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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남고에서 시축제를 한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11월 ‘향긋한 북살롱’ 『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인 ‘향긋한 북살롱’ 깊은 여운의 시어로 현대인의 외로움을 어루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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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속내를 알기란 쉽지 않다. 도통 시원스레 말하는 법이 없고, 겨우 터져 나오는 말 한마디 역시 자못 함축적이다. 어찌 보면 시인은 그래서 시를 통해 말하고, 세상과 만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산해지는 바람 탓에 따뜻한 대화가 더욱 그리워지는 늦가을, 이병률 시인과 독자들이 함께한 공간을 찾았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 많은 시인들이 자조적인 심정으로 심심치 않게 언급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인들은 마음을 농축한 시를 끈질기게 쏟아내고, 그 시는 다시 가냘픈 생명력으로 현대인의 삶을 비춘다. 다행히 개중에는 이병률 시인의 작품처럼 꽤나 예외적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있다. 과연 무엇이 ‘시를 읽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의 시를 읽게 하는 것일까? 그런 약간의 호기심, 가볍지 않으면서도 긴 여운이 남는 시인의 속내를 기대하며 독자와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최근 출간한 『눈사람 여관』은 그의 4번째 시집이다. 이젠 대부분 ‘모텔’이란 명칭으로 뒤바뀌어 버린 상황에서 시인은 고집스레 ‘여관’이란 단어를 시어로 끄집어내고 있다. 수많은 방랑자가 머무는 곳, 타인의 흔적과 자신의 흔적이 어쩔 수 없이 뒤섞이는 독특한 이 장소를 통해 과연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혹자는 시인의 그간 작품을 ‘바닥없는 슬픔’이나 ‘깊고 조용한 응시’ 또는 ‘절박함’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정답은 없다. 시는 읽히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가는 탓이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 속에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적인 시어 이면에는 지독하리만치 고뇌하는 시인의 심상이 녹아 있다. 막연하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자의적이지만, 나름대로 해석해 공감한다. 따지고 보면 타인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이 오롯이 그 원형을 유지한다 것이 더 이상하다. 그러나 현상으로 나타나는 분명한 사실은 이병률 시인의 시가 대중의 마음에 적잖은 위로를 던진다는 것이다. 시가 좋으면 시를 쓴 사람이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이날 시인을 만나기 위해 온 독자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월요일, 늦가을의 찬바람, 해떨어진 저녁 무렵

독자들과 이병률 시인이 마주한 곳은 서울 홍대 앞 상상마당, 시인이 이 장소에서 독자들과 함께한 것은 지난 2010년 여행에세이 『끌림』 행사 이후 3년 만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진 않지만, 시인은 “그때와 지금의 감회가 다르지 않다”는 말로 첫 마디를 시작한다. 월요일, 그리고 해떨어진 어스름한 밤의 시작, 늦가을의 찬바람까지…. 탐탁지 않은(?) 삼박자가 겹친 날이었지만, 시인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반전된다.

“올해 단풍은 유난스러운 것 같아요. 해마다 가을이 되면 ‘단풍 별로 재미없네’라는 생각이 들 곤 했는데, 올해는 굉장한 것 같아요. 얼마 전 대구에 일이 있어 갔다가 단풍을 보려고 산에 올라갔었거든요. 시간을 쪼개서 산을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도 단풍 구경 한 번 가세요. 시도 쓰시고요.”

이병률은 시인이자 여행에세이 작가이며, 방송작가다. 실제 그의 팬 중에는 에세이에 끌린 후 시에 빠져든 이들이 적지 않다. “책을 낼 때는 별 느낌이 없는데 시는 좀 다르다”는 시인에게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독자들. 평소 그의 절친한 동생으로써 진행을 자청한 오은 시인은 그런 기대에 호응해 이병률 시인에게 굳이 독자들과 함께한 기분을 묻는다. 몇 초의 침묵이 깨지며 시인이 다시 입을 연다.

“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함께한 독자들이) 재미없어 하시면 저도 조금 힘들긴 하죠. 산문집보다는 그래도 시가 어렵겠죠. 제 경우 시 쓰는 시간이 스무 배는 더 드는 것 같아요. 그래도 (독자들이) ‘시를 읽겠다’는, 그런 빛을 담고 찾아 준 것이 감사하죠.”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시인이 첫 낭독을 위해 시집을 펼쳤다. 낭독에 앞서 시에 얽힌 조금 엉뚱한 에피소드가 곁들여지며 진지했던 독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이 시를 한 남자가 여자에게 읽어줬대요. 그런데 여자는 왜 자기에게 읽어줬는지 모르겠다며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남자가 헤어지자고 하는 거다’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두 사람은 헤어진 상태에요.”
마음의 기차역

기차는 떠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바깥 한데에서 뒹구는 잎사귀들은 헤아릴 것을 찾고

힘이 큰 바람에 기차역의 철골이 진동한다

천사는 다녀가지 않는다

유독 떠나고 돌아오는 인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어느 먼 데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탁자에 놓고 보며 재난을 막으려는 것처럼

삼십 촉 알전구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건 옆에 와 있는 천사를 기다려서다

천사는 떠나지 않는다

천사는 연고(緣故)가 없어서 대리인이 아니라서 천사는 가까이 있다

기차는 떠나지 않는다, 이별(離別)을 찾으러 돌아온다

기차역 형광등이 파르르 떨면서 신발 등에 떨어진 고추장 자국을 비춘다

마음에 지나간 기차 바퀴 자국과 옛 애인에게 겨눈 잘못은 지워지지 않는다

떠나고도 오래 남아 마음의 반찬이 된다
오은 시인은 진행에 앞서 좋아하는 형, 이병률 시인의 시집 네 권을 모두 읽어봤다고 한다. 그러면서 꽤 많은 시가 ‘떠나고 돌아오고, 잠깐의 머묾’의 느낌을 주며 긴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시인이기에 시인에게 궁금한 구석도 있다. 이를테면, ‘언제 시를 쓰는지’와 같은 질문이다. “작정하고 하루를 정해 시를 쓴다”는 오은 시인의 말에 이병률 시인은 ‘시가 오는 순간’을 시처럼 묘사한다.

“저도 일요일에 시를 쓴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규칙적으로 쓰려니 더 안 써지더군요. 어떤 날은 점 하나를 뺄지 넣을지를 온종일 고민하며 보내기도 했고요. 그날 이후 더 이상 일요일은 시를 쓰지 않아요(웃음).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요일을 무시하고 시를 쓰게 되네요. 확실히 여행가서 시를 쓰면 한두 줄을 가지고 화두처럼 지니고 다니며 이리 굴리고 저리 늘려보곤 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빵이 발효되는 듯한 느낌이 오면 불꽃처럼 그것을 쭉 적죠. 그날은 제일 잘 산 하루 같아요. 맛있는 거 먹어도 될 것 같고(웃음). 그런데 전 혼자 있을 때는 잘 안먹는 편이고 술도 안마시니, 누가 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여행에세이를 시처럼 쓰는 작가로 먼저 유명세를 얻었던 시인이기에 여전히 시인보다 여행작가로서 그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여행을 간다”는 말로 애착을 드러낸다. 세상의 시선이 자신의 어느 한쪽만을 비추는 듯한 기분에 서운함도 들지만, 에세이 덕분에 자신의 시 한두 편 읽는 독자가 있을 거라 생각으로 위안 삼곤 한다. 이어서 『눈사람 여관』중 「여지」 를 오은 시인이 낭독했고, 다시 이병률 시인이 「비정한 산책」 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낭독을 이어갔다. 독자들로 채워지고 남은 공간에 다시 시어가 채워지며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갔다.




여관은 시적인 공간

두 편의 시 낭독이 끝난 후 오은 시인은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된 ‘여관’이라는 공간에 깃든 이병률 시인의 생각을 물었다. 이병률 시인은 ‘20대 시절 처음 여관을 경험하며 어떤 짐도 필요 없지만 약간의 결핍이 있는 공간’이라는 말로 속에 담긴 생각을 털어낸다.

“모든 사물들, 유리창에서 비춰지는 빛깔도 내가 사는 공간과 굉장히 다름을 느꼈어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낯선 공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긴장을 하게 되고요. 내가 도피해 있을 수 있는 일종의 무대이자 시적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요즘에는 모텔이라는 말을 많이 쓰이지만, 예전에는 여인숙이기도 했죠. 그 이름은 계속 변형돼 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굳이 여관을 택한 것은 그 단어가 ‘여행자가 머물러 가는 공간’이란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시에 대한 이야기와 낭독이 이어지던 중간, 이병률 시인은 의외의 게스트를 소개했다. 얼마 전 그가 심사위원으로 가게 된 화곡고등학교의 시낭독축제에서 만난 조성대, 강민규, 김민준, 조범준 학생이다. 화곡고등학교는 올해로 6회째 시낭독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시를 낭독하는 축제가 아니라 10대의 방식으로 랩이나 노래를 통해 선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네 명의 학생들은 특히 이병률 시인의 데뷔 당시 작품인 「좋은 사람들」 과 이번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 「눈사람 여관」 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다. 피아노 연주곡과 랩이 된 시, 비트박스가 어우러진 무대를 선보인 학생들을 보며 시인은 대견함을 감추지 않는다.

“남고에서 시축제를 해마다 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어요. 고맙기도 했고요. 특히 그날은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갔어요. 열 세 번 째 팀의 낭독까지는 큰 일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제 시로 이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더군요. 제게 일종의 자극이 됐죠. ‘시를 좀 더 잘 써야 되지 않겠니’라는 자문을 하게 되더군요(웃음).”

작지만 유쾌한 공연이 끝나고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시와 산문의 차이를 묻는 독자의 질문에 시인은 “산문은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 때 쓰는 것이라면, 시는 각각의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의 입자들이 눈덩이처럼 모여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시인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입장에서 깨닫고 배우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연애 경험에 대한 질문에는 “사랑하는 감정은 모든 감각을 열게 한다”고도 답했다. 질문은 더 남은 듯했지만, 정해진 시간은 끝에 닿고 있었다. 시인과의 만남은 독자들의 기대를 뛰어넘은 듯했지만, 궁금증은 모두 해소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시인은 앞으로도 계속 시를 통해 세상과의 교류를 시도할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시인에게 시 외의 다른 말은 사족(蛇足)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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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이병률 저 | 문학과지성사
찰나에서 찬란을 발견해내는 시인 이병률의 새 시집 『눈사람 여관』 이 출간되었다. 1995년 등단 이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선보여 온 특유의 바닥없는 ‘슬픔’과 깊고 조용한 ‘응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의 안팎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절박함’이 여전한 이번 시집에서 이병률은 이러한 감정과 정서보다 더 근원적인 지점을 찾아 나선다. 자신, 어쩌면 당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어떤 ‘현’ 하나를 슬쩍 건드리고 그 진동을 통해 돌연 드러나는 ‘존재’를 고찰하는 일, 그 ‘존재’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처연(悽然)을 묻고 또 묻는 일로 시인의 행보는 정처가 없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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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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