 대한 재발견


올리버 색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제가 색스 선생님 책을 처음 번역한 게 『색맹의 섬』이었어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 팬이 되었고요. 그 다음에는 『깨어남』을 찾아서 읽게 됐는데, 당시에는 최승자 선생님께서 발췌 번역하신 책이 있었어요. 최승자 선생님은 제가 워낙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번역을 훌륭하게 하시는 분이시죠.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책 중에 까치글방에서 출간됐던 『빈센트 반 고흐』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대학교 때 읽었어요. 저에게는 번역을 의식하게 해준 거의 첫 번째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색맹의 섬』이 저한테 오게 됐고요. 그때 올리버 색스의 신상정보를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집이 거의 식물원 같다는 소개 글이었어요. 살아서 꼭 한 번 그 식물원에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시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독자가 많이 생기면 강연을 하러 오시지 않을까, 그러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죠. 만나 뵈면 좋겠다고 상상은 했지만, 기대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올리버 색스의 타계 소식을 듣고 상실감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기가 어려운… 그런 거죠. 색스 선생님께서 80세 생신 때 인터뷰를 하신 게 있는데, 그때 실감이 났어요. ‘아, 젊은 분이 아니셨지’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출연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어린이 주기율표를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며칠 후에 <뉴욕 타임즈>에 그 주기율표가 나왔을 거예요. 마치 준비된 죽음처럼, 모든 게 서서히 진행이 됐었죠. 그리고 색스 선생님과 아주 가까웠던 분들의 말씀으로는, 마지막 순간에 고통 없이 아주 편안하게 가셨대요. 이틀 전까지 글을 쓰셨고요.

 

독자로서 『온 더 무브』를 처음 읽으셨을 때는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재미있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고요. 선생님께서 쓰신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니까, 번역할 때의 느낌도 기억이 났어요. 『온 더 무브』를 번역하는 데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어요. 책의 분량도 있고, 부고 소식이 워낙 크게 회자돼서 ‘빨리 독자들에게 책을 읽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신 없이 번역을 했었죠. 번역가가 아닌 독자라면 편하게 읽을 수 있잖아요. 충분히 즐기면서 여러 가지 생각도 해보면서. 특히 선생님의 책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니까요. 많은 책을 읽어보게 만들고요. 색스 선생님의 독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번역을 하게 되면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어요. 책이 출간된 후에도 또 다음 작업이 진행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채널예스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예전의 책이나 자료들을 찾아보게 됐어요. 그 동안은 추모할 시간 없이 번역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제야 나름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책은 자서전인 만큼 번역하시면서 색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신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굉장히 많았죠. 수영을 좋아하신다는 건 이따금씩 말씀하셔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중증 이상이라는 걸 이번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요(웃음). 역도광이셨다는 것도 알게 됐죠. 특히 동성애와 관련된 부분은 처음 밝히신 거라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요. 글을 읽어보면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가장 강조하지 않고 고백을 하시거든요. ‘이 문제가 너무 힘드셨겠구나’ 싶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영국의 고급 지식인들이 살아갈 길이 별로 없었던 정체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의 분위기도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글을 많이 쓰셨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웃음). 일기 천 권, 임상진료기록 천 권을 쓰셨다고 하는데, 지인들과 주고받으신 편지도 책으로 엮으면 천 권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말씀하신 것처럼 색스는 『온 더 무브』를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최초로 고백했습니다. 출간 후에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을 텐데, 어땠나요?

 

처음에 책이 나오고 나서 영어권 독자들 사이에 언쟁도 있었어요. 동성애나 마약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배반감을 느꼈다고 하고, 오히려 더 팬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번 책은 거의 ‘색스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독자들뿐만 아니라 과학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충격을 받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작년에 동성 결혼 합법화가 이루어지면서 동성애에 대해 조금 더 관용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조금 더 편하게 고백하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평생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셨더라고요.

 

분명 쉬운 고백은 아니었겠죠.

 

『온 더 무브』에 ‘렌 웨슐러’로 등장하는 선생님의 친구 분이 계신데, 이분이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예요. 원래는 선생님의 전기를 쓰기로 하셨는데 마지막까지 선생님께서 머뭇거리신 부분이 있었다고 해요. 커밍아웃에 대한 거였죠.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 없이 전기를 쓸 수 있을까’ 고민을 하시다가 접으시고 『온 더 무브』를 쓰신 거죠. 그 친구 분도 회고록을 쓰실 계획이라고 해요. 두 분이 함께 쌓으신 추억과 자료를 모아서 조만간 책으로 내신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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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는 모순된 인물

 

『온 더 무브』를 통해 알게 되신 색스의 또 다른 면모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굉장히 모순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색스 선생님은 엄청난 이야기꾼이잖아요. 그런데 글을 잘 쓰면 말은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TED 강연이나 팟캐스트에서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이야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하세요. 그런데 말을 더듬으세요. 그런 모순이 있죠. 또 엄청난 관찰력을 가진 분이신데 얼굴맹이고요. 심지어 길치이기도 해요.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계신 분이에요. 환자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접하는 모든 것들에 애착을 가지셨는데 본인은 35년 동안 외롭게 살기도 하셨고요. 두 번의 사랑을 거절당하고 외롭게 사시다가 마지막에 너무 좋은 연인을 만나서 떠나실 때는 행복하게 가셨죠. ‘선생님께서 그런 모순들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면, 독자들에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전과 달라진 생각은 없었나요?

 

저는 굉장히 외로우실 줄 알았거든요. 책에서 항상 혼자 사신다고 하고, 실제로도 혼자 사셨을 테고, 환자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기는 하셨지만 개인으로서는 외로우실 것 같았어요. 그런데 『온 더 무브』를 보고 ‘그렇게 외롭지는 않으셨겠구나, 항상 충만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저는 선생님이 날 때부터 인간과 생명을 사랑하게 태어난 분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선생님이 톰 건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작가가 될 수 있을지, 글을 써도 될지’ 물어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처음에는 톰 건이 많은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대요. 젊은 날에는 지적인 오만함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깨어남』의 원고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던 한계가 완전한 방식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극복이 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온 더 무브』에는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형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색스가 환자들을 치료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던 건, 이런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말씀을 들으니까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형에 대해서는 『엉클 텅스텐』에서 조금 언급됐을 거예요. 그런데 저도 그렇게까지 집안의 골칫거리이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행동했는지는 몰랐어요. 선생님도 형의 일이 자신이 의사로 생활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는 말씀을 어디에선가 하셨던 것 같은데요. 죄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온 더 무브』에서도 형이 필요로 할 때 자신은 도망쳤다고 적으셨잖아요. 나중에 가서 후회하고요.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아주 엄정한 관찰자의 태도가 환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데 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건 내 눈으로 본다는 거잖아요.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건 환자 주관의 입장에서 보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엄정한 관찰을 하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는 훈련이 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실제 환자들은 색스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마음의 눈』에서 크게 다뤘던 사례 중에 ‘수 배리’라는 환자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 분이 선생님을 추모하는 방송에 초대돼서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는데요. 자신이 피험자로서 많은 사람들과 의사들을 만났는데, 스스로가 진료 대상이나 연구 대상으로 느껴지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는 거예요. 색스 선생님은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볼까’를 이해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는 거죠. 대상화하고는 전혀 다른 관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의사로서 가장 특별한 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와 관련해서 『온 더 무브』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화가 있으세요?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산길을 누비고 싶다는 할머니 환자의 소원을 들어준 이야기이고요. 또 하나는 23병동의 자폐소년을 데리고 나가서 식물원을 구경시켜준 이야기였어요. 두 경우 다 병원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해고를 무릅써야 했죠. 23병동에선 아주 치욕적으로 쫓겨나셨고요. 이런 사례들은 선생님이 환자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환자가 행복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 또한 치료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셨던 거죠. 그러니까 환자를 어떤 결함이나 문제를 지닌 치료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셨고, 환자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셨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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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색스의 환자가 되고 싶다

 

색스가 보여주었던 휴머니즘은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삶에도 명과 암이 있었지만 외면하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싸 안잖아요.

 

그렇죠.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했고, 하려고 하는 일들은 자꾸만 실수로 어긋나고,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온갖 병을 앓으셨잖아요. 편두통이라는 고질적인 질환, 여러 가지 맹, 나중에는 암으로 입체시각을 잃기도 하셨어요. 시력을 거의 상실하셨고요. 본인 스스로 결함이 많았기 때문에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본인의 아픔과 같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부터 동료 의사들의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죠.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깨어남』이 나올 때까지도 의사로서는 이렇다 할 커리어가 없으셨죠. 어떻게 보면 이단아 취급을 받으셨으니까요. 의사로서 임상윤리라는 게 있잖아요. 환자들의 이야기를 밝히면 안 된다는 비밀주의요. 게다가 진료 방식 자체가 옛날 방식이었던 거죠. 그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을 받으셨고, 의사로서 발붙이기도 어려우셨어요. 그리고 원래는 과학자가 되려고 했는데 반복해서 실수도 하고 사고를 일으키니까 ‘자네는 환자들을 만나게’라는 권유를 받아서, 그때 굉장히 좌절감이 컸다고 하시더라고요. 본인은 글 쓰는 의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의사보다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으셨다고 하거든요. 덕분에 저희는 좋은 이야기꾼 의사를 만나게 됐고,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은 뇌와 신경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됐죠.

 

당시의 심경이 기존의 저서에서도 드러나나요?

 

『깨어남』을 보면 인정받지 못하는 의사로서의 설움이 굉장히 강하셨어요. 왜 내가 이단이 아닌지를 서문에 굉장히 절절하게 적으셨죠. 개정판이 대여섯 번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서문의 분량이 늘어날 정도예요(웃음). 그 내용들 중 대부분이 ‘환자들을 대할 때 문제 부위에 대한 국소적인 접근이 아닌 맥락으로 접근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람의 살아온 내력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질환을 이해하고 답을 찾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거예요. 독자들이나 젊은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접근법에 열광하죠. 그렇지만 의사들은 그때도 ‘이상한 침묵’을 지켰고, 그 뒤로도 열띤 반응은 별로 못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이후에 나온 새로운 신경 과학이나 뇌 과학 책들은 색스의 전통을 이야기해요. 환자의 역사를 추적해가면서 그것을 현재의 증상 또는 질환과 연결시키는 글이 하나의 큰 맥으로 자리 잡은 거죠. 적어도 과학 저술에 있어서 만큼은 그런 것 같아요. 선생님이 그 길을 개척한 거죠.

 

앞서 ‘임상윤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환자들과의 이야기를 책에 담는다는 이유로 색스를 향한 비난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환자들의 가족들에게 항의를 받으실 때가 있었대요. 어떻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책에 쓸 수 있느냐는 거죠. 그렇지만 환자 본인은 누군가 그 이야기를 해주기를 굉장히 바랐다고 해요. 선생님은 책에서 환자들 이야기를 할 때 되도록 가명을 쓰고, 최대한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고 말씀하셨고요. 80세 생신 특집 방송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그때 진행자가 ‘만약 당신 또는 가족이 환자라면, 환자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의사에게 맡기고 싶을 것 같으냐’라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한 가지 경험을 들려주셨어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시다가 간질 발작이 일어난 여성을 보게 되셨는데, 뇌 안에서 출혈이 일어나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았다는 거죠. 그래서 바로 기장을 찾아서 상황을 설명하셨대요. 환자가 위험한 상태니까 빠른 시간 내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요. 결국 비행기는 비상착륙을 했고, 환자는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선생님은 자신이 의사로서 그렇게 못 믿을 사람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만약 번역가님께 같은 질문을 드리면 어떻게 답하실까요? 의사와의 상담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스와 같은 의사를 찾아가시겠어요?

 

저는 번역하면서 ‘나에게는 왜 이런 질환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죠. 제가 환자가 돼서 책에 기술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요.  아마 선생님이라면 책에서 다른 이름으로 써주시지 않았을까 싶고요. 환자이기 때문에 느끼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을, 저보다도 더 적확하게 짚어서 알아주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기꺼이 선생님의 환자가 되고 싶었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믿음이 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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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번역가는 애증의 관계죠

 

작가와 번역가는 어떤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일까요?

 

일할 때는 애증의 관계죠(웃음). 때로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요. 책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출판사에 먼저 제의해서 번역을 한 적도 있고,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번역한 책도 있는데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이라서 출판사에 먼저 번역을 의뢰한 책도 막상 번역을 시작하면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싶을 때도 있어요(웃음). ‘부지런한 독자들이 원서를 읽도록 할 걸, 내가 죄를 짓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는 거죠. 색스 선생님의 책은 저한테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어요. 확실하게 (전문)분야가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어려운 이론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시려고 노력을 많이 하신 덕분에 다른 뇌 과학 책들보다 쉽기는 하지만, 물리학 같은 이론적인 부분이 어려워요. 그렇지만 색스 선생님의 책은 번역을 하면서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유일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책은 아껴서 읽게 되잖아요. 그런 마음이죠. 한편으로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빨리 읽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그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거의 유일한 책이 색스 선생님의 책인 것 같아요. 선생님의 책을 번역을 하면서, 제가 이 책을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게 항상 감사했어요. 그리고 누구보다 꼼꼼하게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번역을 하시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번역이 끝났을 때인가요?

 

번역을 끝마쳤을 때는 느낌이 없어요. 무감각한 상태가 돼요. 순간 정적 같은 게 찾아오고요. 기쁠 때는 누군가 이 책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괜찮았다고 말해줄 때죠. 그 전까지는 내가 제대로 한 건지 아무런 확신을 할 수가 없거든요.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가 첫 독자이시고 제가 번역한 책을 열심히 읽어주시는데요. ‘이번에 번역 좋더라’라거나 ‘그 책이 번역한 책인지 몰랐다’라고 말씀해주실 때 너무 기쁘죠. 물론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러신 거겠지만요(웃음). 특히 색스 선생님의 책만큼은 항상 어머니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어머니는 책을 거의 읽지 않으시고 제가 번역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 반응이 없으셨거든요(웃음). 그런 분이 『색맹의 섬』을 완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의사 이름이 뭐더라, 감동적이더라’라고 하셨을 때 정말 놀랐어요.

 

『온 더 무브』에 대한 반응은 어떠셨나요?

 

어머니께 책을 드렸더니 한동안 방에서 계시다가 나오셔서 ‘그 의사 돌아간 줄 몰랐구나, 아까워서 어쩌니’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어요. 며칠 후에는 ‘이번 책은 이상하다, 자꾸만 마음에 떠올라’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예전에는 색스 선생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시더니 이제는 ‘올리버 색스 참 특이한 사람이야, 자꾸 생각나’라고 말씀하세요.

 

번역가로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라면, 내가 확신했던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때죠. 그리고 조금 더 속물적인 상황에서는, 제가 너무 아끼는 책이었는데 독자들이 찾아주지 않을 때고요(웃음). 『색맹의 섬』 같은 경우가 그랬어요. 예전에 예스24에서 책이 출간되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관련 글을 써주셔서 굉장히 행복했었어요(웃음). 색스 선생님도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색맹의 섬』이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으세요?

 

책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책은 작가의 본래 호흡이 있는데, 그 호흡을 우리말로 맞춰주는 게 가장 어렵기도 하죠. 또 어떤 책은 용어, 개념을 정확하게 해야 돼요. 책에 따라서 집중해야 될 부분이 조금씩 다른 거죠. 정확한 용어를 써야 하는데 학계에서 통일된 용어가 없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단어가 가장 무난할지 묻기도 해요. 그러다가 다른 생각을 가진 독자 분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번역을 해야 하는 것과 읽기 좋게 번역을 해야 되는 것 사이에서 판단을 해야 하죠. 아마 색스 선생님의 책은 정확하면서도 읽기 좋아야 하는 책인 것 같아요(웃음). 특유의 호흡도 있고요.

 

올리버 색스의 저서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깨어남』이 될 것 같아요. 『깨어남』『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쓸 수 있게 기본 작업이 된 책이기도 해요. 『편두통』은 조금 더 임상기록에 가깝고요. 선생님의 책을 평가하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 『깨어남』을 가장 선구적인 작업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아마 읽기가 쉽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런데 책의 앞부분에 있는 주류에게 외면당했던 설움을 조금 이해하면, 왜 그런 말씀을 계속 하셨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워낙 많은 분들이 아시니까 가장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일 거고요. 『뮤지코필리아』에서 이야기하는 음악환각도 드물지만은 않은 신경 증상이라고 해요. 그 책도 굉장히 좋고요. 색스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는 『온 더 무브』에는 많이 나오지 않고 『엉클 텅스텐』에 많이 나와요. 사실 버릴 책이 없어요. 『환각』은 『환각』대로, 『마음의 눈』『마음의 눈』대로 좋죠(웃음). 어떤 책을 버리겠어요. 책마다 색깔이 있잖아요. 올리버 색스의 전작을 찾아서 읽는 독자 분들은 ‘이번 책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하고 생각했는데 ‘이번 책도 재미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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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저/이민아 역
“나는 모든 신경학이, 세상 모든 것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성이자 의학계의 큰 별 올리버 색스. 그가 타계 직전 남긴 자서전 《온 더 무브》는 올리버 색스가 추구한 끝없는 모험, 중단 없이 나아가는 삶의 뜨겁고 생생한 기록이다. 모터사이클과 속도에 집착했던 젊은 날로 시작하는 이 회고록은 휴식을 모르는 에너지와 열정으로 넘쳐난다.


 

[추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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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뮈소 “내가 가장 집착하는 소재는 ‘시간’”
- 윤이형 “내 소설은 건강을 바라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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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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