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우는 시간
휘발되는 연기는 무엇인가
담배는 이중의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담배의 매혹은 일차적으로 담배피우는 사람과 담배 사이에 직관적으로 형성되는 감각의 동형성에서 발생한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허무’와 닿기
나는 어느 작가의 파이프
아비시니아나 까프러리 여인 같은 새까만 내 얼굴을 보면 알거야
우리 주인이 대단한 골초임을.
주인이 괴로움에 젖어 있을 때
나는 마구 연기를 뿜어 내지오
들에서 돌아오는 농부를 기다리는
시골집 아궁이 같지요.
불타는 내 입에서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파아란 그물 안에
그의 넋을 얽어 흔들지요.
- 샤를 삐에르 보들레르, <파이프>
현대시의 세계를 연 보들레르는 대단한 담배 예찬가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는 그 시간, 은밀하고 에로틱한 ‘여자의 시간’이 열린다는 것도, 한없이 너그럽고 친근하게 우리를 위로해 주는 ‘친구의 시간’이 열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시에서 새까맣게 탄 골초의 담배파이프는 여인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으며, 시골집 아궁이에도 비유된다. 담배는 작가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여인인 동시에 괴로움에 젖은 농부를 다독이는 친구다. 성(性)과 우정의 감각을 동시에 여는 시간, 이게 바로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다. 관념으로 세계를 만나는 작가에게나, 몸으로 물리적 세계와 직접 부딪히는 농부에게나, 담배의 시간은 공히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매혹의 실체는 따지고 들어가면 실은 간단치가 않다. 담배는 이중의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담배의 매혹은 일차적으로 담배피우는 사람과 담배 사이에 직관적으로 형성되는 감각의 동형성에서 발생한다. 담배를 물고 빠는 “불타는 내 입”은 그 자체로 은밀한 성적 쾌락과 닿아 있으며, 성적 판타지를 암시하고 일순간이나마 그것을 충족시킨다. 프로이트적 직관을 응용하면 이 판타지와 만족의 메커니즘은 어쩌면 ‘물고’ ‘빠는’ 입을 통해 유아기의 구순기(口脣期)로의 회귀를 반복하는 것과 연결될지도 모른다. 한편 괴로움에 젖은 이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그의 ‘깊은 한숨’을 시각화한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은 담배 피우는 이의 육체와 심리를 일체화하는 행위의 시간을 만들어 낸다. 성도 한숨도 숨겨진 것이며, 억압된 것이다. 담뱃불과 담배연기는 그런 점에서 ‘억압된 것의 회귀’다. 담배를 피울 때 아주 잠시나마 “그의 넋을 얽어 흔”드는 경험은 그래서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안에 억압되었던 것의 시각적 표출을 제 눈으로 경험하는 효과를 얻으며, 이 확인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뱃불과 담배연기는 아이러니, 정확히 말해 변증법에 노출되어 있다. 담배는 우리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것은 공간적인 물건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는 행위’, ‘담배를 피우는 시간’을 통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동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체험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괴상한 방식으로 휘발된다. 담배연기는 우리 안에 흡수되었다가 밖으로 뿜어진다. 담배연기는 한순간 우리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은 불완전한 방식으로밖에 가능하지 않은 만족과 소유에 대한 기이한 감각이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 우리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담배연기처럼 우리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며, 손아귀를 벗어나는 만족감의 환영, 일종에 어떤 ‘허무’와 조우한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은 이 허무와 일상적으로 조우하는 시간이며, 허무 자체가 주는 덧없는 쾌락에 ‘중독’되는 시간이다. 담배에 있어 ‘중독’의 진정한 의미는 니코틴과 같은 요소와 관계된다기보다는 실체화되지 않고 휘발되는 이 허무와 관계된다.
작가들의 연기, 신의 입김
담배연기가 늘 ‘허무’만으로 체험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작가들에게 담배는 특이하며 유용한 시간 체험을 선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사진 중 상당수에서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있거나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도 아마 그와 연관이 있으리라. 시인 최승자의 사진과 작가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서 우리는 담배를 그들의 손가락과 입에서 따로 떼어놓은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 전에 작고한 한국의 거물 시인 김수영은 작가와 담배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암시를 주는 산문을 남겼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산문은 담배 피우는 시간이 곧 작가의 시간이요, 시의 시간이라고 얘기한다.
<반시론(反詩論)>에서 그는 “참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은 다른 입김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입김/ 신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릴케,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이라는 릴케의 시구를 언급한다. 김수영은 릴케를 통해 시가 세상의 얄팍한 유용함이 가닿지 못하는 무망(無望)하고 참된 신의 입김이라는 생각에 접근한다. 그리고 헤르더의 “인간이 일찍이 지상에서 생각하고 바라고 행한 인간적인 일, 또한 앞으로 행하게 될 인간적인 일,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줄기의 나풀대는 산들바람”에 달려 있다는 말을 다시 인용한다. 이 산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김수영이 릴케의 ‘신의 입김’ 헤르더의 ‘한 줄기의 나풀대는 산들바람’에서 ‘담배연기’를 연상하는 대목이다. 이 산문에서 이 연상의 과정은 김수영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인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물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많은 작가들은 글을 쓰며 담배를 피운다. 김수영도 골초였다. 늘 줄담배를 피며 시 쓰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시가 나오는 입(김)과 담배연기가 나오는 입(김)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얘기는 단순한 농담은 아니다. 그것은 시 쓰는 시간과 담배 피우는 시간 사이에 놓인 어떤 상동성을 암시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지금 세계(현실)’의 익숙한 육체감각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에 이르는 과정이다. 신의 입김을 내뿜기 위해서는 ‘여기 인간’의 타성적 삶을 수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겪었던 경험의 궁극적인 바닥으로 내려감으로써 지나간 시간의 카타콤을 ‘다시’ 체험하고 회복하는 행위이며, “앞으로 행하게 될 인간적인 일”, 즉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당겨 사는 예감의 실천이기도 하다. 시가 ‘다시’ ‘미리’ 당기는 이 시간들은 쉽게 체험되지 않는다. 인간됨의 비참과 영광이 깃든 이 시간 체험을 위해 시인은 일상의 시간과 감각을 탈각해야 하며, 이를 위해 극도로 메마른 감각의 골짜기를 넘어가는 시간을 겪어야 한다. 많은 시인들에게, 작가들에게 담배는 이 고독하고 메마른 길에 유일한 동행자가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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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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