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

『단속사회』 출간한 문화학자 모든 사람과 연애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존재감’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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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이자 문화학자, 출판계에서 ‘파워라이터’로 통하는 엄기호가 신작 『단속사회』를 펴냈다. 단속된 사회라니! 제목부터 아이러니한 이 책은 ‘편’을 강요하고 ‘곁’을 밀치는 대한민국 사회를 이야기한 책이다. ‘불통’ 때문에 마음이 힘든 독자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과잉접속과 관계단절’. 쉴 새 없이 접속하지만 끊임없이 차단하는 아이러니는 한국사회, 한국사람들을 표현하는 키워드가 됐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반대 편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회. 말할 입도 들을 귀도 없다. 오죽하면 “질문하면 죽는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튀지 않는 것이 나를 보존하는 원리이자, 남을 배려하는 방식”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나부터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는지를.

 

엄기호가 ‘단속사회’로 책 제목을 지은 건, 사회의 역설 혹은 아이러니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한국사회가 ‘사회가 아닌 상태의 사회’라는 역설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개입하지 않는 사회. 철저하게 자기를 ‘단속(斷續)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두고, 엄기호는 ‘단속’이라 명명했다. 엄기호는 “곁에서 쓴, 곁이 있는 글”을 추구한다. “곁에서 말을 걸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곁을 만들어가는 것”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현재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는 엄기호는 초등학교 때, 부패한 교사를 만나 학교와 교육 문제에 일찍이 눈떴다. 인권연구소 창에서 연구활동가로,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그간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등을 펴냈다. 『단속사회』에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 걸기’다.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을 아는 ‘감각’을 키우자는 뜻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우자는 말, 또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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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돕는 질문이 될 수 있다


현대인의 관계를 맺는 현상을 ‘단속’으로 표현했다. 차단하고(斷) 접속한다(續)는 반대 개념의 결합이다. 


지난해 박사논문을 「‘단절-단속’ 개념을 통해 본 ‘교육적’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단속사회』는 논문에서 말한 개념을 한국 사회의 여러 사례에 빗대어 쓴 책이다. ‘단속’이라는 개념을 따로 빼서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한 것이다. ‘단속’은 오래 전부터 생각한 개념이었다. 교육공동체 ‘벗’ 활동을 하고 있는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연속’이다. 성장을 하려면 삶에서 경험을 풀어내야 하는데, 한국사회는 연속성이 끊어졌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단속하고 그러는 사이에 연속성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사회’라는 단어를 붙이기 싫었다. ‘단속된 상태’를 사회라고 할 수 있냐는 문제가 있었다. 이건 삶의 형태이지, 사회의 특성은 아니니까 ‘단속사회’는 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고민이 돼서, 복지국가를 공부하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사회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 사회 아닌 사회를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있는 말이 ‘사회’라면서. 묘하게 설득력이 있더라. 

 

책 속에 구체적인 사례가 많다. ‘곁’을 중시해서 일까. 책을 쓰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다.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구체적인 게 정말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건,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인 거다. 방법론적으로는 연속성이 깨진 사례를 먼저 찾는 게 우선이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편성을 발견하고 여기에 해당하는 개념을 찾는 편이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학교 밖에서도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인터뷰를 통해서 대놓고 듣는 이야기도 있고, 지나가면서 듣는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 편이다.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라고 묻는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나도 그렇다”가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는 말이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런 건”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이야기다. 보편적인 건 “몰랐던 건데, 나도 그렇구나”라고 깨닫는 것이다. 


저자도 ‘불통’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단속사회』를 썼을 텐데. 소통의 부재를 느낄 때는 주로 언제인가?


하나를 말하자면 사람들이 오히려 소통한다고 생각할 때 불통을 느낀다. 누군가 내게 질문할 때, ‘대화가 안 되는구나’를 느낀다. 질문할 때는 내 경험을 집어넣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질문 자체를 통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안은 있나? 한국사회는 바뀔까?” 이렇게 질문하면 답변할 수 없다. 삶은 “이것이냐,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자본주의냐? 민주주의냐? 이런 특정한 지점에서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통째로, 속된 말로 퉁 치는 질문을 하면 토론은 불가능하다. 학교나 정치 모두 질문을 통으로 하니, 할 말이 없는 거다. 

 

상투적인 질문을 하는 건, 비겁해서 일까? 애당초 원하는 답이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일까?

 

자기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 같다. 대안이 뭐냐? 대안이 없으니까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다. “물어봤는데, 네가 말한 건 대안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난 안 움직인다”, 이렇게 되는 거다. 많은 질문들이 해답을 찾기 위한 게 아니라,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질문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까 답변하는 사람은 질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가 싫어지는 거다. 

 

그래도 소통을 하려면, 질문이 필요하다. 그냥 듣고만 있는 것보다는 질문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본다. 문제는 질문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는 거다. 누구든지 튀면 삿대질을 한다. “질문하는 자에게는 폭력이 행사된다”는 말까지 나오고.

 

학교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꼭 수업이 끝난 후에 질문을 한다. 왜 수업시간이 끝난 다음에 질문을 하냐고 물으면, 질문이 쪽 팔려서 그렇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아이들에게 민폐를 끼칠 까봐 그런다. 나만 관심 있는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두 가지 답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예의 바름에 대한 강박관념, 절대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타인에게 나를 약자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하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일대일, 사적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 거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네 질문이 쪽 팔린 질문이면, 다른 아이들은 그 질문을 대신 해주는 네가 얼마나 고맙겠냐”고. “사적인 질문을 넘어,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하라”고 말한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질문을 하는 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누구를 도와줄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쪽 팔린 질문도 할 수 있는 분위기,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물론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회적 존재감이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사회라는 건, 서로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서로를 쓸모 있게 하는 관계망이 사회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쓸모 있게 생각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되고, 잘못하면 오지랖 넓다는 소리만 듣는 분위기가 됐다. 내 질문이 공통의 질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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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해지길 강요하면, 성장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말의 불신’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말에 가치가 있고, 힘이 있다는 생각이 점점 들지 않는다. 말은 힘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을 들음으로써 다시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다른 가능성을 쳐다보게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는 말은 힘이 없다. 말에 완전히 지쳐버려서 말에 냉소하게 됐다. 

 

현대인은 오프라인 사회에서는 끊임 없이 단속하면서, 온라인에는 쉴 새 없이 접속하고 있다. 옆집 사람들하고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서, SNS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매일 같이 안부를 전한다. 온라인 세계에서의 관계 맺기, 가끔은 굉장히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나는 페이스북, 트위터를 모두 하고 있지만, 좀 폐쇄적이다. 페이스북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어떤 활동, 공간에서 만난 얼굴을 아는 사람이다. 트위터는 공개되어 있지만, 팔로잉을 하지 않는다.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트위터를 보면 타임라인이 계속 올라가는데, 그게 연속성인 것 같지만 모두 파편화 되어 있다. 누가 내게 질문을 하면,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상대의 트위터를 방문해 최소한 3일치, 길게는 1주일치 글을 쭉 읽어 본다. 그 사람이 주로 어떤 걸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지, 맥락이 잡히면 대답을 한다. 물론 질문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면 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시간관념으로 보면 실시간이라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시간으로 반응을 해줘야 열광하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실시간에 의존하고 있다. 실시간이 현재적 시간인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늘 실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 아닌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에 있기 때문에 실시간은 무중력의 상태, 파편화된 시간이다. 사람들은 어제까지 실시간 뉴스에 흥분하면서, 하루가 지나면 금세 잊는다. 흥분을 지속해서 가지고 가려면 실시간이 아닌 시간에서 살아야 한다. 팔로잉 하는 것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지만, 너무 인스턴트한 답변을 하게 되는 건 문제다. 질문하면 바로 답변하는 것보다, 오래 걸리더라도 정성을 다해 답변하는 게 중요하다. 시간의 길이가 있을 때, 정성을 만들 수 있다. 관심 자체도 그렇고. 

 

‘기획된 친밀성’이라는 지적에도 동감했다. 친밀성이 의사소통의 전제가 아니라 ‘관리와 기획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에 퍽 동의한다. 가족관계, 사회생활에서 맺게 되는 관계 또한 다르지 않다. 나와 조금만 다르면 선을 긋고, 서로의 필요에 의한 친밀성이 느껴질 때 무척 씁쓸하다.

 

사람이 성장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상처를 겪어야 한다. 상처를 받는 게, 되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연애를 할 때, 우리는 그냥 좋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를 알지 못한다. 실연을 경험한 후에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벗어나서 바깥에 있을 때만 그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연도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실연이 끝난 후다. 실연 자체가 애도인데,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도를 하는 기간이 끝나면 사람은 성장한다. 애도가 없어도 사람은 성장하지 못하고, 애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해도 성장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우울증’이라고 이야기 한다. 두 가지가 모두 문제다. 쿨하다는 건, 어찌 보면 애도기간이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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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자꾸만 사람들에게 쿨 해지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감정적이고 쿨하지 못하면 굉장히 미성숙한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우리 문화가 만든 모습이다. 자꾸만 쿨 해지라고 말하는 건, 뒤바꿔보면 성장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강요할수록, 사람들은 모두 애도 상태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우울증, 우울감이 엄청 많이 팽배해졌다. 사람들이 산다는 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것이다. 상처를 주지 않는 관계라는 건 없다.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 건, ‘감당할 상처인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인가’ 하는 문제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해, 관계 맺기 자체를 꺼린다. 그래서 친밀성 자체도 기획되는 거다. 아주 매끄럽게 만들어간다. 친밀성도 통제 아래 두려고 한다. 

 

상처를 주고 받을 바에는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살아갈 이유도 없다. 모든 걸 기획하고 계획한다고 뜻대로 되는 게 인생이 아닌데. 

 

사람의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다. 우연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게 불가능하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강의를 갈 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애들한테 책 좀 추천하지 말라고. 책은 아이들이 알아서 보는 거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안 좋은 책을 보면 어떡하냐?”고 묻는데, 그게 우연인 거다. 나도 어릴 때 『왕비열전』 같은 책도 읽고 그랬다. 이게 우연이다. 요즘 부모들은 너무 기획한대로 아이들을 키우려는 성향이 짙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책을 추천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인가? 

 

“이 책, 어때?” 이렇게 권하는 건 상관없는데, “이 책 읽고, 그 다음엔 저 책 읽고” 이런 식으로 스케줄을 만드는 건 반대다. 내가 제일 비판하는 건, 어린이가 어린이책만 읽는 거다. 가장 좋은 서재는 아이가 읽는 책과 부모가 읽는 책, 조부가 읽는 책이 함께 있는 서재다. 그래야 아이들이 물어본다. “엄마는 뭐 읽어?”라고. 요즘 부모들은 아이한테 좋은 책을 읽혀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이들 책만 읽는다. 좋은 책인가를 확인하려고. 이러니까,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어른이 아이가 되고 있다.

 

초중고, 대학까지 교육 현장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연구하고 있다. 학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다.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민이 가장 많다. 아이가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좋은 부모가 되려고 하지 말고 현명한 부모가 되라”는 말이다. 좋은 부모는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아이들도 말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현명한 부모는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안 해야 한다.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하는 게 현명한 부모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게 맞는가? 때를 봐야 하고, 아이가 원하는 형식, 아이에게 맞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느 때, 어느 형식으로 아이에게 말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할까”만 고민하니까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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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드는 사회, 들을 귀를 만들자

 

 

한국사회에서 재밌는 현상이 하나 있다. 질문하라고 하면 안 하고, 순번대로 이야기할 시간을 주면 다들 자기 이야기하기 바쁘다. 그런데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 주제에 벗어난 이야기도 많아, 사람들이 경청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말할 입도, 들을 귀도 없다. 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으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리게끔 이야기를 해야 한다.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건, 내 경험을 바깥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남하고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문제다. 듣고 있는 사람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연관 시켜야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는데,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니까 앞에 있는 사람들이 밀쳐내는 거다. 또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와 연관 시켜서 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듣지를 않는다. 그러니 혼자 떠드는 거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혼자 떠는 사회’로 제목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마냥 징징대는 사람들도 있다. 조언을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조언을 해주면, 픽 돌아서버린다. 그냥 토닥토닥 위로만 해주기를 바란 게 진심이었던 거다. 

 

맞장구만 쳐야 하는 시대가 된 거다. 맞장구,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왜 또 그런가를 생각해보면, 일종의 분리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맞장구만 쳐줄 수 있는 관계는 연애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한데, 요즘 사람들은 친구랑도 연애를 하려고 한다. 친구, 동료, 선후배라고 이름을 달리 붙인다는 건, 그 관계에 걸맞은 의사소통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연애를 제대로 못해 봐서 그런 건지, 연애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그런지, 모든 사람이랑 연애를 하려고 한다. 아무나 하고 연애를 하려고 하니까, 말만하면 상처를 받고 그런다. 이런 상황의 기저에는 가족으로부터 온 경험도 무시하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징징대고, 다른 쪽에서는 묵묵부답이고. 이러면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지는 게 아닌가.

 

왜 징징거리는데 아무도 안 듣나? 고통을 듣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거니까 징징거리는 건데, 어느 정도 언어가 있으면 애도 기간이 끝난 후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그러니까 계속 징징대고, 다른 쪽에서는 징징대는 것으로만 듣고. 고통에 대한 무지가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경청’에 대한 이야기도 다시 해보자. 말할 입도 중요한데, 들을 귀가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는 무관심이 미덕이 됐다. 그러니 들을 여유가 없다. 아니,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우리는 말하지 못하는 걸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말하는 걸 듣는 건 ‘수비’만 하는 거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게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면 소리를 지른다던가 침묵한다. 고통은 소리, 침묵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지 말로 전달될 수 없는 거다. 우리 한국사회가 끔찍한 이유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고통을 국가의 언어, 상대방의 언어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내 말도 아닌, 국가가 원하는 형식으로 증명해야 한다.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건데, 자기 말로도 할 수 없는 걸 국가의 공식화된 언어로 증명하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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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때서야 ‘왜 말하지 않았어?’라고 한다. 말했는데 듣지 않았으면서.


“고통을 당한 사람이 말해라, 그러면 들어준다”는 논리 아래 국가 시스템이 세워져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거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 고통에 의해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해당 사건에 대해 공동으로 의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자살하면, 학교는 2박 3일을 멈춰야 한다. 공부를 하면 안 된다. 왜 우리 학교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학년마다 반마다 토론을 하고, 교장부터 전교생 아이들이 죽은 아이의 책상 위에 꽃을 한 송이 올려놓아야 한다. 저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아이가 죽으면 동요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방송을 한다. 아이들을 쌍놈을 만들고 있는 거다. 고3들은 어떤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장례식장에 못 있게 한다. 입관할 때나 오라고 하고. 이게 말이 되는 사회인가?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부터 시작해 국가 복지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이게 우선이다.

 

고통을 들어주는 곳이 없으니, ‘힐링’ 바람이 분 걸까.

 

아무도 내 이야기를 안 들어주니까, 돈을 주고 곁을 사는 거다. 정신분석 상담을 받던지, TV에 나가든지, 대중 강연회를 찾으러 간다. 거기서 막 자기 이야기를 하고. 거긴 어차피 한 직업인이 들어주는 거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돈 내고 야단 맞는다”는 말이 나온다. ‘곁’이 시장화되고 있다. 오히려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이야기하기가 거추장스러워졌다. 돈을 주고 하면 되니까, 상황이 더 악화됐다. 내 옆 사람과 언어화하는 게 아니니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말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소리만 내고 있다. 시장은 그 말을 번역해 주고 있고, 남의 고통은 내가 들을 이유가 없어지고. 이렇게 되면 사회가 없어지는 거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사회라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경험이 많아야 하고 체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들릴 만한 이야기로 후손에게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말하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때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현명함의 핵심이다. 우리는 너무 형식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만 이야기를 하니까, 어른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나도 누나들과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저렇게 늙지 말자”라는 거다. ‘저렇게 늙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가 공포다. 사람들은 늙는다는 걸 무시하지만, 자기가 늙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경계심이 없으니 철없이 늙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 되게 슬퍼하면서. 

 

다음 저서로 한국 극우를 분석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부제를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박근혜를 좋아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 극우들이 왜 극우가 되었는지에 대해, 논리를 밝히는 책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의 어떤 경험들이 이 분들을 극우로 만들었는지를 살펴볼 계획이다. 한국전쟁, IMF와 같은 경험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장치, 어떤 경험에 의해 극우가 되었는지를 연구해볼 예정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논리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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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엄기호 저/ 창비
이 책은 기존의 인문사회과학이 관계 단절을 하나의 문제적 현상으로만 여겨왔던 관성에 도전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의 양상, 즉 우리가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산층, 시민사회 등의 사례를 채집해왔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면서도 그 불통의 당사자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취향의 공동체’ ‘힐링’을 통해서만 이를 해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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