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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례 “소설가가 특정한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건 스스로 구속하는 짓”

지금,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 『낙타의 뿔』 모든 인간은 꾀보 사슴이자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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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된 애인이 사막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믿으며 황폐한 삶을 견뎌가는 효은,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으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추방 위기에 놓인 조선족 여자, 내몽골 뒷골목 노름판을 주름잡다가 한국으로 도망쳐 온 사기꾼 구씨,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우연처럼, 필연처럼 한 지붕 아래 모여 한철을 살게 된다. 지지리 궁상맞은 비루한 삶 속에서 미운 정 고운 정 싹틔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밥상처럼 따뜻하고 뭉근하게 퍼져간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은 가족이지만 그 경계가 확실하지는 않다. 최근 황선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김현식 사회학과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화제다. 「재산상속대상 결정요인 분석」 은 아들은 동거 여부와 상관 없이 상속 대상이나 딸은 동거해야 상속하겠다는 경향이 우리사회에 강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딸보다는 아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질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가족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로 ‘같은 핏줄’을 들지만, 가부장제에서는 핏줄보다는 남자라는 성별이 우선했다. 상속을 위해 다른 핏줄(서자)을 들여오는 경우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고 서자를 들일 때 완전히 다른 핏줄을 데려오지는 않았다. 주로 부계 쪽의 남자 아이를 서자로 들였다. 어쨌든 지금보다 덜 복잡한 전근대사회에서도 가족제도는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어제는 남이었는데 오늘은 가족으로써 겸상을 할 수 있는 게 가족.

서울의 변두리, ‘궁전빌라’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낡아빠진 다세대 주택. 주인공인 효은의 터전이자 장편소설 『낙타의 뿔』의 무대다. 그곳에서 효은은, 아내와 이혼하고 쓸쓸히 늙어가는 아빠와 살고 있다. 재혼을 위해 노력하던 아버지는 조선족 여인을 만나 두 번째 결혼에 성공한다. 살갑지 않은 효은과 궁전빌라의 안주인을 자처하는 조선족 여인 사이에 냉기가 감돈다. 효은의 아버지는 딸 편을 들지 않고, 아내의 손을 들어준다. 계모로부터 친자식이 아니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전해들은 효은, 행방불명이 된 옛 애인 규용을 찾으러 가출을 감행한다. 오랜 방황을 견딜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그녀, 할 수 없이 다시 궁전빌라로 돌아온다.




핏줄 안 섞인 타자와 가족처럼 지내기

아버지가 쓰러진다. 아빠의 병은 암. 그에게 남은 시간은 짧았다. 아버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효은에게도 당혹스러웠지만 조선족 여인에게 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국적을 노린 사기 결혼으로 요즘은 결혼한다고 해서 바로 한국 국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한 뒤 일정 기간 살아야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고,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요건이 많다. 그러므로 배우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코리안 드림을 노린 조선족 여인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 셈이다.

벼락으로 모자라 조선족 여인에게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다. 얼마 안 되는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사촌들이 병원으로 모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국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핏줄 섞인 자신들이야말로 유산을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여인에게 폭언은 기본이고 육탄전도 서슴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온몸으로 저지하며 여인은 결국 아버지의 장례까지 무사히 치른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낡은 빌라가 전부. 유산 분배는 여인에게 55, 효은에게 45로 결정. 빌라가 팔릴 때까지 둘은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기로 정한다. 여인이나 효은 모두 당장 갈 데가 없었고, 설사 갈 곳이 있더라도 한쪽이 빌라를 처분하고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궁전빌라가 팔릴 때까지 효은은 사라진 규용을 추억하고 여인은 이곳 저곳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외국인등록증을 받으려고 힘쓴다.

그러던 중 궁전빌라에 식구 한 명이 더 는다. 조선족 구씨. 성격도 호탕하고 입담도 좋은 구씨는 효은에게 놀라운 말을 전했다. 몽골 사막에서 규용과 비슷한 한국 남자를 본 적이 있다는 것. 그러나 구씨는 사기 전력이 많은, 사기꾼이기도 했다. 조선족 여인의 돈을 사기로 가로챈 적도 있었다. 궁정빌라에 살게 된 이유도 여인이 사기당한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서로 핏줄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낙타의 뿔』 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주인공 못지 않게 매혹적인 사람이 바로 구씨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그의 존재로 이야기에 긴장감이 부여된다. 구씨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아니나 다를까, 사연이 있었다.

『낙타의 뿔』 은 처음에 내기로 했던 출판사가 경영난으로 출간이 미뤄졌다. 그러던 중 조선족 출신 가이드와 친구와 함께 3명이 중국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에 여러 문제가 생겼다. 누구보다 현지 사정을 잘 알아야 할 가이드가 관광지에서 속아 돈을 떼였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으나, 생각해 보니 그 가이드가 사기를 치는 느낌이었다. 구씨의 모델이 된 사람이 바로 이 가이드였다.


우리는 사슴일까 낙타일까

구씨와 마찬가지로 『낙타의 뿔』 이라는 제목도 모티브가 있다. 바로 몽골 설화다. 윤순례 작가는 실크로드에 관한 다른 소설을 구상하던 중 낙타에 빠졌다. 낙타를 공부하다 만난 게 바로 낙타와 꾀보 사슴에 관한 설화였다. 낙타에게는 원래 뿔이 있었는데, 이 뿔을 꾀보 사슴이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설화에서 낙타는 사슴에게 뿔을 받으러 가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한편 꾀보 사슴은 낙타에게서 빌려간 뿔을 자랑하며 우아함을 뽐낸다. 참고로 설화에서 ‘뿔’이라는 장치는 원초적인 신성함, 힘 등을 상징한다.

사랑하던 연인 규용과 집나간 조선족 여인을 묵묵히 기다리기만 하는 주인공 효은의 처지와 낙타가 비슷하다. 효은 외에도 조선족 여인, 구씨 등이 뿔을 빼앗긴 낙타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혹은 이 시대 사슴은 누구일까.

“우리 모두가 꾀보 사슴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편안함을 취하려는 심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동시에 낙타이기도 하다. 피해의식이 있을 때는 스스로가 낙타의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조선족 새엄마도 처음에는 한국 남자를 등에 업고 사슴처럼 살려고 했다.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고단한 삶을 시작한다. 낙타로써의 삶 말이다.”




소설 속 인물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나 자신도 몰라

『낙타의 뿔』 은 윤순례 작가가 6년 만에 쓴 신작이다. 1996년 <문예중앙>에 「여덟 색깔 무지개」 로 등단하여, 2005년 장편 『아주 특별한 저녁 밥상』 을 썼다. 이후 2007년 소설집 『붉은 도마뱀』 을 출간했다. 200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소설 부문 신진예술가상, 2005년 오늘의 작가상, 2012년 아르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받은 상은 많으나, 작품 수는 다소 적다. 창작활동이 다소 뜸했던 이유를 물었다.

“등단한 뒤에도 문학사상에서 근무했다. 문학사상에 근무했을 때 자세는, 소설이 현실의 생활 아래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월급이 소설보다 중요했다. 그 기간이 오래 갔다. 대학을 졸업했으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 사고가 꽤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등단하고 뜸하게 단편 발표하면서도 계속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생활도 많이 했고, 결혼도 했고. 살면서 좋은 작품도 많이 읽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 태도가 변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생활보다 소설이 위에 있다.”

앞으로 창작에 전념하겠다는 윤순례 작가. 그녀의 독자라면 윤작가의 바뀐 마음가짐이 반가울 테다. 자연스레 그녀의 차기작이 궁금해졌다.

“아르코문학상을 수상하면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 서사가 있으면서 연작 느낌의 작품을 구상 중이다. 국경밖에 있는 한국인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방인들을 주제로 연작처럼 묶어서 올해 안에 창작집을 낼 계획이다.”

『낙타의 뿔』 은 조선인을 비중 있게 묘사한다. 앞으로 나올 소설집에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그러면서 여러 곳에 걸쳐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 경계인을 향한 관심은 어떻게 생겼으며, 작가가 된 계기에 관해 물었다.

“특별히 어떤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작가는 모든 인간에게 창을 열어놔야 한다. 어느 인물, 어느 계층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자신 안에 경계가 생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인생을 열린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구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소설 속 인물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자연스럽게 됐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줄곧 상을 탔고 대학에서도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엄마가 태몽 이야기를 들려 줬다. 산에서 청색 구렁이를 보는 태몽인데, 뱀을 길에서 보는 거랑 집에서 보는 거랑 산에서 보는 게 다 풀이가 다르다. 태몽풀이 책으로 봤더니, 작가나 연예인이 될 꿈이었다. 힘들 때, 태몽을 생각한다. 작가 될 태몽이니 글을 써야지, 하며 힘을 얻는다.”

태몽부터 천생 작가인 윤순례 소설가. 앞으로 그녀가 그려낼 존재가 어떤 인물일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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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뿔 윤순례 저 | 은행나무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윤순례가 6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낙타의 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 여성의 내면적 방황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방인들의 삶을 다룬 다문화 주제 소설로서도 그 빛을 발한다. 다른 색깔, 다른 질감을 가진 두 개의 서사를 맛깔스럽게 버무려내는 작가의 문학적 원숙미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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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손민규(인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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